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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골초원 한재수선생의 항일투쟁의 발자취를 찾아서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1-11 10:22:11 ] 클릭: [ ]

한재수(韓在秀)선생은 청주 한씨 31세손으로 조부는 한영수(韓永守)이고 조모는 김원례이다. 이들은 슬하에 아들 한경필과 한룡필을 두었는데 한경필의 둘째아들인 한재수(한일수)는 1903년 6월 16일, 경상북도 영천군 대의동에서 출생하였다.

한재수선생

1919년 ‘3.1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일본총독부는 ‘동아공영권’이라는 그럴듯한 구실로 만주(중국 동북)를 침략할 야욕에 차 조선반도를 침략의 근거지로 만들었다.

1931년 9.18사변이 발발했다. 그러나 장학량이 침략전쟁에 제대로 맞서보지도 못한 채 만주를 내여주면서 백성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한재수선생은 부인 박선월과의 사이에 8남매를 두었다. 유자천금 불여일권서(遺子千金,不如一卷書)라고 째지게 가난했던 한재수선생이였지만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여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자식 교육에 투자했다. 그 보람으로 자식들은 거의다 고중 이상 졸업생이며 이중 셋째아들 희락은 의과대학 법학과를 나오고 넷째아들 희조는 길림공업대학 림업학과를 나온 대학생이다.

력사학자 야콤 부르크하르트는 “력사란 한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일들을 ‘기록’하는 것”이라고 했다. ‘기록’은 자의에 의한 것도 있고 타의에 의한 것도 있다. 한재수선생을 보면 자신의 삶에 관한 자필 ‘기록’은 없으나 구술 ‘기록’은 자식들에게 많이 남겼다. 그러나 구술 ‘기록’을 글로 남기지 못한 탓에 자의에 의한 ‘기록’은 없는 셈이다.

당장 먹고 살기도 팍팍한 살림형편이라 한재수선생은 11세가 되여서야 영천군 대의동에 있는 당지 소학교를 다녔다. 그것도 13세까지 다니고는 부득불 학업을 중퇴하고 26세까지 농사를 짓지 않으면 안되였다.

일본침략자들이 농가를 략탈하고 잔혹하게 농민을 착취하면서 허리띠를 졸라매도 살아갈 길이 막막하게 되자 한재수선생은 26세 되던 해인 1929년 10월에 고향을 등지고 내몽골자치구 흥안맹 과우전기로 와서 품팔이와 잡일을 하다가 왕예묘(현 울란호트시)에 거주하게 된다.

 
한재수선생 가족사진

소학교를 2년 밖에 못 다닌 그였지만 남다른 노력으로 글재주가 좋고 아는 것이 많아 조선민족들 사이에서 위망이 높았다. 그 때 왕예묘는 당지의 정치, 경제 활동 중심이였고 위만주국이 설립되면서 흥안총성과 과우전기 정부 소재지였다. 1933년에 이미 조선민족이 왕예묘에 거주했는데 1935년에는 왕예묘에 조선민족이 116가구에 501명이나 거주했다.

한재수선생은 이민 온 조선민족 자녀들의 교육에 중시를 돌리고 여러 면의 노력을 들여 자금을 비축해 조선민족학교―동광보통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32년 29세 젊은 나이에 한재수선생은 왕예묘 조선민족들의 선출로 조선인민회 회장과 동광보통소학교 교감으로 되였다. 당시 방범룡을 교장으로 초빙하고 교원은 안봉생(항일의사 안중근은 안봉생의 5촌 당숙임) 등 3명이였다. 동광보통소학교는 1937년에 학교 청사와 숙소를 지었는데 이 때 학생수는 120명에 달했으며 6명의 교원이 있었다.

한재수선생은 동광보통소학교 교감과 조선인민회 회장으로 있는 동안 안봉생선생과 함께 조선민족들을 단합해 학교에서 비밀리에 반일투쟁 도리를 선전하고 일제의 죄행을 폭로하였다. 학교에서 조선말을 못하게 하고 조선어와 조선력사를 가르치지 못하게 하자 학생들을 조직해 이를 반대해 나섰으며 일제의 황민화와 노예화 교육을 반대하였다.

