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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31]조선족 연극의 전기적 인물 허동활(1)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22 13:45:45 ] 클릭: [ ]

연극인이거나 관객이거나를 막론하고 조선말로 된 연극에 대해 말할라치면 누구나 제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허동활선생이다. 평생 조선족 연극을 위해 자기의 몸과 마음을 불살은 허동활선생, 그는 실로 조선족 연극 분야의 전기적 인물로 되기에 손색이 없다.

1.배우 허동활

 
조선족 연극 분야의 전기적 인물 허동활선생.

지나온 연기 생활에 대해 허동활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60여년간의 연극예술 생애에서 가장 매력적이였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래도 연기 생활이였습니다. 수많은 관객들 앞에서 출연하고 뜨거운 박수로 공감을 얻어낼 때 나는 삶의 가치를 진정으로 느낄 수 있었고 그 하나의 느낌으로도 인생이 충실했다고 자부합니다.”

1925년 3월 6일, 길림성 연길현 조양구 허촌에서 태여난 선생은 조선족들만 오붓이 모여살고 있는 시골마을에서 여느 애들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꿈도 없이 조용히 살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13살에 접어든 1938년 봄에 조선의 류랑극단이 북간도 조양천에 오면서 어린 허동활은 연극을 향한 청운의 꿈을 가지게 되였다. 요란한 분장에 울긋불긋 복장을 차려입고 우습강스러운 동작으로 북을 두드리며 붉고 푸른 기발을 선두로 극단이‘거리돌기'에 나타나자 시골의 고요는 삽시간에 깨지고 산도 들도 마을도 들끓기 시작하였다. 그 날 밤, 로천공연장이 빤히 내려다보이는 초가집 지붕에 울라가 배를 넙죽 깔고 엎드려 걸탐스레 연극을 구경하는 한 사내애가 있었다. 사내애는 돈이 없어서 입장권을 사지 못해 병풍을 두른 극장 주변을 이리저리 헤매다가 초가지붕 우에 올라가서 구경했던 것이다. 그 이튿날 조선말 연극을 구경했다는 죄로 그 사내애는 일본말을 가르치는 선생님한테서 정갱이에 굴뱀이 가도록 회초리 맛을 톡톡히 보았지만 난생처음 연극을 구경한 가슴 뛰는 흥분으로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 사내애가 바로 허동활이였다.

1942년 봄, 선생은 “도꾜에서 낮잠을 자도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것보다 낫다”는 린근 동네 일본 류학생의 충고로 무작정 도꾜 류학을 떠났다. 10대에 벌써 연극에 대한 사무치는 동경과 꿈을 안은 선생은 일본 고학 시절에 배를 곯으면서도 돈을 모아서 3류 극장을 드나들며 영화나 연극을 빼놓지 않고 구경했다. 3년 후인 1945년 강제징병을 피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온 선생은 그 해 여름 8.15 광복을 맞았다. 1946년 음력설을 앞두고 마을 청년들이 모여서 “일본놈들을 다 쫓아버렸으니 이번 설날은 속시원히 한번 잘 놀아봅시다.” 하고 당시 야학(夜學) 선생님인 허동활에게 청을 들었다.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뭘 어떻게 하고 놀지?”

선생의 눈앞에는 대뜸 그 류랑극단의 로천무대가 펼쳐졌고 또 일본 도꾜에서 보았던 연극 장면들도 영화필림처럼 스쳐지나갔다.

“그래 연극! 우리도 연극을 한번 해보자!”

