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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 100년](28) 비밀리에 조선으로 진입

편집/기자: [ 최승호 ] 원고래원: [ 당사학습교욱 ] 발표시간: [ 2021-06-11 10:30:44 ] 클릭: [ ]

[중국공산당 100년](28) 비밀리에 조선으로……지원군 압록강을 뛰여넘어

1950년 6월,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 조선 전쟁의 형세가 돌변하면서 중국 대륙의 안전도 엄중한 위협을 받았다……

1950년 10월, 중공 중앙은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항미원조, 보가위국!

모든 것이 준비되였다. 대군이 조선에 들어가기만 기다린다. 바로 그 때, 팽덕회는 모택동의 긴급 전보를 받았다. 전보에서 모택동은 대군이 움직이지 말 것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팽덕회와 고강더러 속히 북경으로 올 것을 에 요구했다. 출국작전명령이 금방 내렸는데 이 중대한 고비에 도대체 어떤 변고가 생겼을가?

1950년 10월 13일, 팽덕회와 고강은 긴급히 북경으로 날아갔다. 알고 보니 큰 기대를 품었던 쏘련 공군의 엄호가 무산되였던 것이다.

 
쓰딸린.

쓰딸린이 갑자기 말을 바꾸어 원래 언약했던 공중 엄호를 잠시 늦추고 비행기, 땅크, 대포 등 장비만 원조하겠다고 한 것이였다. 만약 쏘련 공군의 지원이 없으면 지원군은 미국의 강대한 공중화력에 시달리게 된다.

이날, 모택동은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 쓰딸린에게 전달하게 했다. 여러 방면의 리해득실을 분석한 뒤 전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지적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는 응당 참전해야 하며 반드시 참전해야 한다. 참전하면 리익은 지극히 크고 참전하지 않으면 손실이 지극히 크다.”

조선출병은 시위에 오른 화살과 같았다.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 조선원조작전을 결심하고 대군이 조선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미국도 여러 방면으로 중국과 쏘련 등 여러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 목적은 딱 한가지, 중국 혹은 쏘련의 조선 출병 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이였다.

사실상, 당시 거의 모든 미국 군사정보기관들에서는 중쏘의 조선 출병 여부를 첫번째 대사로 삼았다. 이를 위해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친히 유엔군총사령관 맥아더와 회담을 했다.

회담 이틀 후 트루먼 대통령은 로스안젤스에서 라지오 연설을 발표했다. “조선공산당의 효과적인 저항 력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반드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평화를 수호하려는 중국인민의 결심과 력량을 과소평가했다.

바로 이 시각, 압록강 북안에는 20여만명의 중국인민지원군이 그들의 통수와 함께 벌써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10월 15일 깊은 밤, 제42군 군장 오서림은 지원군 사령부에서 보내온 긴급 전보를 받았다. 내용은 제42군 선두 부대가 16일 밤에 압록강을 건너 장진호 지역에 결집하라는 것이였다.

기실, 일찍 3개월전 제42군이 금방 중조 변경에 집결했을 때 오서림은 작전처장, 정찰처장을 비밀리에 이끌고 기관사 기사로 변장하여 조선경내에 가서 지형을 정찰했던 것이다. 달리는 기차에서 오서림은 사람이 걸어서 강을 건너는 것을 발견했다. 여기서 계발을 받은 그는 압록강 집안(오늘의 집안)통상구에 수중다리를 가설할 생각을 했다.

오서림 군장은 바지를 걷어올리고 강가로 가보았다. 그는 큰 바위, 푸른 바위들이 작은 산처럼 무져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모든 돌들을 압록강에 날라가면 수면아래 다리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공병들의 반복적인 시험을 거쳐 길이 375메터 되는 수중다리가 순조롭게 만들어졌고 오서림은 친이 중형 짚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는데 성공했다. 수중다리의 건설은 부대의 순조로운 도강을 보장했을 뿐만 아니라 미군의 공습도 방지할 수 있었다.

10월 16일 저녁, 중국인민지원군 제42군 선두 부대는 부사장 소검비의 지휘하에 먼저 집안으로부터 비밀리에 도강하여 조선에 진입했다.

