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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공산당100년](23)중국공산당 력사에서의 5차례 통일전선

편집/기자: [ 김가혜 ] 원고래원: [ 共产党员 ] 발표시간: [ 2021-02-02 15:03:02 ] 클릭: [ ]

중국공산당은 1921년에 창건되여서부터 지금까지 총 5차례의 통일전선을 겪었다. 당이 중국인민을 령도하여 신민주주의혁명과 사회주의건설을 진행하는 과정 중에 형성, 발전 및 장대해진 통일전선은 부동한 력사 시기에 부동한 임무, 내용과 특징을 가지고 있다.

국민혁명련합전선

1922년 7월, 2차 당대회에서는 《민주적인 련합전선’에 관한 의결안》을 내왔으며 통일전선의 방침을 초보적으로 제기했다. 1923년 6월에 3차 당대회를 열고 중국공산당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조건하에 공산당원이 개인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용함으로써 중국공산당과 손중산이 령도하는 중국국민당의 합작을 실현하기로 결정했다. 리대소, 모택동, 구추백 등 동지가 개인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했으며 모택동은 또 국민당 중앙선전부장을 대리했다. 이 기초 우에 국민혁명의 련합전선이 형성되였다.

1924년 1월, 손중산은 광주에서 공산당원이 참석하고 지도사업에 참여한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주관, 소집하였다. 대회는 중국공산당이 제기한 반제반봉건 주장을 접수하며 쏘련과의 련합, 공산당과의 련합, 농민과 로동자를 돕는 3대혁명 정책을 견지하고 삼민주의 즉 신삼민주의를 새롭게 해석한다고 선언했다. 신삼민주의의 정치적 주장은 민주혁명 단계에 있어서의 중국공산당 정치강령의 약간의 기본원칙과 일치하며 따라서 제1차 국공합작의 정치적 기초가 되였다. 이는 또 국공합작을 기초로 한 혁명통일전선의 공동강령이다.

국민당 1차 대표대회는 또 공산당원이 개인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으로 량당합작의 원칙을 실현하는 것을 확정하였으며 공산당원이 참가한 당중앙지도기구를 선거해 내왔다. 그리하여 국민당을 대체적으로 자산계급과 도시소자산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으로부터 로동자, 농민, 도시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을 포함한 정치련맹으로 개편했다. 개편 이후의 국민당은 그 자체가 혁명통일전선의 조직형식이 되였다. 혁명련합통일전선의 형성은 중국혁명의 발걸음을 크게 추동하였으며 따라서 1926년에 시작된 북벌전쟁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게 했다.

공농민주통일전선

1927년, 국민당우파집단이 혁명을 배반하고 공산당원과 공농혁명군중을 대거 학살함으로 인해 중국혁명은 잠시 저조기에 처했다. 또한 민족자산계급이 잠간 반혁명분자를 추종하면서 혁명통일전선 진영 중 원유의 4개 계급은 로동자, 농민과 도시소자산계급만 남았다. 그들은 봉건압박과 국민당 신군벌통치를 반대하는 것을 목표로 공농민주통일전선을 결성했다.

1931년 11월,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쏘베트중화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강서 서금에서 소집되였으며 중화쏘베트림시중앙정부를 설립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령도 아래 로동자, 농민, 도시소자산계급이 참가한, 통일전선의 성격을 띤 혁명정권조직이다.

모택동을 대표로 한 중국공산당은 농민문제의 중요성을 진정으로 인식하게 되였다. 동시에 농민문제에 관한 일련의 정확한 관점을 토지혁명의 위대한 실천에 적용하였으며 이때로부터 중국혁명통일전선을 견고한 공농련맹의 기초 우에 건립하기 시작했다.

항일민족통일전선

1931년 9 • 18 사변' 이후 중일 민족모순이 주요모순으로 급부상했다. 이에 따라 중국 국내의 계급관계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1935년 12월, 중공중앙은 와요보에서 정치국 확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통과한 결의와 회의 후에 모택동이 한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라는 보고는 중국공산당의 항일민족통일전선에 관한 정책을 체계적으로 론술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공중앙도 항일을 하고 장개석을 반대하는 방침을 ‘장개석을 핍박하여 항일하게 하’는 방침으로 전환했다.