후에 일본 경찰들이 안봉생을 체포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한 한재수선생은 안봉생에게 신속히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덕에 안봉생은 비밀리에 남으로 피신하여 큰 재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안봉생은 화남으로 가서 비밀리에 《전진(前進)》, 《화남통신(華南通訊)》 등 항일간행물을 부쳐왔다. 한재수선생은 이런 간행물을 받은 후 동광보통소학교 교원과 학생 그리고 당지 조선민족들에게 항일투쟁의 도리와 항일활동에 대해 적극 선전하였다.

이 같이 반일 비밀 활동을 벌려나가던 차에 일제 주구의 밀고로 인해 한재수선생과 방범룡 교장은 일본 경찰에 잡혀갔으며 일본경찰서에서 40일 넘게 구류당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당시 많은 조선민족들이 경찰서를 찾아 그들을 무죄석방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일본 경찰은 5명 조선민족의 담보가 있어야 석방할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이렇게 한재수선생의 조선인민회 회장과 교감 직이 정지되였다. 석방된 후 한재수선생은 일본 경찰과 그 앞잡이들의 감시를 받으며 어려운 나날을 보내야 했다.

소하 10년(1935년) 4월 5일, 정가툰(현 조남시) 주재 령사 류야마야스지로(瀧山靖次郞)가 만주국 주재 특명전권대사 미나미지로(南次郞)에게 보낸 3월 30일부 기밀 제157호 보고 자료에 근거하면 한재수선생은 음독 자살(미수)로 일본 경찰과 맞서 싸웠다고 한다. 분노한 조선민족들은 일제의 감시와 정치적인 압박을 피하고 생활 개선을 위해 1935년 봄 왕예묘에서 20여키로메터 떨어진 조을하 중류의 몽골족 목민들이 사는 곳으로 이주, 험난한 협상 과정을 거쳐 새롭게 조선민족 수전농장을 건설하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 때 농장인들은 또 한재수선생을 농장 농무계약장으로 선거하였다. 그 후 조을하 서안 뽀다리간에 150여세대의 산거 농민을 집결시켜 큰 촌을 만들고 논을 개발하였는데 1945년에 이르러 뽀다리간농장은 204세대에 논 면적이 거의 만무에 달했다.

농장을 경영해 2년여 만에 농장의 생산경영이 궤도에 올라섰을 때 일본 경찰의 간섭으로 친일분자가 농장의 령도권을 탈취하면서 한재수선생은 농장 령도직에서 물러나게 되였다.

이와 같이 일제의 감시와 통제로 자유를 박탈당한 환경에서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한재수선생은 집에서 농사를 짓다가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투항을 맞게 된다. 1947년 내몽골자치구가 설립되면서 당시 계급투쟁의 론리에 따라 한재수선생은 중농으로 락인된다. 비록 중농은 단결대상이라 하나 그 시대의 특성상 그의 사적은 알려지지 않았다가 1964년 농촌 ‘4청’ 운동과 10년 ‘문화대혁명’을 치르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4년 한재수선생은 흥안맹 우란하다인민공사 고성대대로 이사를 간 후 농사를 지으며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1981년 3월 3일 고성촌에서 별세했다.