선생은 밤을 패가면서 스스로 극본을 써냈는데 제목은  <해방의 종소리>였다. 그리고 연극에서 주인공 역과 연출을 맡은 것은 물론 손수 무대장치까지 1인3역을 맡아 혼자서 모든 것을 다 하다 싶이 했다. 사실 작품이라야 연극의 기본요소인 극적 갈등 같은 것도 없고 그저 당시 8.15 광복을 맞이한 농민들의 기쁜 감정과 심사를 여러 측면에서 부동한 방식으로 전달한 게 고작이였다. 연출은 그저 어떻게 움직이라는 식의 행동 지시를 해주는 정도였고 무대 장치는 농가에서 모아온 빈 쌀뒤주를 쌓아서 설치하였다. 그리고 앞막은 동네 새각시들이 시집올 때 가져온 앵무새나 학을 수놓은 홰보를 이어서 만들고 배경 세트는 미닫이 문짝에 흰종이를 도배하고 푸른색 물감을 칠해서 산과 들녘을 표현해냈다. 비록 어설프고 초라했지만 그러나 민족해방을 맞은 감동과 기쁨을 그대로 담아낸 소박하고 흙냄새 풍기는 아마츄어 연극이 너무도 재미 있고 감격스러워 농민들은 손바닥이 아프도록 성원의 박수를 보내줬다. 이와 함께 연극인 허동활선생의 연극 인생도 마침내 첫 막을 올리게 된 것이다.

그번 공연이 있은 후 선생이 연극을 잘 논다는 소문이 린근 마을에 자자하게 퍼졌고 1947년에는 마침내 ‘조양구과외문공단’의 연극배우로 뽑히게 되였다. 선생이 흥분되여 연극에 대한 환상에 젖어있을 무렵 소위 뼈대 있고 유서깊은 허씨 가문의 어른들은 연극을‘광대놀이'라느니‘풍각쟁이'라느니 하면서 허동활이 연극배우로 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하였다.

“사내자식이 훈장을 하든지 아니면 관청으로 가든지 할 것이지 저런 천한 광대가 되겠다니…”

할아버지로부터 당장 연극에서 손을 떼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미 연극에‘미쳐버린’선생이 쉽게 물러설 수 없었으니 오히려 말리면 말릴수록 연기에 대한 욕망의 불길이 더더욱 타올랐다. 그는 집안 어른들에게는 좋은 말로 빙빙 둘러대면서 한사코 연극에 몰입하였다. 그 해 선생은 연극  <참군>에서 주인공 역을, <부활>에서는 친일파 지주 역을 맡았는데 제법 어물쩍하게 해내여 그것을 계기로 ‘연변전원공서문공단 연극대(연변연극단의 전신)’에 선발되여 1948년 2월부터는 본격적인 직업배우 생활을 시작하게 되였고 마침내 소망 대로 연극예술을 향한 청운의 꿈을 펼치게 되였다.

 
연극 <춘향전>에서 리몽룡 역을 맡은 허동활.

직업배우로 된 후 선생은 연극  <춘향전>의 리몽룡(김재한 연출, 1956) 역을 창조하여 북경에서 열린 제1회 전국연극콩쿠르에 참가하였는데  <춘향전>이 종합 공연 1등상, 허동활 자신은 우수 연기상을 수상함으로써 행운스럽게도 북경 중앙연극대학에서 연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그곳에서 선생은 구쏘련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연출가 꾸리예브로부터 쓰따니슬랍스끼 사실주의 연극예술리론을 체계적으로 전수받게 되였고 그 체계를 실천하는 중요 경로인 생활 체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머리에 각인시키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사실주의 연기 체계는 선생의 연기 창조에서의 리론적 지침으로, 생활 체험은 연기 창조의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되였다.

