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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1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5-27 14:55:02 ] 클릭: [ ]

▧ 김동수

제4장 프랑스에서 미술을 탐구

1929년 가을, 한락연은 상해를 거쳐 프랑스 류학을 떠났다.

한락연의 동창생인 로소비는 한락연이 출국할 때의 정경을 생생하게 회고하였다. “1929년, 한락연은 상해에 와서 배를 타고 프랑스로 근공검학을 떠났다. 나는 부두에까지 그를 바래주면서 빨리 학습을 마치고 귀국하여 솜씨를 보이라고 고무격려하여주었다.”

프랑스 류학 시절의 한락연(좌1)

한락연은 선박을 타고 1개월간의 지루하고 기나긴 항해 끝에 프랑스 마르세유항구에 도착하였다.

지난 세기 20년대, 프랑스는 중국 젊은이들, 특히는 꿈과 신앙을 가진 수많은 열혈청년들이 더없이 동경하고 흠모하는 나라였다. 중국혁명의 제1세대 지도자들인 주은래, 주덕, 등소평 등 많은 중국공산당 초창기 당원들이 1920년대 초반에 벌써 프랑스에서 류학하였다. 한락연은 이들보다 둬발 늦은 1929년에 류학 길에 올랐다.

현재 하북성 보정시 금태역거리 35번지에는 ‘프랑스류학근공검학기념관’이 세월의 이끼와 운치를 머금고 고풍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기념관에는 1917년부터 1920년 사이에 ‘프랑스류학 예비반’을 4기째 꾸려 231명이 졸업하고 그중에서 93명이 프랑스로 류학했다고 기재되여있다. 필자는 이 기념관에서 당시 프랑스 류학생들이 배를 탔던 항해 로선도와 마르세유항구의 낡은 사진을 발견하고 수집하였다.

당시 프랑스는 세계 예술의 중심지, 서방 현대 문화예술의 집거지와 현대 미술운동의 발원지로 되여 이름이 쟁쟁한 수많은 예술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면서 바야흐로 그 흥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세계 각국의 나젊은 예술가들에게 빠리는 하나의 강대한 자기마당처럼 거대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순풍에 돛단 배처럼 이곳에 몰려와서 예술에 대한 소망과 꿈을 이룩하려고 자신들의 심신을 불태웠다.

늦가을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드는 낯설은 이역만리 먼 땅에 도착한 한락연은 놀라운 의지력으로 프랑스어를 배우는 한편 생계를 위해 모지름을 써야 하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29년 유럽 자본주의 나라들에 불어닥친 경제위기는 한락연에게는 말 그대로 설상가상이였다.

후날 당시 여려웠던 생활처지를 한락연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나는 ‘집’을 팔아 생활을 했다. 그 때 나는 몸에 동전 한푼 없는 알거지였다. 날씨가 추우면 헌 신문을 옷 속에 쑤셔넣어서 추위를 견디였고 생존을 위해 멋진 집이 보이면 그려서 집주인에게 팔아 얼마 되지도 않은 돈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집’을 팔았다는 이야기이다.”

장춘에서 발행되던 《사회과학전선》(1982년 제4기)에는 상수홍의 다음과 같은 회고록이 실렸다. “처음 프랑스에 왔기에 사람들이 생소하고 언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고 거기다 학습까지 해야 하니 정말 쉽지 않았다. 이런 간고한 생활은 공비 류학을 따내기전에 나도 해보았다. 당시 음악가 선성해(冼星海)도 리옹에 있었는데 생활고의 핍박으로 커피점에 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해주고 풋돈을 벌었다. 근공검학은 실제로 일반인들이 상상한 것처럼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였다. 이것은 우리 세대 사람들이 일종의 사회 대학에서 간고분투와 악전고투로 경험한 생활방식이였다.”