한희찬씨가 부친 한재수선생의 묘소에서

저자도 내몽골 울란호트시 뽀다리간에서 출생했으며 어려서부터 한재수선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재수선생은 말수가 적고 심성이 무던하며 남을 도와주기를 좋아하고 원칙이 있으며 아는 것이 많은, 그 당시 조선민족중에서 위망 높은 유식자였다. 한재수선생의 막내아들 한희찬은 저자와 초중, 고중 동창이였는데 아버지의 항일투쟁 사적을 발굴하기 위해 근 8년 동안 울란호트시서류관, 과우전기서류관, 정가툰서류관(지금의 조남시, 일제시대 일본령사관이 있던 곳), 장춘시서류관, 대련시서류관 등을 전전하며 무려 몇십장에 달하는 실질적 자료들을 확보했다. 이런 자료들은 모두 한재수선생의 항일투쟁 사적을 기록한 것들이다. 한희찬은 저자가 대학교 정년퇴직 교수이고 길림시‘기록’친목회 회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자기가 찾은 자료들을 부쳐왔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노력에 저자는 큰 감동을 받은 나머지 한재수선생의 항일투쟁 사실을 세상에 알리고 선전하는 일에 발벗고 나서게 되였던 것이다.

한희찬은 안봉생의 맏딸 안기영과 안중근의 외손녀 황은주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 역시 한재수선생의 항일투쟁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한편 이 글은 시간과 사건에 따라 재구성하고 압축도 했으나 원칙적으로 《내몽골 조선족》에 기록된 내용과 《내몽골 조선족》의 주필 렴호선생의 증언을 기록한 내용을 옮긴 것이며 이외에도 일부 참고문언에 기록된 내용을 옮겼다.

울란호트시는 1947년 5월 1일 내몽골자치구가 설립된 곳이고 자치구 정부가 있던 곳이며 오늘날 5.1회지기념관과 우란후사무실, 내몽골민족해방기념관, 내몽골당공위 사무실 등 유적이 있는 곳이다. 한편 한재수선생의 항일투쟁 사적을 발굴하고 알리는 일은 홍색혁명도시인 울란호트에서 일찍 항일투쟁을 해온 조선민족에 대한 기록이 없던 공백을 메우게 되였다는 데서 무엇보다 그 의의가 깊다고 할 수 있다.

 
저자와 한희찬씨(왼쪽)

부록:

내몽골조선족연구회는 《내몽골 조선족》을 펴내면서 전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문정일의 권두언을 실었다.

“…내몽골에 거주한 조선족은 2만 2,000여명이며 전국 조선족의 한 부분으로서 조선족 총수의 1%를 차지하고 내몽골자치구 총인구의 0.1%를 차지합니다…이 책은 자치구 설립 40년을 회억하고 당의 민족사업과 민족정책을 관철하며 비교적 전면적이고 계통적으로 조선족 정황을 소개했습니다…이 책의 편집 출판은 의심할 바 없이 자치구 소수민족 문제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하였습니다…《내몽골 조선족》의 편집 출판은 학술계에 민족사학연구 자료를 제출함으로써 이는 자치구 설립 40여년래 처음으로 비교적 전면적으로 내몽골자치구에서 조선족의 근 100년래의 력사 발전 상황을 기술한 것으로서 한부의 진실한 산거 민족의 발전사를 쓴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사학 연구에 일정한 가치를 가지는 것입니다.”

《내몽골 조선족》 주필 렴호(廉皓)선생은 아래와 같이 증언했다.

“제가 내몽골자치구도농건설환경보호 청장과 내몽골조선족연구회 제1임 리사장으로 있을 때인 1990년, 우리 조선족 백성들이 내몽골자치구에 이민온 지 100년이 되는 력사를 쓰기 위해 내몽골 조선족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3년이란 세월을 거쳐 토의하고 조사연구를 거듭한 끝에 1995년 3월 《내몽골 조선족》을 출판하였습니다. 조사연구와 집필 과정에서 반일투쟁의 중요한 인물인 한재수선생의 항일투쟁 사적을 료해하게 되였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개괄적으로 내몽골지역에서의 조선족의 100년 력사 흔적을 찾고 지금의 분포 그리고 정치, 경제, 문화, 생활, 풍속 등 조선민족 관련 문자자료의 공백을 메웠습니다. 때문에 본 저서에서는 한재수선생의 항일력사사적에 관해서는 대략적으로 적었을 뿐입니다…”

/한직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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