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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 《한락연을 추억하여》(7)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2)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16 15:17:46 ] 클릭: [ ]

▨ 최룡수 (전임 중앙당학교 교수)

4. 동서양문화 결합의 선행자

한락연은 우리 나라에서 유럽에 조기 류학한 화가들중 최초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서방문화를 창작활동에 결합시킨 사람이다. 프랑스에 류학 간 그는 수채유화를 전공하였기에 서양화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는 중국 전통문화예술을 지극히 사랑했으며 동서양 문화예술을 결합하여 대량의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조선민족의 중국 관내에서의 반일투쟁사 답사길에 오른 고 최룡수교수/자료사진

한락연이 가석방된 후 국민당 당국은 의연히 그의 행동을 제한했으며 서북을 떠나지 못하게 했고 빈한한 대중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가 하남의 황범구에 가서 사생하려고 하자 국민당 당국에서 허가를 주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학생 황주를 데리고 서악으로 불리는 화산에 가서 사생화를 창작했다. 그는 학생인 황주를 가르침에 있어서 아주 엄격했는데 기본기법으로부터 시작하여 프랑스 회화예술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때로는 스승과 제자가 밤을 새면서 똘쓰또이, 고리끼와 로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으며 또 모택동의 〈연안문예좌담회에서 한 연설〉 등사본을 읽기도 하였다.

보계에서 화산에 이르기까지 한달에 가까운 동안에 한락연은 40폭이 넘는 수채화 스케치를 창작했다. 그는 풍차와 물레방아로부터 산간마을 그리고 인민대중들의 로동생활 장면을 유화에 담았다. 수채화 〈다리 우에서〉는 거의 무너져가는 나무다리에서 한 수척한 남자가 구부정한 허리를 하고 수레를 몰고 있는데 수레를 끄는 말도 무척이나 여위여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한락연은 제자 황주에게 “나 보고 풍경과 정물만 그리고 가난한 백성들은 못 그린다고 했지. 그들을 위해 태평성세를 그리라고? 안될 소리지.”라고 말했다.

1944년 한락연은 집을 란주로 옮겨왔다. 그 해에 그는 서쪽으로 청해의 타얼사, 남쪽으로 감숙의 남쪽에 있는 라불렁, 북쪽으로 하서주랑을 따라서 돈황까지 가면서 만리장성의 가욕관, 건설중에 있는 천란철도와 신형의 인재를 키우고 있던 배려학교, 그리고 소수민족들의 풍토인정을 화폭에 거침없이 그려냈다. 그는 서방의 주요한 화법인 유화기법을 리용해 서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생활을 그림에 담았다. 유화 〈청해 타얼사의 묘회〉, 〈묘회에서의 노래소리〉, 〈타얼사 앞 례배하는 사람들〉과 〈라불렁거리〉, 〈라불렁묘회의 노래소리〉에는 매우 순수하면서도 또한 깊은 철리가 담겨져 있다.

라불렁에서 돌아온 후 한락연은 정력을 집중하여 유화 〈광명을 향하여〉를 창작했다. 이 작품에서는 한쌍의 장족부부가 어린 녀자아이를 데리고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남자의 등은 무거운 짐에 점점 구부러들고 그의 안해는 신발을 품속에 꼭 안고 맨발로 걸어가고 있다. 녀자아이도 부모들 사이에서 맨발바람으로 잡초가 무성한 산야를 걷고 있다. 이들은 먼곳의 태양이 있는 방향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는데 화가는 의지할 곳을 잃고 떠돌아다니는 장족동포의 모습에 지대한 동정을 표현하면서 그 속에 또 희망을 갖고 광명을 향하여 걸어가는 미래상을 부여하고 있다.

10월 한락연은 돈황으로 가서 오랜친구인 상수홍을 만났다. 두사람은 밤을 새가면서 그동안 20여년의 이왕지사며 그리고 천백년을 버텨온 이 돈황의 예술보물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사람은 제국주의자들의 략탈에 대해 분개하면서 중국의 고대 문화유산을 정리하고 발굴하기 위하여 분투하기로 결심했다. 비단의 길은 유럽과의 경제교류의 통로일 뿐만 아니라 동서방문화 교류의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다. 키질과 돈황은 비단의 길에서 동서방문화가 한자리에 모이는 곳이기도 하다. 한락연은 돈황막고굴에서 많은 벽화를 모사하였다. 그는 막고굴의 비천을 모사하였는데 남들과 다른 기법을 사용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흔히 공필화기법을 사용했지만 그는 수채화기법으로 모사하였다. 그는 잔잔한 색조를 써가면서 수, 당, 위 시기의 바람에 휘날리는 비천의 채색띠를 모사하였는데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환상의 경지에로 들어서게 한다. 그가 모사한 〈우뢰신(우주비천)〉 벽화는 립체감이 매우 선명하며 사각형과 삼각형의 결합을 돌출히 하였는바 간다라문화(고대 인도문화)의 특징을 아주 잘 구현하였다.