북경에서 돌아온 후 연극단에서는  <심청전>을 무대에 올리게 되였다. 주인공 심청의 아버지 심봉사 역을 맡은 선생은 련습에 앞서 소경의 심리 상태와 외적 형상의 특점을 잘 파악하기 위한 생활 체험 현장에 뛰여들었다. 수소문 끝에 선생이 연길시 공원가에 살고 있는 소경 부부를 찾아갔는데 소경 부부는 눈먼 사람의 심리를 알아보려 왔다는 말에 자기들의 아픈 마음에 소금 치러 왔냐며 버럭 화를 내면서 선생을 쫓아냈다. 그러나 체험이 없는 연기 창조는 한낱 흉내에 그칠 뿐이고 자기가 리해하지 못하고 느낌이 없는 연기는 결코 관객들에게 감동으로 다가갈 수 없다는 생각으로 선생은 단념하지 않고 계속 지꿎게 그들을 찾아가서 뜻을 밝히고 사정하였다. 소경 부부를 네번째로 찾았갔을 때 선생의 진정에 감동된 소경 부부는 지팽이가 바로 소경의 눈이고 피부 접촉이 소경으로서는 가장 민감한 자극이며 두 귀는 소경의 가장 소중한 재산이라고 자신들의 심리적 감수를 들려주면서 동작까지 하나하나 보여주었다. 그 후 선생은 소경의 눈과 피부와 귀를 가지기 위해 지팽이를 짚고 출퇴근했고 지팽이에 몸을 실은 채 눈을 감고 집에서 극단까지, 극단에서 집까지의 밤길을 얼마나 더듬었는지 모른다. 점차 그는 지팽이만 있으면 눈을 감고도 자연스럽게 걸을 수 있게 되였고 피부에 대한 아주 작은 자극에도 특별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각을 익혔으며 언제 어디서나 귀에 온 정신을 가다듬는 소경 특유의 외적 형태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번 생활 체험에서 얻은 소중한 심득은 1957년에 시작되여 1980년까지 20여년 사이에 4번 재공연된  <심청전>의 심봉사 역 창조에서 밑거름 노릇을 톡톡히 하였다. 체험에 바탕을 둔 연기, 생활에 뿌리를 둔 예술 창조의 성취감은 선생으로 하여금 사실주의 연기 체계에 깊이 심취되게 하였고 평생의 연기 실천에서 그 길을 고집스레 견지했다.

 
연극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맡은 허동활

“하루 련습하지 않으면 자기가 알고 이틀 련습하지 않으면 연출이 알고 사흘 련습하지 않으면 관객이 안다”는 일본의 한 유명 연극인의 말은 선생의 좌우명이였다. <심청전>에서 심봉사 역을 신통하게 해내기 위하여 여러모로 알심을 들였다면 일본제국주의의 죄행을 공소한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항일영웅 박철의 영용불굴의 강철 의지를 체험하기 위해서 선생은 몇십근 되는 쇠고랑을 발목에 차고 피가 터지도록 걷고 또 걸어보았다. 그런가 하면 전통극 <춘향전>의 리몽룡의 대사를 시를 읊조리듯이 잘 해내기 위해 화술 달인 황철의 《무대화술》을 지침으로 열번, 백번의 련습을 달갑게 자진하였으며 농민운동을 그린 연극 <홍기보>중의 주인공 주로궁이 칼을 휘두르는 동작을 위엄 있게 해내기 위하여 두팔이 퉁퉁 부어나도록 무거운 칼을 매일 수십번씩 휘둘러보았고 해방전쟁을 표현한 연극 <붉은 바위>의 주역 허운봉의 바위같은 사나이 기백을 잘 형상화하기 위해 가물거리는 초불을 지켜보면서 눈기운을 키워내기도 하였다. 하기에 선생이 창조해낸 심봉사 등 형상들은 생동하고 활기찬 산 인간의 모습으로 기나긴 세월이 흘러간 오늘까지도 조선족 관객들의 마음속에 깊이 아로새겨졌고 선생도 차츰 유명 배우의 자리를 굳히게 되였다.

<심청전>을 공연할 때의 일이다(이 작품은 동북3성과 연변에서 500여회의 공연 기록을 올렸음). 흑룡강성의 목단강문화궁은 1,600여명을 수용하는 대극장이였는데 소음이 있으면 연극 대사가 잘 전달되기 어려운 약점이 있었으므로 극장측에서는 무릇 한메터 이하의 아동과 젖먹이 애기를 업은 녀성들의 입장은 사절하였다. 그런데 한 아주머니가 “허동활배우가 연극을 하신다기에 먼곳에서 어렵게 여기까지 왔는데 꼭 들어가게 해주십시오. 우리 집 애기는 절대로 울지 않습니다.” 하면서 기어코 극장에 입장시켜달라고 애걸복걸하였다. 그 때 검표원이“세상에 울지 않는 애기가 어디 있습니까?” 하면서 막무가내로 거절하자 그 아주머니는 울먹거리면서 말했다. “아저씨, 애기가 울가봐서 방금 병원에 찾아가 애기한테 수면제 주사를 놓았습니다. 제발…”

이 광경을 곁에서 지켜보던 극장의 경리는 너무도 감동되여 극장 앞 관객들에게 높이 소리쳤다고 한다. “‘오늘부터 극장 문을 활짝 열어놓을 테니 조선족 관객은 누구나 마음대로 입장하시오. 우리 허동활배우가 연극하는 것을 모두모두 볼 수 있도록!”

