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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73]유적지답사와 력사고증(김춘선편2)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1-06 10:13:02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3](김춘선편2)

 

대학시절의 김춘선교수.

력사연구는 자료를 수집하고 론문을 쓰고 책을 쓰는 방법도 있지만 그 력사연구 성과를 진일보 (고증)하려면 력사유적지를 답사하고 연구하는 것도 반드시 거쳐야 할 경과라고 나는 생각한다. 기실 우리가 1980년대 초기까지 진행한 많은 연구는 자료수집에 기초하였고 현장답사와 문헌연구를 잘 결부시키지 못하고 소홀히 하였기에 연구에 많은 애로와 문제점이 존재하였다.

1980년대 초부터 중앙정부에서 동북지역의 항일투쟁사연구를 위하여 국가에서 거금을 투입하여 사회과학원을 중심으로 각 대학의 교수들을 뽑아서 광범위한 유적지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일환으로 우리 연변에서도 자치주에서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고 연변대학의 교수들로 무어진 조사대를 내와 1984년도부터 본격적인 답사를 진행하여 왔다. 이 답사에 행운스럽게 나도 참가하게 되였는데 최초의 답사지역은 연길현 의란구 근거지에 대한 답사였다. 이 답사를 위하여 당년에 의란구에서 활동하다가 광복이후에 조선에 나간 박창범이란 로인과 연변주(연변조선족자치주) 려영준 부주장님, 로혁명가 박춘일로인님 등 당사자들을 모셨고 연변대학교 황룡국교수님과 권립교수님, 박물관의 김철수 부관장님 등이 이번 답사에 참가하였다.

답사하는 과정에서 그때 유격근거지에 있었던 집터와 그때 사용되였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였고 일제 또치까 등등이 발견되면서 당시 어떤 환경에서 유격구가 건립되였고 이들 유격구가 어떤 역할을 놀았는가 하는 문제들이 하나 하나씩 해명되면서 그 이후 항일유격대의 건립, 항일유격구의 건설, 동북인민혁명군의 설립 등 여러가지 복잡한 사실들이 아주 유기적으로 립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답사시간은 짧았지만 답사성과는 문헌재료에서 얻은 성과보다 못지 않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우리 연변지역의 답사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었다. 당시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백가쟁명이라는 원칙하에서 과거에 금지되였던 많은 령역에 대해서도 연구를 진행할 수 있었지만 대개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서 진행된 항일투쟁사연구에만 집중되였다는 점이다.

동북항일련군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알다싶이 중국공산당이 령도했던 많은 투쟁도 그 전시기 신해혁명시기부터 진행되였던 민주주의혁명으로 시작되였다. 연변지역의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도 공산당의 령도아래 유격대를 건립하고 유격구를 건립하고 동북인민혁명군, 항일련군을 건립하여 십여년간 간고한 투쟁을 견지했다. 그러나 조선족의 항일투쟁은 그 전시기에도 광범위하게 진행되였는데 이러한 력사가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리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는 오히려 1930년대보다도 1910년대 1920년대 투쟁이 더 독특하지 않았는가 생각한다. 1910년대와 1920년대는 비록 일본제국주의가 대륙침략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지만 중국의 주권이 살아있기 때문에 연변을 제외한 기타 많은 지역들에서는 지방당국을 비롯하여 민중들이 직접적인 대일투쟁을 공개적으로 전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조선족만은 다른 력사적인 환경과 력사적인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와 일찍부터 투쟁을 전개해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1910년에 일본은 조선을 강점하였고 나라를 빼앗기고 망국노의 신세가 된 우리 조선민족은 살길을 찾아 동북지역으로 대량 이주하였고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조선족사회를 구축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족은 일찍부터 일제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또 중국땅에 온 이후에도 일제는 이른바 조선족을 보호해준다는 미명하에 지속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세력을 확장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족은 본의 아니게 일본제국주의의 탄압을 받는 동시에 또 일본의‘앞잡이'라는 애매한 루명을 쓰면서 여러가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견제를 받게 되여 상당히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은 원인으로 조선민족은 일찍부터 기타 민족과 다르게 기타 지역과 다르게 일본제국주의와 투쟁하는 길에 나섰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력사유적지 조사에 있어서 주요하게 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근거지와 항일유격대, 항일련군 등과 관련된 사건, 전투지역, 인물 등을 연구하고 조사하고 답사하는데만 열중했을뿐, 1910년대와 1920년대 우리 조선족들이 이 지역에서 군사기지를 꾸리고 일본제국주의와 무장으로 싸웠던 유적지들에 대한 답사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한계점이 로출되였다. 그래서 1986년부터 이 지역과 사건들에 대한 답사를 진행하게 되였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연변에서 자랑할 수 있는 도문의 봉오동전투유적지와 화룡시에 있는 청산리대첩유적지 등등이라 할 수 있다.