근공검학은 누구에게나 한차례의 시련이고 도전이였다. 한락연은 당시 빠리에서 어렵게 류학생활을 하던 상수홍의 사정을 또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빠리를 말하면 사람들은 아마 빠리의 번화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더없이 호화롭고 사치한 귀족생활과 랑비만 먼저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도 례외가 아닌 것은 이곳에도 빈궁과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고 간고분투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빠리는 번화한 대도시일 뿐만 아니라 근대 문화가 집중해있는 곳이다. 상선생은 빠리에서 학습하고 생활하였는데 그 시기 우리 학생들 가운데서 가장 간고한 사람중의 하나였다. 그는 한사람의 관비(官费, 상서홍은 관방에서 파견한 류학생임)로 세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이 조각을 배우는 것도 도와줘야 했다. 때문에 그 때 그들은 괴롭고 고생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빠리의 암울한 회색 하늘과 저기압의 압박 속에서 머리를 들지 못하고 학습하고 생활하였다. 그들은 빠리에 살고 있지만 컴컴한 화실 속에 갇혀있었기에 빠리의 번화함을 몰랐고 알았대야 방관자인 손님에 지나지 않았다고 말하군 하였다. 학습을 제외하고는 원래 인연이 없는 그 번화하고 사치한 생활은 누릴 수도, 꿈 꿀 수도 없었다. 바로 이렇게 간고분투한 결과, 그의 작품은 매년 펼쳐지는 ‘봄철살롱’에서 점차 인기를 끌고 영예상도 받았다.”

한락연은 리옹박물관에 가서 프랑스미술을 감상하고 연구하는 한편 리옹중법대학에서 류학중이던 류학생들인 상수홍, 려사백 등과 교류하였으며 중국인 식당에서 유럽 첫 개인전을 가졌다. 너무나도 대담한 거동이였다.

“내가 기억하건대 달빛이 밝은 밤에 저희 중법대학 기숙사에서 압록강변(두만강을 잘못 기억하고 쓴 것 같다.―필자 주)에서 온 한락연을 만나게 되였다. 얼굴이 불깃불깃한 그는 생기가 넘쳤다. 대화를 한 지 얼마 안되여 우리는 오랜 친구처럼 되였다. 그는 겨드랑이에 끼고 온 한뭉치의 풍경 수채화를 보여주면서 중국인 음식점에서 개인전을 준비중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서 나는 굉장히 놀랐다. 얼마 후, 중국인 음식점에서 그의 전시를 보았는데 우리가 예상한 것처럼 별로 좋은 효과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자신감 있게 아주 락관적으로 그의 수채화 스케치를 계속하였다. 그는 프랑스 환경이 나를 이렇게 몰고 있으며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당신들처럼 국비생이라면 이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군 하였다. 얼마 후 그는 리옹은 너무나 빈궁한 곳이여서 프랑스 남부에 있는 니스로 가겠다고 하였다. 어느날 리옹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다. 그 날 저녁, 니스행 기차표를 끊었다고 하였다. 무슨 어려운 점이라도 없는가고 물으니 그는 없다고 하였다. 하지만 돈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는 몸에 지녔던 돈을 그의 호주머니에 찔러넣어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갈라졌다.” 상수홍의 회억중의 한단락이다.

한락연은 같은 해 여름 니스에서 제2차 개인전을 개최하였는데 그 반향과 성과가 꽤나 좋았다. 한락연은 1년 사이에 리옹과 니스에서 두번이나 개인그림전을 가졌는데 두번째 개인전부터는 주위 사람들의 보편적인 긍정을 받았고 몽마르트언덕광장(蒙马头峰顶广场)에서 그림을 팔 수 있는 자격도 가졌으며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학비를 충당할 수 있었다.

성성교수는 “프랑스 빠리에서는 아무 곳에서나 그림을 팔지 못하고 지정한 곳에 집중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몽마르트언덕광장이였다. 그렇다고 아무나 그 곳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광장 업주의 심사와 동의를 거쳐야 하고 또 사전에 그림전을 개최한 기록이 있는 자만이 그 곳에 진입할 수 있었다.”고 회억하였다.

