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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72]력사입문과 스승들(김춘선편1)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28 09:56:49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2](김춘선편1)

김춘선(金春善):

1956년 출생. 중국공산당원. 1982년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 졸업. 연변력사연구소 연구원. 연변대학민족연구소 석사연구생. 한국국민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 획득. 연변대학 인문학원 사회학과 교수. 연변대학민족력사연구소 소장 등을 력임. 박사생도사. 현재 중국조선민족사학회 학술고문, 연변력사학회 회장.

주요저작과 론문:

《항일무장독립투쟁사》 상하권, 《연변지구조선족사회 형성 연구》, 《한국사의 발전과정과 령토》, 《연변지구 안중근의사 항일활동유적지 조사보고서》, 《최진동장군》, 《중국조선족혁명투쟁사》,《북간도 한인사회의 형성과 민족운동》, 《재중 한인이주사 연구》,《조선족간사 수정본》주필,《중국조선족통사》상중하권,주필, 《신해혁명과 중국조선족》,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 《해방전쟁시기 중국조선족》,《중국조선족렬사전》(50권) 주필, 《중국조선족사료전집》(105권) 주필 담당, 《중국조선족 력사연구의 회고와 전망》등 100여편의 론문을 국내외에 발표.

 

 

제1집 력사입문과 스승들

나의 부모들은 일찍 조선 함경북도에서 19세기 중엽이후에 연변지구에 이주해와 살았고 나는 제3세대로 화룡현 화룡진에서 1956년도에 출생했다. 문화대혁명기간에 아버지가 5.7간부로 농촌에 내려가 재교육을 받을 때 우리 집도 하방간부라는 형식으로 화룡현 토산공사 오명대대 제5대 명산촌에 하방하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소학교 5학년과 초중, 고중을 모두 토산공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후 1975년도에 토산고중을 졸업하고 귀향지식청년의 신분으로 토산 5대에 내려가 농민들의 재교육을 받게 되였다. 그곳에서 민병패장, 정치대장 등 직책을 맡고 사업하다가 1977년 대학시험이 다시 회복되면서 나에게는 대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되였다. 대학시험을 쳤는데 행운스럽게도 중앙민족학원(현재의 중앙민족대학, 그는 중앙민족학원이였음)에 입학하게 되였다. 중앙민족학원에서 내가 선택한 학과는 력사학과였다. 중학교에서 력사도 배우지 않았는데 어떻게 갈 수 있었느냐 하면 당시 토산중학교에 있던 교도주임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고중시절의 김춘선(뒤줄 오른쪽 두번째).

당시 토산중학교 고중부에는 교도주임 선생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중앙민족학원의 정치학부의 졸업생이였다. 그 선생님이 나에게 그래도 력사를 배우는게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있고 또 력사는 중앙민족학원에 가서 배우는게 상당히 좋다고 추천하였다. 4년간의 력사공부를 마치고 제가 분배받아온 곳이 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직속기관인 연변력사연구소였다. 연변력사연구소에 안배받아서 1982년부터 력사연구를 시작하였는데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로정이였다. 실제적으로 연구에 들어가자니까 어려운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선생님들과 선배님들의 적극적인 지도하에서 나는 1982년도부터 지금까지 수십년간 연변력사연구소, 연변대학민족력사연구소, 민족연구원, 연변대학 인문학원 사회학과에서 력사연구에 종사하면서 동북의 항일투쟁사와 중국경내의 조선민족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중앙민족학원시절의 김춘선(왼쪽 두번째).

기실 중국경내 조선족력사 혹은 연변의 지방사연구는 문화대혁명전부터 시작되였다. 1950년대 초부터 시작된 력사연구가 1960년대 초에 이르러 중앙민족사무위원회의 통일적인 조직하에서 소수민족 “5개총서”라는 틀에서 조사, 연구되였다. 중국조선족의 력사저서가 초기에 간사로 내부발행된 것은 1964년이였다. 그후 조선족력사연구가 본격화되다가 불행스럽게도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이러한 소수민족력사는 모두 금지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화대혁명이 결속되는 1976년까지 이분야의 연구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대혁명이 결속된후 중국공산당은 소수민족력사를 복원하고 발전시키는데 매우 큰 중시를 돌려왔다.

조선족력사 연구에서 지목할 학자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변대학에는 최초에 유명한 력사교수로 지희겸이라는 교수가 있었다. 이분은 1902년에 조선에서 태여난 후 중국에 이주하여왔고 1920년대에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여 많은 반일활동을 하신 분이다. 반일활동을 하다가 여러차례 일본경찰에 체포되거나 (당시) 중국지방당국에 체포되여 감옥생활을 한 적도 있었고, 1930년대에는 중국공산당 지방조직에 가입하여 주하현에 파견되여 주하현 당위 서기로 있었고 그후 밀산시 당위 서기직을 맡은 조국과 민족의 해방사업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이분은 광복직후에 연변에서 가장 유명했던 민주대동맹을 결성한 최초의 조직자였고 연변의 지방건설과 토비숙청 등에 막대한 공헌을 하신 분이다. 그는 광복초기 연변의학원, 연변대학에 와서 교수생활을 하면서 력사연구를 많이 하셨다. 지희겸교수님은 제1대 교수로서 남긴 론문이나 력사서적은 많지 않다. 그러나 그분의 경력자체가 력사이기 때문에 그분은 연변지방사 내지는 우리 민족사의 최초의 력사교수라고 할 수 있다.

