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력사]우리 민족의 항일투사들―주서범, 허형식

편집/기자: [ 심영옥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26 13:33:15 ] 클릭: [ ]

제1편 동북항일련군 장교

동북항일련군 제3군―사급 이상 장령

주서범(周庶泛, 1910—1940): 중공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 동북항일련군 제3로군 제1사 정치부 주임

1910년에 조선에서 태여났으며 주서범이란 이름은 중공림시북만성위원회 서기 풍중운이 지어준 것이다. 주하(오늘의 상지시)에서 창건된 주하유격대의 초창기 구성원중의 한사람이며 1935년 가을 제3군 사령부가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송화강 하류로 전이할 때 제2퇀, 제3퇀과 주하 경내에 남아 투쟁을 견지하였다. 1935년 11월 15일, 주하 5구의 춘추령(春秋岭)에서 있은 ‘토벌대’와의 조우전에서 퇀장 왕혜동(王惠同)과 정치위원 조일만(趙一曼)이 부상을 당하고 적들에게 체포되자 관화신(關化新)과 함께 그들의 직무를 대신하여 나머지 대원들을 이끌고 포위를 돌파하며 조일만을 이어 제2퇀 정치위원이 되였다. 1936년 봄, 관화산 퇀장과 함께 제2퇀을 인솔하여 다시 철도북으로 돌아가 주하, 빈현(賓縣), 연수(延壽)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였다. 이 기간 철도북에서 활동하는 의용군, 산림대 등 여러 항일무장과 손 잡고 연수 쪽에서 달려드는 위만군부대를 수차 물리쳤다. 1936년 10월 하순, 제3군 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기치중(祁致中)이 이끄는 ‘동북민중항일련합군 독립사’(1937년 10월 동북항일련군 제11군으로 됨)의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독립사에서 기치중 사장을 도와 부대의 정치사상을 강화하는 한편 칠성립자(七星砬子) 후방기지를 건설했다. 한편 제3군의 후방기지인 도산(桃山) 남쪽에 위치한 평정산(平頂山)근거지의 건설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7년 3월 19일, 독립사 제3려 려장 강보림(姜宝林)과 함께 150여명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부금현 5구의 요툰(腰屯)에서 우세한 적들의 ‘토벌대’와 세시간의 격전을 벌리여 적들을 크게 타격하였으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1937년 4월초에 다시 제3군으로 소환되였고 8월 1일 제3군 제6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8년 6월, 중공북만림시성위원회에서 제8차 상무위원회 회의를 열고 제3군의 원 10개 사를 4개 사로 축소, 개편하자 새로운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9년 1월 28일, 항일련군 제3군과 제6군, 제9군, 제11군이 부대 번호를 변경하지 않은 채 4개 지대와 2개 독립사로 재편성되자 독립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으며 중공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으로 보충선거되였다. 이해 5월 30일, 항일련군 제3군과 제6군, 제9군, 제11군을 망라한 제3로군이 설립되자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이 때로부터 희생될 때까지 줄곧 철력, 경성 일대에서 부대를 이끌고 청봉령(靑峰岭)전투, 북관문취자(北關門嘴子)전투, 궁방자강(窮棒子崗)포위전 등 싸움에서 휘황한 전과를 취득하였다.

1939년 가을, 경성 경무과(慶城警務科)의 적들이 선후하여 두차례 림봉진(林鳳鎭) 등을 보내여 그를 투항시키려고 하자 장란생, 양주임, 왕퇀장 등 항일련군 지도자들과 의논한 후 적들의 유인투항전략을 역리용하여 부대를 위해 두대의 트럭과 40개의 마파리에 실은 좁쌀과 입쌀, 밀가루, 돼지고기, 군용 담요, 복장, 신과 모자 등을 탈취하였다. 하지만 그 후 1940년 1월 28일, 중공북만성위원회 제10차 상무회의에서 장란생과 함께 처분을 받았다. 중공북만성위원회 집행위원직무에서 해임되고 4개월간 당내에 남겨 관찰하는 처분을 받았다. 1940년 3월 3일, 장란생 등과 함께 남하하라는 명령을 받고 떠나가는 도중 통하현 소이길밀(小伊吉密)에서 수행부관인 임영림(任永林)과 경위원 왕모모가 제3군 군수부장 차영환이 지닌 현금 5,000원을 빼앗기로 한 밀모에 걸려 살해되였다. (자료 출처:《동북항일련군장령전》)