10월 19일, 중국인민지원군 제13병퇀 제38군, 제39군, 제40군, 제42군 및 포병부대 20여만 대군은 계획에 따라 중조 변경의 안동(지금의 단동), 장전하구(长甸河口), 집안을 통해 압록강을 건너 비밀리에 조선에 진입했다.

조선출전부대의 은페성을 보장하기 위해 부대의 도강 작전은 매일 18시 30분에 시작되여 이튿날 새벽 4시에 끝나고 5시전에 전부 은페를 끝마쳤다.

지원군은 조선에 진입한 뒤 일률로 야간 행군을 했다.

국문을 떠나 고향을 바라보니 몸은 이미 타향에 있었다. 이 젊은 전사들은 조국 인민들의 중대한 부탁을 짊어지고 있었다.

“씩씩한 기세로 압록강을 뛰여 넘어……” 노래의 가사는 그리 길지 않아도 새 중국 한 시대의 문화 부호(符号)로 되였다.

이 가사는 제1진으로 조선에 진입한 장병중 한 지도원이 쓴 출정시다.

당시 포병 제1사 제26퇀 제5견 지도원으로 있던 마부요는 이렇게 말한다. “조선에 들어가기 반달전에 있은 선서 대회에서 나는 큰 교육을 받았다. 하루 저녁 필을 들어 이렇게 썼다. 씩씩한 기세로 압록강을 건느다. 평화와 조국을 보위하는 것이 바로 고향을 보위하는 것이다. 중화의 훌륭한 아들딸들 한마음으로 단결하여 항미 원조하여 야심찬 미제 승냥이를 물리치자.”

선서 대회이후 기자 진백견은 마부요를 취재할 때 시가를 아주 잘 썼음을 발견하고 "압록강을 건느다"를 "뛰여 넘다"로 고치라고 제기했다. 뒤이어 이 전선 통신은 1950년 11월 26일 <인민일보>에 발표되였다.

저명한 음악가 주외치가 이 시가를 본 뒤 반시간 만에 곡을 달았다. 전군, 전국에 울려퍼졌고 지금까지도 전해져 불리워온 <중국인민지원군 전가(战歌)>가 이렇게 탄생되였다.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으나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잘 알지 못했다. 이는 지원군의 고도로 되는 조직성과 규률성의 덕분이였다. 행동이 은페적이고 위장이 교묘했기에 조선에 들어간지 엿새 후에야 미군은 약 5만명의 군대가 남쪽으로 진군하고 있다는 것을 정찰해냈다.

조선의 김일성수상을 만나 재빨리 전반 국면을 장악하기 위해 취임한지 단 12일밖에 안되는 지원군 통수 팽덕회는 대부대보다 먼저 몇시간 전에 출국 작전의 길에 올랐다. 이와 동시에 지원군 후속부대들도 륙속 조선에 들어갔다.

10월 26일, 제50군은 동북군구 명령을 받고 조선으로 나갔고 하루 후에 제66군도 조선으로 나갔다.

10월 하순에 이르러 지원군의 6개 군이 전부 조선에 들어섰고 대전은 거의 일촉즉발이였다. 그러나 지원군이 비밀리에 조선에 들어가기 며칠전 미국 워싱톤 당국과 일본 도꾜의 맥아더총부는 조선전쟁이 이제 곧 끝나리라는 락관적인 정서에 젖어있었다.

1050년 10월 20일, 미국을 위수로 하는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했다. 곧이어 병력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계속하여 조선 북부 변경까지 재빨리 밀고 나가 11월 23일 감은절전에 전반 조선을 점령하려 했다.

평양을 점령한 후 맥아더는 거만하게 선포했다.“평양은 적들의 수도이다. 그의 함락은 북조선의 철저한 실패를 상징한다.”그러나 이 결론은 너무 일찍 내려졌다.

맥아더의 입에서 감히 압록강을 넘어오지 못할 것이라던 중국 군대가 벌써 출발준비를 마치고 창끝을 감히 북진하는 미군을 위수로 한 유엔군을 겨누고 있을 줄은 줄곧 전세를 오판하고 있던 그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다.

조선전쟁은 결코 끝나지 않았다. 위대한 항미원조 전쟁의 막은 한창 펼쳐지고 있었다.

출처: 당사학습교육

편역: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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