당시 몽마르트언덕광장은 빠리를 찾아온 세계 각국 예술가들의 집거지로서 사람들이 밀집하고 상업이 발달하여 화가들이 집중하여 그림을 팔고 또한 자기의 재능을 자랑하고 표현하는 장소로도 이름이 높았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높은 에스빠냐의 대가 피카소와 일본인 후예인 프랑스 출신 미술대사 후지다 츠쿠하루(藤田嗣治)도 이곳에 와서 그림을 련마하였다고 한다. 당시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파는 화가들은 어쩌면 하나의 문화경관일 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귀족같은 생활을 향수하고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존엄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1931년 한락연은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루브르궁미술학원(卢浮宫美术学院)에 입학하였다. 루브르궁미술학원은 1886년 루브르궁박물관에서 첫 발걸음을 떼였으며 프랑스 문화부에서 설립하고 주관하며 루브르궁에 위탁하여 꾸리는 공립학교로서 전문 유럽 미술리론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프랑스 학원파 미술의 대본영이였다. 한락연은 이 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고 강한 지적 호기심과 예술의지를 가지고 목 마른 사람이 물 마시듯이 유럽의 전통적 미술을 학습하고 탐구하였다.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한락연

주말이나 명절 휴식 때면 한락연은 몽마르트언덕광장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고 다부진 생김새와 숙련되고 익숙한 솜씨를 보면서 주변 사람들은 엄지손을 내들며 일본 사람이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이에 몹시 화가 난 한락연은 다음날부터는 아예 옆에다 ‘중국화가 한락연 사생작품전’이라는 작은 광고판을 걸어놓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932년 한락연은 발기자의 한사람으로 ‘중국 프랑스류학예술학회’에 가입하였다. 중국 프랑스류학예술학회는 1932년 프랑스 빠리에서 설립된 우리 나라 프랑스 류학 청년학생들의 조직이였다.

우병렬(虞炳烈), 류개거(刘开渠), 증죽소(曾竹韶), 왕림을(王临乙), 정홍수(程鸿寿), 리운생(李韵笙, 녀), 진지수(陈芝秀, 녀), 려사백(吕斯百), 당일화(唐一禾), 진책운(陈策云), 마제옥(马霁玉, 녀), 진사문(陈士文), 황현지(黄显之), 장자만(庄子蔓), 호선여(胡善余), 활전우(滑田友), 한소공(韩素功), 양염(杨炎), 당량(唐亮), 정만숙(程蔓淑), 료신학(廖新学) 등 회원들이 있었는데 많은 회원들이 작품이 프랑스 여러 살롱전에 입선되였으며 회원작품집도 출판하였다. 1934년, 중국 국내에서 발간하는 《예풍》(艺风) 제2권 8책에 ‘중국 프랑스류학생예술학회’특집을 마련하고 서양화, 조각작품과 론문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바로 이 시기 국내 사정은 9.18 사변의 여파로 준엄하고 복잡했다. 1932년 일제는 장춘에 위만주국을 조작하여 세우고 그 때 이미 페위된 부의를 집정하게 했다. 1934년 3월1일, 부의는 황제로 등극하고 년호를 강덕년이라고 정했다. 일제는 저들의 침략통치를 강화하기 위하여 전세계를 향하여 이 소식을 공포했으며 세계 각국에 있는 기자들과 대사관을 통하여 여러가지 선전과 기편 활동을 추진하였다. 특히 유럽 류학생들을 대상으로 여러가지 롱락, 기만, 유혹 등등 활동을 진행하였다.

한락연은 서수헌 등 동북 출신 류학생들과 공동으로 일본제국주의의 비렬한 음모를 폭로하고 괴뢰정권인 만주국의 기만과 회유를 규탄하는 〈중국 동북4성 프랑스 류학생 선언〉을 발표함으로서 반일사상과 나라의 해방을 위한 굳은 의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공동선언은 《동북지구혁명력사회집》 갑 17권(东北地区革命历史汇集 甲17卷)에 원문 그대로 수록되여있다.

중국 동북4성 프랑스 류학생 공동 선언(1934년 3월 6일):