 
연극 <장백의 아들>에서 항일영웅 박철 역을 맡다.  

2.연출가 허동활

연출가의 쾌감은 연출로 있어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느껴볼 수 없는 그런 묘한 감동이라고 하면서 허동활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연기 생활이 나에게 흥분에 떨리는 아름찬 행복을 주었다면 연출 생활은 나에게 격정에 불타는 영원한 청춘을 주었습니다. 배우를 인도하여 인간 심령에 깊이 감춰진 신비의 희로애락을 파헤치고 펼쳐보이는 연출가의 작업, 이는 인간의 감성을 일깨우고 정서를 살찌우는 하나의 지름길이 아니겠습니까?”

연극예술에 있어서 연출가는 극본을 재창조하는 제2의 창조자이다. 극본을 누워있는 연극에 비교한다면 극본을 무대에 일으켜세워 숨 쉬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총지휘자가 바로 연출가이다. 연출가는 극본의 기저에 깔려있는 본질을 파헤칠 줄 알아야 하고 배우가 연기력을 발휘하도록 이끌어주고 연극에 관여하는 모든 예술요소들을 조화를 이루게 하는 지휘자의 기능을 수행한다. 바로 이와 같은 연출 사업을 선생은 반세기를 걸쳐 해오셨다.

1958년 반우파운동 시기에 극단의 연출가들이 우파분자 모자를 쓰게 되자 주요 배우로 있었던 선생이 시대의 물결에 떠밀려, 정치적 수요에 따라, 말하자면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는 격으로 연출가의 길을 걷게 되였다. 배우로부터 연출가에로의 변신, 그것은 그의 연극 인생에 있어서 또 하나의 멋진 변신이였으나 그 당시엔 힘겹고 어렵고 걱정스럽기만 하였다. 그러나 워낙 출중한 배우였고 끼와 재능을 다분히 지니고 있던 그로서는 연출가로의 성장의 길에 그리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수많은 인물 형상을 성공적으로 창조한 연기 생활의 튼실한 내공과 풍부한 상상력을 겸비한 튼튼한 기초가 연출가에로의 성장에 비옥한 밑거름이 되였던 것이다.

자격을 갖춘 연출가로, 우수한 연출가로의 변신을 위하여 선생은 1958년부터 배우 리영근과 함께 <뻐꾹새는 또 운다>,  김광출, 리영근과 함께 <청춘의 노래>, 1959년에는 김광출, 박영일과 함께 <장백의 아들>, 1960년에는 김광출, 박영일, 최길춘과 함께 <보통공인을 위하여>, 1961년에는 원주삼과 함께 <홍기보> 등 장막 연극을 차분하게 공동으로 연출하면서 연출 작업의 습작기를 무사히 마쳤다. 그리고 1962년과 1964년에 이르러서는 독립적으로 알바니아 번역극  <어부의 집>과 중국 번역극  <잊어서는 안된다>의 연출을 성공리에 마쳤다.

 

