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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4)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1-02-01 15:50:26 ] 클릭: [ ]

[대형련재]한락연의 발자취 따라(4)

○ 김 동 수

‘3.13’에서 날개를

1919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1919년 3월 1일 조선반도에서 ‘3.1’운동이 노도와 같이 폭발하였고 뒤이어 중국땅 룡정에서 ‘3.13’반일시위가 봄우뢰와 같이 울려퍼졌으며 북경에서는 ‘5.4’운동이 폭풍우처럼 거세차게 일어났다.

그런데 한가지 언급하면 많은 사람들 특히 중국인들이 조 선에서 일어난 ‘3.1’ 만세운동과 룡정에서 일어난 ‘3.13’반일시위를 혼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중국땅 룡정에서 일제의 침략과 략탈에 반항하여 일어났으며 19명이 희생된 전대미문의 류혈사건이지만 사건에 대한 선전 등으로 룡정 혹은 연변이라는 작은 지역적인 울타리에만 국한되여있는 점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다.

조선 ‘3.1’운동의 직접적인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다. 1907년 일제는 자기들의 통치에 굴하지 않는 고종 리희(李熙)를 페위시키고 아들 리척을 왕으로 봉하였다. 그것도 성차지 않아 1919년 1월 21일 밤, 일제는 리희를 독살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광범한 민중들은 3월 1일, 성세호대한 반일운동을 전개하였는데 력사에서 이를 ‘조선 3.1기의’ 혹은 ‘3.1’운동 이라고 부른다.

‘3.1’운동은 조선에서 일어난 전민 반제애국운동으로서 동방 식민지 반식민지 각국 인민들의 반제투쟁을 크게 고무하였다. ‘3,1’운동은 조선민족독립투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질 뿐만 아니라 국제 특히는 아시아주에서 광범한 영향을 끼치였다고 한다.

한락연의 자화상

1919년 3월 13일, 성세호대한 반일 대시위가 일제의 간도일본총령사관이 둥지를 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간도지역의 경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룡정에서 일어났다.

룡정 ‘3.13’반일시위의 준비과정, 경과, 성격, 기념사업 등에 대하여 많은 책자들에서 언급하였기에 략하고 김정규(金鼎奎)가 쓴 야사의 한토막에서 그 날의 감격적인 장면을 찾아볼 수 있다. “갑자일이라 표풍(飘风)이 불어닥치고 진운(陈云)이 취산한다. 이날은 즉 조선민족이 룡정에 모여 독립을 부르는 날이다. 나는 상(丧)중이므로 감히 갈 수 없어 아들 기봉에게 태극기 하나를 보냈다. 이날, 과연 옛것이 광복되는 날이다. 사람마다 이렇게도 화색(和色)이 짙은가. 저녁 때 들으니 사방에서 인사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정오 종소리에 맞추어 룡정 부근(서전대야)에서 사람마다 태극기를 들고 ‘조선 만세’를 불렀다. 기발은 해를 가리고 함성이 진뢰와 같았다. 이를 본 왜인의 얼굴색은 재빛으로 변했다.”

1920년 1월 1일, 《독립신문》은 그 날에 있은 일을 아래와 같이 생동히 기재하였다. “3월 13일, 보통학교 왜놈 교장이 반일군중대회를 거행한다는 소식을 탐지하고 전교 학생을 교실안에 가두어놓고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그러나 하늘땅을 울리는 ‘조선독립 만세’의 구호소리를 듣자 마자 학생들은 마치 약속이나 한듯 팔을 휘두르며 ‘만세’를 웨치면서 유리창문을 부수고 뛰쳐나와 거리에 달려가 시위행렬에 참가하였다. 이 광경을 본 왜놈 교장은 저도 모르게 ‘10년 교육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되였구나’라고 탄식하였다.”

이 학교가 바로 한락연이 졸업한 학교였다.

당시 해관에서 일하던 21세의 열혈청년 한락연이 봄우뢰와도 같은 이 민족적인 대시위에서 빠질 수가 없었다.

한락연의 첫 부인 최신애의 조카 최순희씨는 〈고모부 한락연이 룡정에 있던 나날들〉이라는 문장에서 이렇게 썼다. “나의 고모부 한락연은 영국해관 세무사의 자전거를 빌려 타고 몇필의 흰 광목을 사다가 영조계지 세무사집에서 밤새 대량의 태극기를 만들었다. 그 태극기를 여러 학교에 나누어주어 반일시위 때 사용케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도 태극기를 들고 반일시위에 참가하였다.”

한락연의 맏딸 한인숙도 당시 상황을 아래와 같이 회억하였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태여나는 해에 ‘3.1’운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어머니는 나 보고 이는 큰 대사로서 피비린내 나던 그 날을 절대 잊지 말고 왜놈들이 조선백성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다년간 룡정 ‘3,13’기념사업회 회장을 맡고 반일의사들의 유해발굴과 묘역성역화, 순난자들의 추모식, 룡정력사유적지 발굴 등 굵직굵직하고 의의 깊은 사업들을 꾸준히 추진하여 온 고 최근갑옹은 〈시련의 열매〉란 회억록에서 “이날 대회와 시위 때 사용한 프랑카트에 글을 쓰고 태극기를 그린 사람이 바로 룡정 토성포 태생인 그림 잘 그리기로 소문 난 한락연이였다. 이날 운동 후 일경들이 한락연을 체포하려고 날뛰자 그는 로령을 거쳐 상해로 들어가 독립운동과 중국혁명에 참가했다.”고 서술하였다.

 
한건행,한건립과 함께

나라를 잃은 민중들의 비분에 찬 함성과 일제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면서 한락연은 서전서숙에서 받았던 반일교육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헌신하려는 굳은 결의를 다지게 되였다.

‘3.13’운동이 일어난 후 룡정에서 또 한차례의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룡정에 자리를 틀고 있던 일본총령사관에서는 매일 아침 일장기게양식을 했다고 한다. 어느 하루 기를 올리고 허리를 굽혀 일장기에 경례를 하는데 펄럭이며 나붓기는 기발은 일장기인 것이 아니라 태극기였다고 한다. 놈들은 아연실색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고 한다. 최순희씨는 “이러한 사건은 우리 고모부가 직접 참여하였거나 획책한 것이다.”라고 회억하였다.

일제의 검거와 수색, 체포가 심해졌다. 요시찰 인물로 점 찍어진 한락연은 중국인 복색을 하고 급급히 룡정을 떠났다.

강보에 쌓여 태여난 지 다섯달 밖에 안되는 딸 인숙이와 사랑하는 안해를 두고 언제 만날지 기약없는 방황과 고난의 먼길―생사리별과 지어는 생명도 불 살라야 하는 가시밭길로 떠나는 한락연은 차마 실말을 못하고 문을 박찼다.

언제나 정다운 고향의 산야는 바야흐로 가을빛이 물들기 시작했지만 눈물에 가려 물속에 잠긴듯이 아리숭했다.

그렇게 한락연은 서북의 황량한 모래밭에 묻힐 때까지 다시는 태를 묻은 고향 룡정땅을 밟아보지 못했고 정 깊고 한많은 흰옷 입은 사람들의 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오지에서 까난 한마리 이름없는 새가 아직은 여린 날개로 비범한 용기와 무한한 꿈을 안고 둥지를 떠나 세상을 날기 시작했다.

스스로 억센 날개를 련마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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