‘9.18’사변이래, 우리 동북4성은 련이어 함락되였다. 일본은 대륙 침략정책의 실현을 위해 온 천하가 다 아는 사실을 외면하고 괴뢰국을 세웠다. 우리 3,000여만 동포는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생존을 위해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왜놈과 결사전을 벌이고 있다. 3년 동안, 의용군들이 분분히 궐기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용감히 전진하며 피로써 광활한 대지를 물들였다. 비록 단시기 내에 잃은 땅을 광복하지 못했지만 우리 동북4성 동포들은 죽어도 망국노가 되지 않겠다는 정신과 기백을 이미 명백히 전세계에 알렸다. 왜놈들은 인심이 돌아오지 않으니 무력으로 의용군을 소멸하기 위해 날뛰고 있으며 교육을 통해 우리 청년들을 마취시키고 영원히 이 땅을 지배하려고 망상하고 있다. 우리 동북4성을 침략하고도 욕심이 차지 않아 3월 1일에는 부의를 협박하여 제호를 선포하며 남으로는 화북을 소란하고 중국 전체를 침략하려는 책략을 세우고 있다. 피가 흐르고 있는 인간이라면 그 누가 이런 괴물들과 한 하늘을 이고 살겠는가! 왜놈들은 외국에서 류학하고 있는 류학생들이 분발하여 강해지면 그들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유럽 주재 대사관에서 임원들을 도처에 파견하여 괴뢰국의 명의로 유럽 주재 동북학생들에게 학비를 구제해준다며 유혹하든가, 아니면 강제로 귀국조치를 취한다고 협박을 서슴치 않고 있다. 그들의 악랄한 술책과 비렬한 행위는 극에 달하고 있다. 우리 동인들은 국토가 쪼개지고 동포가 유린당하고 있는 현실을 모두 가슴 저리게 느끼고 있으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노력을 가해 무기를 들고 적들을 몰아낼 수 있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학업상 관계로 일시 귀국할 수 없으나 적들의 음모를 폭로하는 조치로서 절대로 적들의 협박과 유인책에 휩쓸리지 않고 나라와 민족에 수치를 주지 않을 것이다. 유언이 와전되고 사회에서 불찰이 생길 것을 우려해 특별히 선언문을 발표함으로 감별해주기 바란다.

/한락연(韩乐然) 서수헌(徐寿轩) 구화붕(邱华封) 손서림(孙西林) 최숙언(崔淑言) 마제옥(马霁玉)

선언은 발표 후 유럽 각국 류학생들 가운데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빠리 개선문 앞에서의 자화상

한락연은 루브르궁미술학원 재학 시절에 학교내에서 제3차 개인전을 열어 왕성한 작품 창작능력을 과시하여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개인전을 통하여 판매한 작품의 수입으로 안정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졸업한 후 한락연은 화란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가서 제4회 개인전을 열었는데 여러 신문에서 크게 보도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벨지끄, 독일, 영국, 뽈스카, 스위스, 이딸리아 등 유럽 나라들을 려행하면서 사생하는 한편 유럽의 전통적 미술을 탐구하였다. 그는 1937년까지 유럽에서 도합 6차의 개인전을 가졌다.

1935년 한락연은 빠리에서 유화 〈빠리 개선문 앞의 자화상〉을 창작하였다. 한락연은 오른손에 화필을 들고 양복을 입고 중절모를 쓰고 있고 얼굴에 미소를 담고 있다. 중국미술가협회 리론위원회 주임 류희림(刘曦林)교수는 “배경은 뤄드의 부조 ‘의용군 출정곡’을 묘사하고 있는데 강한 붓 터치로 쏟아지는 해살 아래서 ‘전쟁의 신’이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동작을 화면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하게 표현함으로써 반파쑈투쟁에 투신한 화가의 애국정열이 고스란히 스며있음을 알 수 있다. 화가의 사상적 내면과 화가의 정서가 잘 담긴 작품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이 시기 한락연은 〈소묘자화상〉도 창작하였다. 그림은 선과 면이 조화를 이루면서 필법이 자연스러웠으며 락관적인 태도와 기색이 잘 드러나있었다고 전문가들은 극찬하였다.

유럽에 체류하고 있을 때 중국의 희곡가 웅식일(熊式一)선생이 중국 예술을 널리 자랑하기 위하여 중국 문화예술을 애호하는 외국사람들을 청하여 중국 고전명극 〈왕보천〉(王宝钏)을 련습하였다. 한락연은 웅식일선생을 도와 이 극의 무대 설계를 맡았다. 〈왕보천〉의 배우와 관중은 전부 유럽인들로 구성되였는데 동방 문화적 색채가 농후한 무대 설계는 그들에게 있어서는 매우 창의적인 것으로서 예기의 목적을 초월하는 효과를 거두었다.