지희겸교수.

다음은 고영일교수님을 꼽을 수 있다. 고영일교수님도 조선에서 태여나 중국에 이주하여왔으며 최초로 우리 연변에서 력사연구에 종사한 유명한 교수라고 할 수 있다. 1945년에 길림사도대학을 졸업한 후 연변대학 력사학부 교수로 있으면서 많은 연구성과를 냈다. 최초의 연구성과는 《조선족력사연구》라는 책을 출간한 것이다. 당시만 해도 조선족에 대한 연구서적이 아주 적을 때였다. 그러나 고영일교수는 다년간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최초의 《조선족력사연구》라는 단행본을 출간함으로써 금후의 조선족력사연구의 새로운 기틀을 마련했다. 그후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연변대학고적연구소 소장직을 맡고 교수를 진행하는 한편 연변주문사자료판공실과 합작하여 《중국조선족력사연구참고자료휘편》이라는 자료총서를 발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고영일교수는 연변대학에서 단독저서, 자료집출간하는데 막대한 공헌을 한 최초의 연구형교수라고 할 수 있다.

고영일교수.

그 이후로 황룡국교수, 박창욱교수, 최홍빈교수 등 교수들도 력사연구면에서 큰 성과를 올렸다. 이들 중 우선 내가 특별히 소개할 분은 황룡국교수이다. 황룡국교수는 연변에서 최초로 연구사업에 종사한 교수로서 연변대학 학부에서 교편을 잡다가 1950년대 초에 상해에 있는 화동사범학교에 가서 연구생으로 공부한 경력이 있다. 이러한 학술성과를 토대로 연변대학에 돌아온 후 많은 연구성과를 발표하게 되였다. 그후 문화대혁명 때 박해를 받아서 팔도에 쫓기워갔댔는데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연변대학에 최초로 복직한 후 각지방에 분산되여 내려갔던 유명한 교수들을 다시 연변대학으로 모셔오는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연변대학의 최홍빈교수와 료녕민족출판사의 문숙동 총편 등의 합작으로 집필한 《조선족혁명투쟁사》이다. 1988년에 출간된 책인데 아마 고영일교수 외 처음 내놓은 저작이라 볼 수 있다. 이 《조선족혁명투쟁사》는 우리 조선족이 간고한 항일전쟁시기에 활약했던 모든 사건들을 하나하나 연구하고 과학적으로 기술하면서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사를 아주 정연하게 정리한 가치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그 이후 황룡국교수는 우리 학생(석사연구생)들을 거느리고 자료수집과 력사유적지답사를 지속적으로 진행하면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청년시절의 김춘선.

그외에 학술적으로 큰 공헌이 있는 학자로는 박창욱교수를 꼽을 수 있다. 박창욱교수는 나의 석사지도교수이다.

박창욱교수는 1928년 9월 18일 생으로 일본제국주의가 동북을 침략한 날자와 생일이 같았다. 아마 력사교수의 사명감을 같고 내여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박창욱교수는 광복전에 길림에서 국립우등학교를 다녔는데 이 학교는 길림시에서 유일한 조선족학교였다. 아주 질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에서 어느 화학공장에 취직했다가 광복을 맞게 되였다. 광복을 맞고 아주 혼잡하던 시기 조선인민회라는 조직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길림을 탈출하여 연변에 나오게 되였다. 연변에 나와서 그 때 갓 건립된 연변대학에 입학하려고 하였으나 내전으로 초생이 중지되여 학교로 못가게 되자 아예 참군하여 전쟁터로 나갔다. 그후 그는 길동군구 경비대에 분배받아 동북해방전쟁에 참여하였다가 부대를 따라 관내로 진군하여 해남도를 해방하는 전투에도 참가하였으며, 상급의 지시로 항미원조 보가위국 전쟁에까지 참가한 우수한 전사로서 공화국의 건립과 건설을 위해 분투하였다. 그후 조선전쟁에서 부상을 입고 돌아왔는데 1950년도에 재차 연변대학에 입학하여 연변대학에서 학과과정을 마치고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된것이다.

박창욱(오른쪽 두번째)교수와 함께.

방금전에 이야기한 황룡국교수 등 이러한 교수님들은 문화대혁명 이전부터 중앙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관했던 소수민족 “5개 총서”중 조선족간사 편집에 직접 참여하여 집필을 맡았던 주요한 학자들이다. 이들이 주필을 맡아 집필한 조선족간사는 1984년도에 정식으로 출간하게 되였는데 지금까지도 우리 중국조선족 력사연구의 기본적인 기틀을 마련했던 최초의 거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거작의 집필에서 박창욱교수님이 아주 큰 공헌을 하였다. 그 이후에도 박창욱교수님은 줄곧 우리들에게 “연변대학은 우리 민족을 위해서 우리 민족의 력사연구를 위해서 반드시 하여야 할 세가지 임무가 있는데, 그 첫번째는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자료중심을 형성하는 것이며, 세번째는 연구중심을 형성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왔다.

