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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9)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4-08 17:15:36 ] 클릭: [ ]

▧ 김동수

3. 상해미술전문학교

장강 하류의 남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남경(南京)은 유구한 력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로서 북경, 서안, 개봉(开封), 락양과 함께 중국의 ‘5대 옛도읍’으로 불리운다. 남경은 력사적으로 건업(建业), 금릉(金陵), 건강(建康) 등으로 불리우다가 19세기 명나라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璋)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하면서부터 남경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남경예술학원(南京艺术学院) 전신이 바로 상해미술전문학교이다. 1912년, 상해 미국조계지내에서 중국의 첫 고등 미술학교인 도화미술원(图画美术院)이 세워졌다.

도화미술원은 학교의 설립 취지를 “첫째, 우리는 동방 고유의 예술을 발전시키고 서방 예술의 깊이와 심오함을 연구한다. 둘째, 우리는 잔혹하고 무정하며 건조하고도 적막한 사회에서 예술을 선전하는 책임을 져야 하며 중화예술의 부흥을 추진한다. 셋째, 우리는 아무런 학문적 토대가 없지만 자신 있게 연구와 선전에 성의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였다.

남경예술학원 교정에 있는 류해속 동상

1919년 류해속(刘海粟)이 이 학교 교장으로 위임되였다. 12월, 학교 리사회를 설립하였는데 채원배(蔡元培), 량계초(梁启超), 황염배(黄炎培) 등 명인들이 리사를 맡았다.

1921년부터 학교 이름을 상해미술전문학교라고 개명하였다. 상해미술전문학교에서는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서양화과’를 설치하였고 1921년부터 ‘고등사범과’를 설치하였으며 1923년 9월부터 ‘중국화과’를 설치하였다.

1919년 이 학교 학술잡지인 《미술》에는 학생의 양성 목표를 “순수하고 옳바른 인재를 만들어내고 개인의 고상한 품격을 배양하고 표현하며… 국민의 고상한 인격을 배양하고… 공예미술인재를 양성하고… 일반인의 미적 취미를 증진시킨다.”고 지적하였다.

진독수, 량계초, 곽말약, 호적(胡适) 등 ‘5.4’ 신문화운동의 중견인물들이 상해미술전문학교의 요청으로 특별강연을 하였다고 한다.

당시의 복잡하고 혼란한 정세 속에서 이러한 진보적인 양성 목표를 세우고 량계초 등 엘리트들의 개혁사상을 수용한 자체도 진보적이고 주목할 점이라고 나름 대로 생각한다.

상해미술전문학교 서양화과 2학년 을반 학생들(앞줄 왼쪽 두번째 사람이 한락연)

한락연은 1921년 3월에 이 학교 서양화과 1학년 갑급반에 입학하였으며 1922년 3월에 2학년 을급반으로 승학하였다. 1921년, 상해미술전문학교는 이미 초보적으로 규모를 갖추었고 정규적인 교학을 실시하였다. 1924년, ‘상해미술전문학교 일람표’에 의하면 당시 학생수는 300명이 넘었다.

당시 서양화과에서는 투시학(透视学), 색채학(色彩学), 예술용 해부학(艺用解剖学), 서양화실습, 미술사, 미학, 예술 개론, 국화(国画), 서양 명화가 평론(西洋名画家评论) 등 기초 과목과 서양명화가 평전(西洋名画家评传), 근대 예술개론, 철학, 중국문학, 외국어(영어, 프랑스어) 등 선택과목을 설치하였다.

특히 서양화과 교학에서 조형학의 기초인 소묘와 회화훈련을 중시하였기에 한락연은 학습 가운데서 기초조형, 투시구조(透视结构), 회화기법 등 방면에서 가장 계통적인 훈련을 받았으며 소묘, 수채, 유화 등 회화기법에서 든든한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이 밖에도 한락연은 투시, 해부, 색채학 등 과목 학습을 통하여 인물 제재, 풍경 제재 및 여러가지 재료를 리용한 회화를 숙련되게 장악할 수 있었다.

한락연의 상해미술전문학교 학적부

어린 시절부터 천부적인 재질로 그림 그리기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한락연은 상해라는 어마어마한 국제도시에서 화가가 되려는 자기의 푸른 꿈과 소원을 이룰 수 있는 활무대를 자기 스스로의 악착같은 노력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오지인 룡정 변두리의 모래밭과 묘지에서 자체로 뿌리고 키운 씨앗이 이제 건실한 싹을 틔우고 바야흐로 무럭무럭 자라게 되였다.

중국의 유명한 만화가이며 1930년대 상해에서 《시대만화》 주필을 맡았던 한락연의 동기생인 로소비(鲁少飞, 1903―1995)는 한락연의 인상을 이렇게 회억하였다.

“동북에서 온 락연은 북방인의 특유한 강직하고 호방한 기질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항상 젊고 활발하고 강인하며 생명력이 넘쳤다. 그는 키는 다소 작았지만 희랍의 아폴로신같은 남성미를 갖춘 아름다운 몸을 가졌다. 그는 항상 기마복을 입고 손에 채찍을 들고 다녔는데 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는 사교 수단이 아주 좋았으며 사람을 정확하게 보는 안목을 지녔다. 그는 그림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목탄을 들고 종이 우에 쫙쫙 소리 나게 오리면 흑백이 선명한 멋진 그림이 나타나군 했다.”