봉오동전투 유적지답사길에서.

봉오동전투기념비도 초기에 우리가 갔을 때에는 이미 이 지역이 저수지로 되였기 때문에 당년에 있었던 하촌, 중촌, 상촌 마을들이 전혀 없어졌고 페허가 된 마을들은 저수지에 잠긴 후였다. 그러나 우리는 력사문헌자료에 근거하여 그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찾아냈다. 그것을 찾아냄으로 하여 그 이후에 1910년대와 1920년대 조선족들이 싸워왔던 그 력사를 다시 상세하게 복구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 화룡시 청산리의 유적지도 마찬가지이다. 청산리전투는 1920년 10월에 벌어진 대형 전투인데 우리는 이 전투를 청산리대첩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10여개의 전투를 하나로 묶어서 하는 말이다. 이 전투에서 우리 조선족반일부대는 근 2만여명이 일제 정규군과 맞서 추호의 두려움도 없이 용감히 싸워 천여명의 일본군을 소멸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이렇게 중요한 유적지를 그때까지 단 한번도 답사하지 않고 있다가 우리가 처음 답사에 나선 것이다. 나도 이 답사에 앞장섰다. 당시 교통도구가 빈약한 상황이여서 나는 답사를 위하여 셋째 형더러 오토바이를 빌려오게 한 후 면허학습반에 참가하여 가사증을 타고 김태국선생님과 함께 청산리일대를 약 한달간 샅샅이 누볐다. 청산리마을에서 주숙하면서 로인들과 같이 자고 밥먹고 같이 현지답사를 하여 청산리대첩과 유관된 모든 유적지들을 하나하나 밝혀냈다. 현재 이곳도 저수지로 되였는데 우리가 답사하던 1980년대에는 그래도 많은 유적지가 그대로 남아있었고 많은 로인들을 만나볼 수가 있었다. 유적지답사에서 당년 일본군이 버리고 갔던 군화와 희생자들의 해골 등을 발견할 수 있었고 그 당시 당지에서 이 전투를 목격했거나 혹은 간접적으로 참여했던 당사자들을 만나 문헌에 기록되지 않은 많은 력사사실들을 확인할 수가 있었다. 이와같이 답사를 통해 그 이후 연변지역의 1910년대와 1920년대 우리민족의 항일투쟁사를 생동하게 복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답사도중 내물가에서 다리쉼을 쉬고 있는 답사자들.

그 이후에도 유적지답사를 계속하였는데 연변뿐만 아니라 기타 동북지구로 확장하면서 우리 조선민족이 당시 거주했던 곳과 유격대를 건립했던 근거지 등을 하나하나 조사하면서 지방정부와 공동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이런 기념비들은 지금까지도 국가문화재로 되여 현급, 시급, 주급, 성급문물로 보존되고 후대교육기지로 사용되고 있다.

1986년도에 우리는 화룡에서 온 소식을 접했는데 화룡현 장홍림장(화룡림업국 제1림장)에 항일련군과 관련된 유적지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그래서 그 지역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우리 항일련군사를 살펴보면 1936년-1938년경에 남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항일련군을 세개방면군으로 재편성하였다. 당시 중국공산당에서는 공산국제의 지시와 중국공산당의 사명으로 항일련군 내에 있는 조선족공산당원들과 전사들을 중심으로 조선족무장부대를 단독으로 설립하여 항일전쟁이 승리한 후 조선의 혁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졌기에 동북항일련군 제2군6사를 중심으로 1938년 11월에 제2방면군을 건립하여 주로 두만강, 압록강 연안에서 활동하다가 기회만 있으면 조선 국내로 진출하여 일본제국주의의 식민기관을 때려부시는 전투를 진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37년도에 있었던 보천보전투였다. 그 이후에도 제2방면군은 조선무산지구에 진출하여 일제의 식민기관에 대한 심대한 타격을 가했고 일제의 추격을 피해 화룡일대로 넘어왔던 것이다. 때문에 1939년부터 1940년 제2방면군의 주력부대가 연해주로 이동해가기전까지 주로 화룡현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답사한 지역이 바로 제2방면군의 주력부대가 화룡일대에서 할동할 때 화라즈일대에 건립했던 밀영이다.

황룡국 등 로교수들과 함께 전적지를 답사하는 김춘선.