대학시절의 김춘선(왼쪽).

뿐만 아니라 박창욱교수님은 우리를 이끌고 직접 중국조선족연구에 몰진하였다. 박창욱교수님의 주요한 성과로서는 첫째, 중국조선족의 력사상한선을 그은 것이다.

일반적으로 력사상한선은 조선반도에 살던 우리민족이 어느 때부터 중국에 들어왔고 어떻게 중국조선족으로 되였으며 중국조선족의 력사를 어느 때부터를 시작으로 봐야 하는가를 학술적으로 론증하는 것이다. 과거 중국조선족간사나 그 기준에 맞추어 나왔던 연구성과들을 보면 모두 19세기 중엽, 즉 1860년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관점이였다. 그러나 박창욱교수는 1980년대 초부터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소수민족력사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나온 료녕성 혹은 길림성의 박씨촌들을 대상으로 사회조사를 진행한 후 이들 박씨들의 력사를 토대로 우리 중국조선족력사의 시초는 19세기 중엽이 아니라 17세기초로 소급해 올라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다시말하면 17세기 초에 청나라와 조선간의 전개되였던 두차례의 전쟁 즉, 정묘지역과 병자지역에서 청나라군대가 조선에서 포로로 붙잡아온 수많은 조선백성들이 곧바로 지금의 중국조선족의 선조라고 고증하였던 것이다. 결과 지금의 우리 력사서술은 조선족의 이주사, 조선족의 상한선을 19세기 중엽이 아니라 17세기 초로 잡고 있는데 이러한 연구성과가 바로 박창욱교수의 주요한 성과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력사학자들과 함께 홍기하전투유적지를 답사하다(왼쪽 두번째가 김춘선).

두번째 연구성과로서 대표적인 것은 이중사명문제이다. 이중사명은 주로 조선공산주의자들을 놓고 하는 말이다.

조선족은 공산당이 창건되기 전부터 항일투쟁을 진행하였다. 그후 중국공산당과 조선공산당이 동북지역에 병존하고 있을 때에도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면서도 반일반제투쟁만을 강조하여 왔다. 왜냐하면 이기시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조선혁명연장론에 기초하여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동하면서도 일본제국주의를 때려부시고 조국을 독립시키는 것만이 최종 목표라고 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공산주의자들이 그 이후에 공산국제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의해서 대량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 된다. 1929년말-1930년 초부터 수많은 조선족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이후에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혁명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 때에 와서야 비로서 이러한 혁명은 단순히 조선독립을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중국혁명에 참가하는 형식으로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고 조선민족의 철저한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는 이러한 이중사명을 가지게 된다. 이같은‘이중사명'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반드시 완성해야 할 일종 숙명이라고 볼 수 있다.

박사학위를 따고 남긴 기념사진(오른쪽 사람이 김춘선).

지금까지 우리 조선족의 력사에서 어느것이 조선사고 어느것이 한국사고 어느것이 조선민족사인지 또 어느것이 중국사인지 구분하기 상당히 어려운 부분들이 많다. 동북지역의 많은 항일유격대와 동북인민혁명군 내지는 항일련군들의 투쟁이 수천수만의 조선인, 중국조선족들의 참여로 진행되였는데 이 력사를 조선사로 보아야 되는지 아니면 중국사로 보아야 되는지 또 중국조선족사로 보아야 하는지가 상당히 애매모호한 혼란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중사명이란 관점에서 혹은 그 이상의 1사2용(하나의 력사를 두가지 시각에서 보는 것.)의 그런 큰 틀에서 볼 때 이는 모순되지 않고 우리 식민지국가의 인민들이 반파쑈투쟁을 위해서 공동으로 진행한 위대한 혁명의 력사로서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력사가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거나 동북에서 항일투쟁을 진행한 것은 첫째는 중국 혁명을 완성하여 공화국의 창건을 위한 것이고 조선민족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이며 둘째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민족의 철저한 해방을 쟁취하기 위한것이라는 이런 이중사명의 문제를 론문을 통해 심층적으로 론증함으로써 학계에서 그것을 받아들여 지금에 이르러 정설로 되고 있다는 이 점이다. 또 박창욱교수는 많은 연구성과를 냈을 뿐만 아니라 인재육성에도 많은 정력을 넣어 수많은 석사와 박사생들을 양성해냈다. 지금 중국의 전국 각 대학에 있는 많은 조선족력사학자들은 거의 8090%가 박창욱선생의 제자일 것이다. 국내 뿐만 아니라 많은 학생들은 국외의 유명대학에 가서도 력사연구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것도 박창국교수의 로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외에도 최홍빈교수, 권립교수 등도 조선족력사연구에 많은 성과를 올린 분들인데 이분들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상세히 소개하기로 하겠다.

글 구성: 김태국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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