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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10)화가 한락연동지를 그리며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19 14:13:21 ] 클릭: [ ]

▨ 상서홍(常书鸿)

1927년 가을, 나는 절강에서 프랑스 빠리에 갔다가 후에 시험을 쳐 리옹 중프대학에 국비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리옹은 도데가 자기의 이름난 소설 《조그만 것(Le Petit Chose 小物件)》에서 묘사한 ‘조그만 것’의 출생지로서 그가 소설에서 묘사한 것처럼 보수적이고 빈곤하고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침울한 도시였다. 중프대학은 산티에네산 아래에 위치했는데 교사는 원래 낡은 병영이였다. 집을 떠나, 조국을 떠나 금방 프랑스에 온 데다가 번화한 빠리까지 떠나 이 낯설은 작은 산간도시에 온 나는 이국에서의 적막감만 날로 더해가고 있었다.

 
상서홍의 제사

어느 달빛이 교교한 밤, 나는 중프대학 숙사에서 두만강변에서 온 한락연동지를 만나 알게 되였다. 그는 밝은 얼굴에 더없이 생기 있어 보였다. 이야기를 나누는중 우리는 어느덧 옛친구처럼 친해졌다.

그는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두툼한 수채 풍경화를 나에게 보여주면서 국내에서 그린 밑그림인데 리옹에 있는 중국 식당에서 개인그림전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나는 자못 놀라왔다. 당시 락연동지의 그림은 그다지 성숙된 것이 아니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예술이 어지간히 발달한 나라가 아닌 데 말이다. 정말 대담한 거동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당시 나와 함께 있던 려사백, 왕림을, 류개거 등 여러 동지들은 모두 그림을 더 충실히 하면서 준비를 더한 후 전시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한락연은 미소를 지으며 “시험해봅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였다.

얼마 후, 과연 중국 식당에서 그의 그림전시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좋은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여전히 아주 자신 있게, 아주 락관적으로 그의 수채화 사생을 계속했다. “나는 나로서의 타산이 따로 있는 겁니다!” 그는 솔직하게 우리들과 말했다. “환경의 핍박이지요. 나는 근공검학이니까 내 힘으로 살아가야지 않겠습니까. 나도 만약 당신들처럼 국비류학생이라면 이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 프랑스에 처음 와서 낯 설고 물설고 언어까지 통하지 않는 환경에서 공부하랴, 먹고 입고 생활하랴 참으로 쉽지 않았다. 국비생에 합격되기전에 나도 이런 간고한 생활을 겪었었다. 당시 음악을 공부하는 선성해동지도 리옹에 있었는데 생활의 핍박으로 커피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해 풋돈을 벌기도 했다. 근공검학이란 생각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것 역시 우리 이 세대 사람들이 간고분투하며 겪어온 일종 사회대학의 생활방식이기도 하다.

락연은 무일푼으로 프랑스에 온 것이였다. 하기에 그에게서 가장 절박한 것이 바로 생활의 궁핍이였다. 나는 락연의 대담한 분투정신을 높이 산다. 그의 말과 행동으로부터 나는 그가 기개가 있는 사람임을 보아낼 수 있었다. 나는 간난신고를 무릅쓰고 애써 노력하며 탐구하는 그의 정신에 지지의 박수를 보냈다.

얼마 후 그는 나에게 리옹은 너무 곤궁하여 여기를 떠나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로 가련다고 했다. 어느 하루 리옹미술관에서 그를 만났는데 니스에로 가는 그 날 밤 기차표를 이미 샀다고 했다. 내가 무슨 곤난은 없는가고 묻자 그는 없다고 했지만 나는 그의 사정을 아는지라 몸에 지니고 있던 프랑을 들춰내여 그의 외투 주머니에 밀어넣어주고는 악수로 고별했다.

이후로는 락연에 대한 소식을 별로 듣지 못했다. 다만 그가 프랑스, 스위스, 화란 등 나라를 려행하며 그림을 그리고 팔고 한다는 것이였다. 간혹 그의 이름은 들을 수 있었지만 얼굴은 만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어느 한곳에 정착해있지 않았고 편지도 별로 쓰지 않기 때문이였다.

1936년에 이르러서야 나는 빠리 몽파르나스 지하철에서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한 모습이였고 다만 옷차림이 리옹에서보다 깔끔해졌을 뿐이였다. 우리는 서로 리별 후 7~8년간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나에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는가고 관심조로 물어왔다. 나는 안했다고, 곧 귀국하게 된다고 알렸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만뒀다. 마지막에 그는 나에게 자기는 지금 《빠리석간》에서 촬영기자로 있다고 했다.

1945년 10월, 락연은 다른 유람객들과 함께 막고굴 천불동에 오면서 연도에서 사생한 밑그림을 가져왔다. 그때 우리는 이미 10년이나 갈라져있었지만 그는 예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별로 없었다. 특히 영원히 젊음이 넘치는 그의 자태가 더욱 그러했다. 그는 여전히 락천적이고 혈기왕성했다.