당시 유격구의 특색은 낮에는 만주국의 천하였고 밤만 되면 공산당지하조직과 항일련군의 활동무대였다. 이렇게 낮과 밤이 서로 다른 상당히 특수한 시기였다. 우리가 그곳을 답사하게 되였는데 경사도가 40도가 되는 가파로운 한 산봉우리에는 360도 사면으로 전호가 있었고 중간에는 나무널판자(홍송나무를 톱이 아닌 도끼로 깎아 만든)로 만든 통나무집 흔적이 있었다. 집은 이미 무너져서 널판자는 이미 삭아 있었고 집안에 들어가니 항일련군들이 당시 쌀을 찧어먹던 나무절구통도 있었다. 절구통은 절반이 썩어나가고 절반만 남은 모양을 찾아볼 수 있는 통이였다. 그외 쌀을 찧은 다음 채를 치는 채뿌리도 발견하였는데 채뿌리조각 세개, 네개을 쇠줄로 이어서 만든 그런 채뿌리였다. 더 유명한 것은 물을 끓여먹던 주전자를 발견하였는데 그 주전자에는 총알구멍이 두개가 나있었다.

이렇게 그때 당시 항일련군들이 무장투쟁을 하면서 직접사용했고 일제의 추격을 받아 남겨둔 그런 유물들을 그날에 발굴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런 유물들을 수집하고 사진을 찍었으며 유물들을 가져다가 연변박물관에 보관하였는데 지금도 연변박물관 문물창고에는 그런 유물들이 보존되여 있다. 이러한 유물들이 바로 당시 항일련군들이 간고한 시절에 싸우면서 사용했던 보귀한 유물이다.

왕청현 항일유격대대 밀영을 찾은 김춘선교수.

유적지답사는 기실 지방정부의 도움이 없이는 매우 어렵다. 그 일례로 한가지 말씀드리면 지금 왕청현 라자구진 태평촌에 가면 신성동이라고 하는 땅굴이 있다. 이 땅굴은 경사도가 약 35도 되는 산중턱에 있고 가파로와 일반 사람들은 잘 올라가지 않고 또 올라가기가 여간 힘들지 않다. 그런데 이 땅굴 표면의 절벽 암벽에 태극기(대한제국의 국기)가 그려져 있고 대한독립군 리준 등 4명의 이름이 밝혀져 있다. 내가 수십년 유적지를 답사하고 유적지를 복원하면서 수없이 많이 다녔지만 지금까지도 그때 당시의 유적들이 완전하게 완미하게 보존되여 있는 것은 바로 이 한곳 밖에 없다.

항일유격근거지 답사길에서(왼쪽 두번째 김춘선교수).

지금 왕청현 소왕청근거지라든가 훈춘시 대황구항일근거지 그리고 각 현, 시에서 많은 항일유적지를 복원하였지만 이러한 것들은 모두 그 유적지에다 새롭게 만든 것들이다. 그러나 왕청현 태평구의 이 땅굴은 그때 그 당시의 것으로 상당히 귀중한 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문물을 발굴하기 위하여 우리는 적극적으로 주문화국 문물관리처와 왕청현문화국 문물관리소의 분들과 답사를 여러차례 진행하여 이것이 바로 우리 조선족들의 항일투쟁 유적지의 하나임을 증명하였다. 기실 이 유적지는 1950년대에 조선의 력사방문단이 중국정부의 동의를 받고 동북지역을 답사할 때 최초로 발견했던 곳이다. 그러나 조선력사방문단은 이 유적지가 조선인민군의 유적지가 아니고 1910년대에 조선민족반일무장이 남긴 유적이라고 판단하고 중시를 돌리지 않았기에 연변에서도 이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적지를 1998년도에 우리가 새롭게 발굴, 복원하면서 정말 가치있는 유적지로 거듭나게 했다.

소왕청유격근거지를 답사하고.

이외에도 현재 룡정에 있는 많은 유적지라던가 동북3성에 널린 많은 유적지, 혹은 관내 유적지들은 각급 정부의 협력하에서 새롭게 복원해야 하는 시점에 놓여 있다. 한때는 일부 관원들이 조선족력사와 조선사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였다. 례하면 우리가 청산리대첩기념비를 세울 때 일부 학자들이 청산리대첩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운 조선사가 아니냐, 그런데 왜 우리가 기념비를 세워야 하느냐 하면서 문제를 제기했고 이 문제를 잘 못 인식한 일부 관원과 기관에서는 재검토를 요구해왔다. 우리는 청산리대첩은 무엇때문에 우리 민족의 력사이고 우리 조선족의 력사이며 중국의 항일투쟁의 력사라는 것을 다각도로 설명하고 론증을 했다. 결과 청산리대첩은 중국조선족의 력사로서 중국력사의 중요한 한부분으로 인정되여 그곳에 청산리대첩기념비가 건립되면서 우리 민족의 자랑찬 력사를 후대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결론적으로 장기간의 유적지답사와 발굴, 정리를 통해 한가지 터득한 점이라면 금후 유적지답사나 유적지복원에서 반드시 우리 력사의 시기별 단계별의 부동한 성격을 분명히 밝히고 력사연구의 방법론에서 “1사2용”, 혹은 “이중사명”등 다각적이고도 과학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유적, 유물을 재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글 구성: 김태국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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