1965년, 조선족 벼육종가 류창은을 모델로 한 장막극 <광활한 천지>가 창작되였다. 처음 독립적으로 창작품 연극 연출을 맡았던 선생은 작품을 련습할 때보다 진실하고 생활적인 화폭을 창조하기 위하여 련습장을 아예 벼육종가이며 전국로력모범인 최죽송이 거주하는 연길 교외의 신풍촌으로 옮겨갔다. 선생은 주역 한성후를 육종가 최죽송의 집에, 반면인물 역을 맡았던 리영근을 마을의 애꾸러기 집에, 말광량이 역을 맡았던 구순자를 마을의 말새단지 녀자 집에 배치하는 등 배우들을 맡은 역과 비슷한 경력이거나 성격을 가진 농민들의 집에 배치하여 그들이 농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눈과 마음에 진정 농민들이 느껴지고 안겨오도록 조건을 지어주었다. 선생의 인도하에 배우들은 맡은 인물의 사상감정을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고 배역과의 유기적 통일을 달성하기 위하여 농민들과 한가마밥을 먹고 한이불을 덮고 잤으며 벅찬 체력로동에도 참가하면서 그들의 희로애락과 감정세계를 깊이 있게 파고들었다. 선생은 또 막마다의 련습을 끝낼 때마다 농민들을 모셔서 그들의 의견을 허심히 청취하여 부단히 작품을 살찌워갔는데 작품이 완성되여 무대에 자신들의 리상이 반영되고 자신들의 생활이 펼쳐지고 자신들의 희로애락이 진실하게 그려지자 농민들은 너무도 감동되여 배우들을 부둥켜안고‘우리네 극단'이라고 치하하면서 환호하였다.

이렇게 선생은 공동 연출로부터 번역극을, 나중에는 창작극을 독립적으로 연출해냄으로써 연출가로서의 위상을 지키고 멋진 변신을 이루어냈다. 성공적인 1965년을 보내고 선생이 바야흐로 직업연출가로서의 창조적 열망에 부풀어있을 즈음 십년 대동란이 선생의 꿈과 재능과 실천의 현장을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1972년 뒤늦게나마 연극단에 다시 돌아온 선생은 창조와 탐구에 다시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시련과 절망을 딛고 일어선 선생은 더욱 왕성한 정력과 창조적 열정으로 연출 작업에 달라붙으면서 자신만의 뚜렷한 개성으로 연극 연출을 시도하였다.

선생은 제2창작자로서의 연출가는 작가의 사상관념과 예술 주장을 간단한 방법으로 무대에 옮겨놓는 복제자가 아니라 엄연한 창작개체라고 주장하면서 생활에 대한 자기의 주관적 감수와 독특한 리해를 무대 작품에 표현시키려는 강렬한 의욕을 가지고 그 기점에서 극본을 분석하였다. 지어는 자기의 가치관과 심미관으로 생활에 대한 극작가의 의도를 반추하면서 자기의 예술관과 자기가 추구하는 형식에 좇아 자기의 개성에 따라 무대를 꾸미려 고심하였다. 연출 창조에서 선생은 인물들간의 외적 관계와 외부행동 묘사보다도 인물의 내심세계와 잠재의식을 파내는 데 알심을 들였고 또 극본에 제시되였지만 본질적이 아닌 장면이거나 외부 표현에 너무 집착한 장절은 될 수 있는 한 줄이면서 예술의 생명은 진실성이란 점을 특히 강조하였다.

사실 무대 우에 펼쳐진 것은 모두 허구인데 어떻게 관객들로 하여금 가정적인 무대의 예술적 진실을 거부감이 없이 진실로 받아들이게 하겠는가? 여기에 바로 생활의 진실을 예술의 진실로 승화시키는 연출가의 수완과 생명력이 과시되여있는 것이다. 진실성은 연출가들마다 일생을 두고 추구하는 예술적 리상이고 목표이다. 선생은 바로 그 진실 추구에 집착해온 합격된 연출가이다. 진실성에 대한 추구는 그의 모든 연출 작품을 통하여 너무도 뚜렷이 나타나는데 특히 인물형상 창조에서의 진실성에 대한 추구, 무대 표현에서 생활적 진실을 예술적 진실로 승화시키는 심층적인 연구와 실천 성취는 선생의 연출 작품의 구석구석에 슴배여있었다.

 
허동활선생이 연출을 맡은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

1980년 장막극  <눈 속에 핀 꽃>의 연출 실천을 통하여 선생은 생활의 진실을 예술적 진실로 승화시키는 비범한 재질을 보여주었으며 예술적 진실에 대한 자신의 미학적 리상을 남김없이 체현하였다.