1936년 하반년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홍군과 국민당의 동북군, 17로군은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항일하는 기초 우에 서북지구의 통일전선을 먼저 형성했다. 결국 서안사변을 야기하고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며 따라서 내전에서 평화를, 공농민주통일전선에서 항일민족통일전선에로의 전환을 실현했다.

1937년 ‘7.7’사변 후 항일전쟁이 전면 폭발했다. 9월 22일, 국민당 중앙통신사가 발표한 《중국공산당이 국공합작 공포를 위한 선언(中国共产党为公布国共合作宣言) 》과 장개석이 발표한 중국공산당의 합법적 지위를 승인할 데 관한 것을 표징으로 국공 제2차 합작의 항일민족통일전선이 정식으로 형성되였다. 항일전쟁의 진전에 따라 국공 량당의 합작을 기초로 한 항일민족통일전선이 부단히 발전, 장대해졌으며 항일전쟁의 최후승리를 위해 견고한 정치적 토대를 마련했다.

인민민주통일전선

1945년 8월, 항일전쟁이 승리한 이후 전국인민은 평화, 민주, 단결의 방식으로 국가를 건설하고, 량당합작을 계속 견지하며, 기타 민주당파와 모든 애국 력량을 단결하여 새중국 건설을 위해 함께 분투하기를 열렬히 희망했다. 그러나 력사의 발전은 사람의 의지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였다. 국민당통치집단은 전국인민의 념원을 위배한 채 독재의 반동립장을 견지하면서 미제국주의 지지하에 꺼리낌없이 반혁명내전을 발동하였다.

장개석의 반동정권을 뒤엎고 신민주주의 새 중국을 창건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은 로동자, 농민, 도시소자산계급, 민족자산계급, 각 민주당파, 개명신사, 기타 애국분자, 소수민족 동포, 해외교포를 포함한 광범한 인민민주통일전선을 령도하고 건립했다. 인민민주통일전선의 건립은 장개석 국민당 반동정권을 뒤엎는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동시에 인민민주통일전선은 또 우리당이 적을 타승하는 3대 보배 중 하나로 되였다.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였다. 이후 중국공산당은 계속하여 인민민주통일전선의 길을 걸었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인민민주통일전선의 새로운 조직형식이다. 비록 사회주의 기본제도가 확립된 후 우리 나라 통일전선의 내용과 성격, 임무 등이 중대한 변화를 맞았지만 통일전선은 의연히 우리 나라 사회주의 시기의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는 중요한 보배이며 그것은 사회 각 계층의 모든 적극적인 요소를 동원함과 아울러 단결할 수 있는 모든 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위해 가늠할 수 없는 중대한 역할을 발휘했다.

1956년 4월, 모택동은 《10대 관계에 대하여(论十大关系)》에서 중국공산당과 각 민주당파는 ‘장기 공존, 상호 감독'의 방침을 실행한다고 정식으로 제기하였는데 인민민주통일전선이 새로운 력사 단계로 발전했음을 상징한다.

애국통일전선

중국공산당 11기 3중전회 이후 당의 통일전선이 다시 락실되면서 새로운 시기의 애국통일전선의 임무를 명확히 했다. 12차 당대회에서는 중국공산당과 민주당파의 "장기 공존, 상호 감독, 속마음 털어놓으며(肝胆相照), 영욕을 함께 하자"는 방침을 진일보로 제기했다. 이는 중국공산당과 각 민주당파간의 관계를 더욱 밀접히 하였으며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다당합작의 정치협상제도를 가일층 완벽히 하였다.

신시대에 들어선 후 애국통일전선은 새로운 력사적 내포를 부여받았다. 그 범위는 전체 사회주의 로동자, 사회주의사업의 건설자, 사회주의를 옹호하는 애국자, 조국통일을 옹호하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해 힘쓰는 애국자로 확대되였다. 애국통일전선을 공고, 발전시키는 것은 중화의 아들딸들을 광범위하게 단합시켜 초요사회 전면 실현의 결정적 승리를 이룩하고 사회주의현대화국가를 전면적으로 건설하는 새로운 로정을 여는 위대한 실천에 뛰여들게 하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중국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거대한 힘을 결집시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기사출처: 共产党员

편역: 김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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