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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6)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3-08 20:31:56 ] 클릭: [ ]

오늘의 훈춘시 장고봉전투 유적지

▧김동수

5. 장고봉을 넘나들다

1917년 10월혁명 이후 조선의 많은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쏘련 원동지구에 모여들어 여러가지 단체들을 조직하고 조선 독립을 위한 여러가지 혁명활동을 전개하였다. 1918년 6월, 조선 조기공산주의자인 리동휘는 백력(伯力)지방에서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1919년 3월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서 한인사회당 대표대회를 개최하였다. 1919년 9월에는 김철훈을 핵심으로 한인공산당도 세워졌다. 두 당 사이에는 많은 분기와 예리한 모순들이 존재하였다.

《할빈혁명유적지사화》는 “1919년 가을 한락연은 쏘련으로 가서 쏘베트 새 정권을 지원하는 활동에 참가하였다.”고 기재하였다.

집을 박차고 나간 한락연의 목적지는 바로 10월혁명의 승리로 들끓던 쏘련이였다. 그는 사회주의자들로 구성된 진보적인 단체에 참가하여 맑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민족의 철저한 해방은 맑스―레닌주의 리론의 지도하에서만이 승리할 수 있다는 도리를 깨닫게 되였다.

1920년대 동북 군벌당국은 훈춘에 해관을 세우고 장령자출입구와 중로 변경선에 변방군을 투입시키고 로씨야와의 래왕을 업격히 통제했다고 한다. 로씨야로 밀입국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두만강변에 있는 장고봉기슭 변경 지역이였다. 연변 지역과 조선의 보따리 장사군들은 이곳을 통하여 로씨야로 드나들었다.

현재50―60대 이상 되는 사람들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겠지만 개혁개방초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훈춘에 친척방문이나 일 보러 가려 해도 별도로 통행증을 발급받아야만 갈 수 있었다.

한락연이 쓴 〈장고봉의 과거와 현재〉에 장고봉의 상세한 지형도가 그려져 있다.

한락연은 훈춘 장령자의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는 중국해관을 에돌아 양관평 부근의 장고봉을 넘어 쏘련 경내로 넘나들었다.

여기서 굳이 넘나들었다는 표현을 쓴 것은 한락연이 이곳을 단 한번만 지나는 데 그치지 않았다고 사료되기 때문이다. 1938년 무한에서 한락연은 《반공》이라는 잡지(제3권 제2기)에 〈장고봉의 과거와 현재〉라는 문장과 함께 자기가 직접 그린 장고봉 지역의 상세한 지도까지 첨부하였다.

아래는 그 원문 일부이다.

“무치한 일본 파쑈 군벌은 쏘련 령토를 침범하는 것을 그들의 일관한 침략정책으로 시도하였다.

장고봉은 중국, 쏘련, 조선 세 나라 변경에 위치한 산봉우리이다.(그림을 참조) 그 높이가 이삼백메터에 달하는데 산 우에는 나무가 없고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원래 동녕으로부터 두만강 어구까지 중쏘 국경은 대부분 산으로 국경이 이루어져있었다. 동녕부터 장령자 일대는 모두 매우 높은 산들이고 장령자 이남부터 두만강 어구까지는 기복을 이룬 비교적 낮은 산맥들이 끊임없이 이어져있었다. 장고봉은 그 중간의 제일 높은 봉우리인데 서쪽켠에 하쌍호의 8개 큰 늪이 웅크리고 있었다. 필자가 민국 9년에 이곳에 다시 왔을 때 훈춘과 장령자 사이에 우리 나라 세관이 있었다. 무릇 변경을 통과하면서 장사를 하는 불법 밀수군과 비자가 없는 려행객들은 60―70리 길을 에돌아 양관평을 지나 장고봉을 넘어 다녔다. 그 때 변경에 있던 일본군은 서쪽에서 철거하여 산꼭대기로부터 산아래까지 40여개의 보초망을 세우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 북부의 군사적 교통을 유지하고 조선혁명당인들이 군사무기를 밀입하는 것을 방지하고 홍군 유격대의 기습을 방지하는 데 매우 유리하였다. 당시 중국 국경에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중국 국경에 침입하여 방어를 설치하였는데 이 역시 ‘씨비리 교훈’이 남겨놓은 흔적이였다. 필자는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하였다.

장고봉의 지형을 군사적 관점에서 말하면 장고봉은 일본 파쑈 군벌들이 꿈속에서도 차지하고 싶어하는 군사요새지이다. 장고봉을 얻게 되면 모구위를 수시로 점령할 수 있고 울라지보스또크의 보조항을 직접 위협 공제 할 수 있어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해군과 배합하여 울라지보스또크를 빼앗아 쏘련으로 하여금 원동의 해군과 공군의 기지를 보존할 수 없게 할 수 있다. 다른 면으로 보면 장고봉의 고도에서 능히 조선 경내의 웅기항구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만약 계속 쏘련의 수중에 장악될 경우 대포의 위력으로도 능히 두만강변의 일본 군사 교통선을 위협할 수 있기에 웅기항구의 일본 해군이 출항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라진 요새도 벽막이 작용을 잃게 된다. 때문에 무치한 일본군은 처음에는 이 전략적 요충지를 강점하려다가 쏘련이 그의 돼지 코를 충격한 후에는 중립 구역을 설치하고 완충 지대를 만들려고 생각하였다.”

장고봉 표지석

장고봉 지역에 대한 너무나도 상세하고 투철한 분석이다. 게다가 그림에 조예가 있는 한락연이 자기가 그린 지도까지 첨부한 사실은 상세한 사전 조사와 탐사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락연은 이 문장에서 “민국 9년에 필자가 다시 이곳에 왔다”고 썼는데 민국 9년이면 곧 1920년이다.

1920년에 다시 왔으니 그전에 왔다갔다는 얘기가 되는데 필자는 그전이 바로 1919년 ‘3.13’ 이후 검거를 피해 처음으로 장고봉을 넘어 쏘련으로 갔을 때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제4권 《결전》중의 〈인민의 예술가 한락연〉이라는 문장에서 작자인 고 최룡수교수는 “1920년 음력 정월초에 룡정촌에 돌아온 한락연은 백부님께 세배하러 간다는 핑게를 대고 집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 이렇게 고향을 떠난 한락연은 다시는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고 서술하였다.

현재 중조로 삼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금삼각 지역인 훈춘은 새로운 시기를 맞아 새로운 도약과 함께 힘찬 기지개를 켜면서 출렁이는 두만강 물결과 더불어서 전례없이 들끓고 있다. 장고봉기슭에도 장고봉전투기념관이 생겨나 만방의 벗들을 부르는데 그 속에는 우리의 주인공 한락연도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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