<눈 속에 핀 꽃>은 십년 대동란이라는 특정 년대를 배경으로 출신이 나쁜 두 청년남녀의 사랑을 그린 작품이다. 계급투쟁으로 살벌한 년대에 벌어지는 두 조선족 청년남녀의 절절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진실한 생활의 화폭으로 보여지면서도 예술적 진실로 승화된 아름다운 사랑에 대한 독특한 표현 방식은 없을가? 선생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조선족 인물형상에 민족적인 특성을 부여하는 데 알심을 들였다.

무대 중앙에 아름드리 홰나무 한그루가 서있다. 달은 검은 구름 속에 가리워지고 저 멀리 이름없는 작은 별마저 지친듯 천천히 껌뻑인다. 검고도 두텁고 꺼칠꺼칠한 껍질을 두른 늙은 홰나무는 자기 앞에 나란히 선 사랑하는 두 청춘남녀의 아픈 마음을 헤아리는듯 가끔씩 그 무성한 나무잎을 가볍게 설레인다. 두 청춘남녀가 애틋한 눈길로 서로를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머리를 떨어뜨리고 천천히 아름드리 나무 뒤에 몸을 숨긴다. 잠시 시간적 여백을 두다가 나무 뒤로부터 두손만을 살며시 내미는 두 련인, 두손은 서로를 향하여 조금씩 조금씩 다가간다. 손끝과 손끝이 서로 부딪치고 손과 손이 서로를 꼭 마주잡을 때, 바로 이 때 무대가 급히 암전되는 동시에 아름드리 나무에 붉은 조명이 불기둥처럼 비쳐진다. 그리고 그 화면을 안받침하여 아름답고도 구슬픈 음악이 흐른다…실로 연극의 한 장면이라 하기엔 너무나도 진실한 생활화폭이였고 생활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예술화한 아름다운 화면이였다. 열렬하면서도 은밀한 청춘남녀의 사랑의 표달 방식, 온유하고 함축된 표현 형태, 바로 거기에 우리 민족의 정서가 안받침되여있었기에 더욱 관중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고 관중들의 열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당시 나는 관중의 한명으로 극장에서 이 장면을 감상하면서 선생의 멋진 예술 처리에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내 곁에서 함께 이 연극을 관람한 중국의 한 저명한 연극예술가는 연신 치하의 말씀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멋집니다. 허동활연출은 참 대단합니다.”

 
배우들에게 인물형상 창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허동활 연출가. 

선생의 연출 예술의 진실성 탐구는 연극에 관여하는 모든 기타 예술의 세부의 진실 창조에서도 나타났다. 선생은 무대의 작은 거짓이 큰 진실을 파괴할 수 있다면서 배우의 매 하나의 대사 창조로부터 의상, 분장, 음향, 소도구 배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분야에 눈길을 돌리고 신경을 도사려왔다. 생활의 숨결이 배여있는 연극, 산 인간이 숨쉬는 연극을 만드는 것은 허동활의 연출적 지향이였기에 예술의 생활적 미에 대한 추구는 선생의 전반 연출 생애에 관통되였다. 이 또한 선생의 연출 예술의 한가지 중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일생을 거쳐 연출해낸  <백산의 봄우뢰>(1973. 4),  <두견산>(1974. 1),  <위호산을 지혜롭게 탈취>(1975. 4),  <만수천산>(1976. 1),  <청산은 여전히 푸르다>(1977. 10),  <장백의 아들>(1978. 5),  <고요한 야밤>(1981. 3),  <심청전>(1984. 9),  <눈 속에 핀 꽃>(1980. 12),  <산귀신>(1982. 3),  <잘 가거라 꽃사슴아>(1984. 9),  <우리 학교 철남이>(1985. 4),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1986. 3) 등 연극과  《민들레꽃》,  《낳은 정 키운 정》, 《그녀의 길》 등 여러 부의 텔레비죤드라마에는 선생의 연출 리상이 숨쉬고 있고 연출 리상의 실현을 위해 흘린 땀이 슴배여있으며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낸 희열이 꿈틀거린다.

멋진 작품을 연출해내고 훌륭한 배우를 키우는외에 연출가에게 또 무슨 소망이 있을가. 선생은 평생 그 소망 하나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다 바쳐왔다.

/글 방미선 /편집 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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