프랑스에서 한락연의 미술 창작과 조예는 남다른 제고를 가져왔고 그 와중에도 혁명가로서의 정치적 사명도 잊지 않았다. 한락연은 프랑스공산당과 련계를 가지고 프랑스공산당 중국어지부 활동에 참가하였으며 1936년 12월에는 ‘유럽화교항일련합회’ 교민부에서 사업하였다.

온가보 전임 총리의 백부인 온붕구(温朋久)선생은 다음과 같이 회억하였다. “나와 락연동지는 나라가 위급하고 고향이 륜락될 림박에 빠리에서 만났다. 우리는 모두가 ‘려구반제동맹조직’(旅欧反帝同盟组织)의 성원이였다. 그는 락천적이고 친절하였고 동지들과 잘 어울렸는데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사람들과 파쑈전쟁과 장개석을 반대하고 어떻게 나라를 구원할 것인가를 토론했다. 그는 늘 사진기를 들고 그림도구를 메고 사람들 속에서 예술 창작에 집념하였다. 많은 사람들중에서 그와 신성해가 지금도 나의 기억과 인상 속에 또렷이 남아있다. 그들 모두가 생활이 비교적 간고한 근공검학자이고 또 예술 창작에 종사한 혁명투사였기 때문이다.”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프랑스류학근공검학운동기념관

1937년 국내에서 ‘7.7사변’이 폭발하였다. 중국인민의 항일전쟁은 전면적으로 시작되였다. 이딸리아에서 소식을 접한 한락연은 급급히 빠리에 돌아와 《빠리석간》(巴黎晚报) 촬영기자 신분으로 파쑈를 반대하는 국제 선전사업에 적극 뛰여들었다.

당시 서안사변 후, 장개석의 지령으로 직무에서 해임당한 양호성 장군이 유럽 고찰 차 프랑스 빠리에 왔다. 8월 26일, 《구국시보》, 《빠리석간》 등 신문사에서는 양호성 장군을 초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좌담회를 열고 중외 기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시간을 가지였다. 한락연은 《빠리석간》 촬영기자 신분으로 취재를 하면서 양호성 장군의 사적을 광범하게 선전하였다.

예술적으로 배우고 배우며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 혁명사업에서 그 어떤 곤난이나 시련도 두려워하지 않고 용왕매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한락연의 인생관이였다. 프랑스에서 8년 동안의 류학을 통하여 한락연의 예술 조예는 이미 최고의 수준과 경지에 이르렀다. 상수홍은 한락연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하였다. “그의 그림을 보면 매폭마다 모두 빛과 색채의 명랑함으로 충만되여있는데 조금도 흐리멍텅하거나 생소한 감이 없다. 그의 익숙하고 간결하고 세련된 수채화 기법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였다. 그의 그림은 그의 마를 줄 모르는 왕성한 정력처럼 나를 감동시키였다.”

한락연은 귀국하여 항일투쟁에 뛰여들려는 불타는 열망을 안고 1937년 10월 29일 양호성 장군 및 그의 수행인원들과 함께 프랑스 선박을 타고 마르세유항을 떠나 11월 26일 향항에 도착하였다.

일행은 조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기념사진을 남겼다. 한락연의 딸 한건립녀사는 흑백사진을 필자 앞에 내놓고 아래와 같이 소개하였다. “이 사진은 온가보 전임 총리의 백부 온붕구선생이 보관했던 사진입니다. 이는 당시 독일과 프랑스 류학생 대표들이 양호성 장군과 함께 저리버호(哲里波号)를 타고 돌아오는 배에서 찍은 것입니다. 이 분이 양호성 장군이고 이 분이 저의 아버지 한락연입니다.”

필자는 《양호성 장군 대전》에서 똑같은 사진을 발견하였다.

8년 만에 귀국하는 한락연의 마음은 끊임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거센 파도처럼 세차게 뒤설레였을 것이다. 전쟁의 포화에 신음하는 조국 산천에 대한 련민과 애정, 백살구꽃 만발한 정다운 고향마을의 흰옷 입은 사람들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사랑하는 처자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뭔가 거창한 사업을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기대감과 희망을 안고 한락연은 장미빛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비장한 각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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