지금껏 공개적으로는 한락연이 우수한 성적으로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되여있다. 한락연의 장녀 한인숙은 “1923년의 어느 하루 모 신문에서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안경을 건 부친의 사진을 보았다.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는 아버지 한광우의 이름이 똑똑하게 씌여져있었다.”고 회억하였다.

1924년 12월 17일 성경시보에 실린 봉천미술학교 학생모집 광고

1924년 1월 25일 한국 서울에서 발행된 《동아일보》는 미술계의 두 수재인 한광우(韩光宇)군과 김복형(金复炯)군이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기사를 실었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한락연의 동창생인 김복형은 상해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중국의 한 중학교에서 미술선생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상해에 있으면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비서로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림시정부에도 관여하였다고 한다. 광복 이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상해에 그대로 눌러앉은 김복형은 독립운동의 공적을 뒤늦게 인정받아 1998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고 한다.

2005년 8월 15일, 광복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한민국 대통령 로무현은 한락연에게 표창장과 훈장을 수여하였다.

표창장은 이렇게 썼다. “고 한락연 우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발휘하여 조국의 자주독립운동에 헌신 노력함으로써 국가 발전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이에 표창함”

현재의 남경예술학원 정원에 세워진 한락연 동상 앞에서

남경예술학원으로 찾아가 정문에 들어서니 상해미술전문학교 옛 대문을 복제한 기념건물과 여러가지 특색 있고 개성 만점인 모형과 조형물들이 자태를 뽐내 예술학원의 풍치를 한결 돋구어주었다.

예술학원 력사연구사무실(校史办)에서 체격이 미끈하고 얼굴이 동그랗고 젊었을 적엔 물론 지금도 대단한 미인인 50대의 마해평(马海平) 주임이 나를 맞아주었다.

내가 한락연에 대해 간략해 소개하자 그는 우리 학교에서 그런 인물이 나온 것은 참으로 자랑찬 일이라며 앞으로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을 약속하였다. 그리고는 자기 집에 혹시 우리에게 필요한 자료들이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일행을 거느리고 집으로 갔다.

초봄인지라 남경의 날씨는 차갑고 스산했다. 2층으로 된 방안은 조금은 어수선하고 란잡했지만 그래도 예술학원 선생의 집답게 아주 개성적이고 분위기 있게 장식되여있었다.

그가 내준 남경예술학원 건교 80주년을 기념하여 출판한 《남경예술학원 력사》는 이렇게 썼다. “한락연은 20년대초에 이 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졸업 후 그는 혁명사업과 예술사업에서 탁월한 공헌을 하였다.”

마선생은 앞으로 학교 력사를 연구하는 데서 한락연을 중요한 위치에 놓고 그의 전반 혁명일생과 예술일생을 조명할 것이며 학교내는 물론 대외적인 선전을 가강할 것이며 가능하면 룡정에서 열리는 한락연연구세미나에도 참가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식사까지 배치해주고 일행을 남경사범학원까지 안내해주었다. 참으로 고마운 분이였다. 아쉽게도 그는 룡정에 오지 못하고 〈한락연의 학생시절 남경미술학원 시공간에 대한 회고〉(韩乐然就读时的上海美专时空还原)라는 론문을 우리에게 보내주었으며 남경예술학원에서는 건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교정내에 한락연의 전신 동상을 세울 예정이라는 기쁜 소식도 전해줬다.

 한락연의 상해미술전문학교 학적 등기표

2012년은 남경예술학원 건교 100주년이였다. 남경예술학원에서는 저명한 전위(钱为)교수에게 위탁하여 한락연이 입당선서를 하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동 조각상을 제작하여 교내 정원에 세웠다. 남경예술학원 학보인 《미술 및 설계》 2018년 제6호는 〈본 호의 명가 한락연〉이란 표제 아래 한락연과 한락연 작품을 전문 소개하였고 부원장 상용(商勇)교수의 〈민국 초기 미술교육제도의 전파자와 시험사 한락연〉이란 론문도 게재하였다.

남경 종산의 중산릉에는 ‘국부’라 불리우는 신해혁명의 선구자 손중산선생의 유해가 잠들어있다.

중산릉에서 나와 멀지 않은 곳에 명효릉(明孝陵)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명효릉은 남경 종산 남쪽기슭의 독룡부에 위치해있는데 명조의 개국 황제인 주원장과 황후 마씨의 무덤이다. 무덤 공정은 흥무 9년 즉 기원 1376년부터 시작하여 무려 30여년의 시간을 들여 건축하였는데 그 규모가 너무나도 방대하였다. 그 둘레만도 45리 되는데 현존해있는 고대 황제릉 가운데서 제일 큰 릉중의 하나이다. 명효릉은 그 기세가 웅위롭고 모양과 형태가 독특하다고 한다. 특히 아직 발굴하지 않은 지하 무덤은 그 신비한 색채로 하여 더욱더 수많은 해내외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고 있다.

2003년 7월 3일, 유네스코에서는 명효릉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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