그의 그림을 보노라니 전부 명쾌한 빛과 색채로 차넘쳤고 추호의 침체감이나 생경감이라곤 없었다. 그의 그 능수능란하고 세련된 수채화 기법은 이미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어떤가? 친구!” 그가 나의 어깨를 치며 말했다. 그의 그림은 그의 넘쳐나는 정력처럼 나를 깊이깊이 감염시켰다. 나는 연신 “좋네! 좋구 말구!” 하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당시 나는 다년간 멀리 변새에 나가있던 터라 문득 20여년간 사귀여온 옛친구를 만나니 내심으로 여간만 즐겁고 위안이 되는 것이 아니였다. 하여 나도 내 그림을 내놓고 서로 품평하고 감상하며 각자 서로 격려의 말들을 아끼지 않았다. 그 날 밤 우리는 통쾌하게 긴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새며 즐겼다. 우리의 우정은 더욱 도타와졌다. 때는 바로 우리 가정에 변고가 생겼던 터라 그는 성심성의껏 나를 설복하며 만회할 방법을 찾았다. 그도 그럴 것이 프랑스에 있을 때 그는 우리 가정의 행복한 모습을 직접 보아왔던 터라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의 권고를 들어줄 것을 성근하게 부탁해왔다.

1946년 10월, 그는 부인과 아들딸을 거느리고 다시 막고굴 천불동에 와서 열흘간 묵었다. 이 기간 그는 많은 벽화를 모사했고 나는 그를 청해 연구소의 동료들에게 〈키질천불동 벽화의 특점과 발굴 경과〉란 강연을 하도록 했다. 그와의 이야기를 통해 그리고 그가 실제 하고 있는 일을 통해 나는 그가 하고저 하는 일을 알게 되였으며 동시에 미래에 희망을 느꼈다. 그는 천불동의 사업에 아주 좋은 의견을 내놓았다. 그는 1947년에 돈황에 다시 올 계획이였고 그 때에 가서 우리 두사람은 함께 유화 공필로 천불동의 대벽화 몇폭을 모사하기로 약속했다. 우리는 서로 기대해마지 않았다. 이 황량한 사막 속에서 중국 예술부흥의 원지를 개척해내야 한다고.

돈황을 떠나있는 1년간 그는 일을 한단락 마무리할 때마다 나에게 편지로 알려오군 했다. 하여 우리는 그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키질에서 모사하고 촬영하던중 그와 그의 조수는 가장 오래된 동굴 하나를 발굴했는데 후에 69호 동굴이라 명명했다.

그는 키질에서 모든 중요한 것들의 수집 정리를 전부 다 마쳤다고 할 수 있다. 키질석굴은 남강의 요충지에 위치해있는데 바로 인도 불교예술이 동쪽으로 점차 전해질 때의 하나의 문호로서 동굴 안의 작품들은 한진시대의 것이다. 창작 시간은 천불동보다 이르고 풍격은 서방에 접근해있었다.

그의 사업 성적이란 바로 돈황예술연구에 귀중한 공헌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장대천선생이 일찍부터 하고저 했으나 못해낸 일을 하려고 했지만 락연만이 멀리 관새를 지나고 산악을 넘어 뜨거운 고비사막에 와서, 지어 불행히 생명까지 바쳐가면서 조국의 예술보물고를 발굴하는 숭고한 사업을 완성한 것이다. 나는 락연이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접하고도 이를 믿을 수 없었다. “배가 익을 때면 천불동에 꼭 다시 갈 것이네.” 이는 락연이가 키질에서 나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의 마지막 한마디이다. 나는 그의 말을 믿어의심치 않았기에 줄곧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바로 천불동의 배가 초가을 변새 밖의 뜨거운 해볕 아래 각일각 익어가던 무렵이였다.

그러나 락연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의 이름이 뜻밖에도 비행기 사고 순난자 명단에 들어있을 줄이야.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였다! 나는 비통했고 나는 애도했다! 락연의 육체는 그의 아름다운 리상과 함께 기련산의 첩첩한 산봉우리 속에 영구히 남겨졌다. 영원한 고요는 늘 적극적으로 활동하던 한 령혼을 매장했다! 그의 희생은 서북 문명사에서 하나의 보상할 수 없는 손실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고요한 밤의 천불동에서 대불전각 철마의 딸랑딸랑 방울소리가 방불히 귀전에 듣려오는 듯하다. 이 소리는 또한 련면히 이어지는 락타대오 속에서 들려오는 방울소리같기도 하면서 나를 요원한 사막에로, 돈황과 키질의 천불동에로 끌고 가면서 락연동지와 함께 조국의 예술보물고를 발굴하기 위해 애써 사업하도록 독촉한다.

락연이 타계한 지 어언 30여년이 되였다. 당의 령도 아래, 동지들의 노력으로 돈황보굴은 날이 갈수록 더욱 찬연한 예술의 빛을 발산하고 있다. 락연이도 구천에서 이를 알게 된다면 더없이 위안을 느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락연에 대한 가장 좋은 애도이리라.

(《사회과학전선》 1982년 제4기에 실림)

상서홍(常书鸿 1904년-1994년): 만족, 열하 두전좌 사람, 유화와 돈황술 연구에 뛰여남.

1932년 프랑스 리옹 국립미술학교 졸업,

1936년 프랑스 빠리 고등미술전문학교 졸업.

북평예술전문학교 교수, 국립예술전문학교 교무위원, 조형부 주임, 교수, 교육부 미술교육위원회 위원 등 력임.

1943년 국립돈황예술연구소 소장 담임.

1949년 이후 돈황문물연구소 소장, 명예소장 력임.

돈황연구원 명예원장, 연구원,

국가문물국 고문.

감숙성문련 주석,

제3기, 제5기 전국인대 대표,

제6기 전국정협 위원,

제4기 전국문련 위원.

/번역: 김정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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