허형식(許亨植, 1909—1942): 동북항일련군 제3군 군장, 항일련군 제3로군 총참모장

리희산(李熙山)이라고도 불렀으며 1909년에 조선 경상북도 선산군에서 의병 허필의 아들로 태여나 1917년에 부모를 따라 료녕성 개원현 리기태자로 이주하였다가 1929년 봄 일가와 함께 흑룡강성 할빈 부근의 빈현 가반참으로 이주하였다. 1930년초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5월 할빈 5.1절 대시위에 참가했다. 그 때 할빈 일본령사관 습격에 참여했다가 30여명의 조선인 청년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여 공산당 혐의분자라는 죄명으로 심양감옥에서 1년간 복역했다. 그 곳에서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31년 9.18사변 후 중공만주성위원회의 구원에 의해 여러 동지들과 함께 출옥하였다. 심양감옥에서 나온 후 중공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좇아 김책과 함께 빈현으로 파견되여 중공빈현특별지부 위원이 되였으며 김책을 도와 빈현 일대의 각종 반일부대를 찾아다니면서 항일무장대오를 건립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이 기간에 조하, 가반점 등지에서 농민반일회, 자위대 등 반일단체들을 조직하였으며 탕원에 가서 반일유격대의 설립을 돕기도 하였다. 1934년 6월 28일, 주하유격대가 중공주하중심현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동북반일유격대 합동지대로 확대, 개편되자 합동지대 제3대대 정치지도원이 되였으며 그 해 겨울에는 제1대대 대대장이 되였다.

1935년 1월 28일,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이 설립되자 제1사 제2퇀 퇀장이 되였다. 그 해 3월부터 제2퇀을 거느리고 철도 북쪽의 10여개 의용군 부대들과 련합하여 적들의 춘기 ‘토벌’을 물리쳤다. 춘기 ‘토벌’ 후 그 해 6월에 제3퇀 정치부 주임이 되여 주하현 철도 남쪽과 오상현 일대에서 적들을 견제하였다. 1936년초, 제3퇀이 제3사로 확대, 편성되자 사 정치부 주임이 되여 제3사를 중심으로 ‘쌍룡’, ‘창강남’ 등 반일부대를 련합하여 반일련합군 도남지휘부를 내왔으며 주하와 오상 접경지대에 새로운 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다. 1936년 9월, 중공북만림시성위원회가 설립되자 집행위원이 되였으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이듬해 봄, 북만항일련군 총사령부에서 항일련군 의동판사처를 내오자 주임이 되였다. 1937년 6월말에 있은 중공북만성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제9군 정치부 주임이 되였다. 1937년 겨울, 성당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제9군을 떠나 각지에 분산되여 활동하는 제3군의 제1사, 제5사와 정치보위사 등 대오를 정돈하여 새로운 제3사를 설립하고 사장이 되였다. 1939년 4월 12일, 중공북만성위원회 제2차 확대회의에서 새로운 성당위가 구성되고 항일련군 제3, 제6, 제9, 제11군을 토대로 제3로군을 결성하자 총참모장이 되였다. 이와 동시에 제3군 군장 조상지가 쏘련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형편에서 제3군 군장을 겸하였다. 1940년 봄, 중공길동성위원회와 중공북만성위원회 책임자 회의의 결정에 따라 제3로군 지휘부에서 제3로군 지휘하의 제3, 제6, 제9, 제11군을 제3, 제6, 제9, 제12지대로 편성하자 제12지대 정치위원을 겸하고 제12지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1941년 여름, 제3로군 부대의 대부분이 리조린, 풍중운의 지휘하에 쏘련 경내에 들어가자 중공북만성위원회 서기 최석천과 함께 계속 동북에 남아 항일련군 제9, 제12 지대의 일부 소분대 대원들을 지휘하여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1942년 8월 2일, 경위원과 함께 경성(慶城) 남부 청봉령(靑峰岭) 기슭에서 ‘토벌대’와 조우하여 치렬하게 싸우다가 적들의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 (자료 출처:《동북항일련군장령전》)

/박문봉

 

0

관련기사 :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