한락연은 주천 하서의 경마대회에서 국민당 하서경비구 사령인 도치악을 알게 되였다. 하루는 그가 도치악을 찾아갔는데 마침 그의 비서로 있는 원석안이 한참 사막에서 조난당한 몽골족동포를 위해 묘지명을 쓰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였다. 원석안은 “인생이 사막에서 마침표를 내렸네요. 비록 대지가 광활하여 편안하게 누울 수가 있겠으나 웃어도 누가 기뻐해줄 이가 없으니 얼마나 쓸쓸하겠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한락연은 “저는 이렇게 봅니다. 사막은 영웅을 배출하는 곳이지요. 말을 타고 아득한 사막에서 질주하다 보면 하늘과 땅을 다 가진 그런 기분이 들지요. 끝없이 푸르고 넓은 하늘과 아득한 들판은 당신들의 남방에도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동북에도 많지 않지요. 이런 곳에서 잠들었으니 령혼은 기뻐할 겁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사막으로 갈 것이다. 어디까지 따라오나 볼 것이다!” 이는 우에서 그가 한 말의 더없이 좋은 주해로 된다. 한락연은 이렇게 국민당특무의 감시를 피해 자유로운 삶을 찾으려는 심정을 표현했다. 비록 국민당특무의 감시가 삼엄했지만 한락연과 혁명자들 사이의 련계를 완전히 단절시킬 수는 없었다. 그는 여러번 산단에 있는 배려학교에 갔으며 그곳에서 르위 · 앨리와 마음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또 무위에서 가만히 조수산을 만나 어떻게 하면 조수산이 령도하는 양호성 장군의 옛 부하들을 혁명대오로 이끌고 갈 것인가를 토론하기도 하였다.

1946년 가을 한락연은 부인과 딸, 아들을 거느리고 다시 돈황으로 갔다. 그는 국립돈황예술원에서 〈키질벽화와 돈황벽화의 관계〉라는 제목으로 학술보고를 했다. 그는 보고에서 현장답사를 통해 얻은 자신의 연구결과를 가지고 키질의 벽화가 비록 돈황에 비하여 수량적으로 적지만 그 가치는 더욱 중요하며 벽화를 그린 년대도 오래 된다면서 돈황과 키질 예술에 대한 연구는 매우 중요해 응당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발굴과 연구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5. 력사문물의 호위병

한락연은 ‘키질벽화를 연구한 첫 중국 화가이다(엽천여, 叶浅予)’. 키질(克孜尔)은 신강 남부의 쿠처 부근에 위치해있으며 우리 나라 고대 불교와 이슬람교 문화의 서부 중심지이다. 한락연은 1946년부터 1947년까지 두번에 거쳐 키질석굴에 가서 고고학 발굴과 정리 그리고 연구를 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문물보호를 위하여 많은 창조성적인 사업을 하였다. 그 동란의 년대에 그는 모든 위험과 곤난을 무릅쓰고 자기절로 자금을 마련하여 멀고 편벽한 곳에 갔는바 그 자체가 창거이다. 하물며 새로운 발견을 하였음에야.

1946년 4월 한락연은 처음으로 신강에 갔다. 그는 처음에 투르판 일대의 승경대에서 당조시기의 동굴로 된 사찰을 보았다. 잔존한 벽화의 그림 색갈은 여전히 화려했고 도안의 변화도 돈황에서 본 것과 다른 모습이였다. 다시 하라허줘에 가서 고대 고창국 유적을 찾아보았으며 삼포에서 인력을 조직하여 무덤을 발굴하였는데 8개의 묘지명을 발견했다. 묘지명에는 고창의 연창, 연화 년호가 새겨져 있었고 또 당조의 정관, 건봉, 함형, 개요, 개원 년호도 새겨져 있었다. 그 후 또 고분 4곳을 더 발굴하고 미이라 5구를 발견했는데 머리가 없는 녀성 미이라 1구, 검은 모발에 검은 수염을 한 미이라 1구, 나머지 3구는 황갈색 모발의 미이라였다. 그러나 묘지명은 전부 한자였으며 한자 년호와 한어발음의 이름들이였다. 이는 당시 이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중 서역사람들이 많았지만 령토는 중국의 주권에 속하고 문화도 중국문화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 후 한락연은 또 쿠차 일대에 가서 위간하 하류의 쿠무투라 석굴에서 당조 초기 이전의 한족승려의 벽화작품을 고찰하였다. 그리고 그는 재차 키질천불동에 가서 고찰했다. 이곳은 고대불교의 중심지의 하나에 속한다. 위간하를 따라 6, 7리에 이르는 절벽에 약 300여개에 달하는 석굴이 있는데 거기에 잔존한 벽화는 색채가 화려하고 구도가 짜임새가 있으며 화법이 각이한데 고대 인도의 간다라문화 풍격에 근접했다. 그런데 또 한족, 페르샤, 희랍 예술풍격의 일부 특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이곳의 작품을 상중하 세개 시기로 나누고 또 돈황벽화와 비교를 했다.

그번 고찰을 끝내면서 한락연은 이렇게 적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두달 동안의 옛성에 대한 답사와 발굴, 벽화작품에 대한 모사는 신강이 고대 동서양문화 교류의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지위를 갖고 있으며 또한 한족문화가 신강 인민들에게 가져다준 영향이 그 력사가 유구함을 잘 증명해주고 있다.” 이번의 신강행에서 한락연은 50여폭의 그림을 그렸으며 사진도 500여장 찍었다. 그리고 적화에서 그의 열여덟번째 화전을 열었으며 란주에 돌아와 열아홉번째 화전을 조직해 신강 남부 지역의 풍토인정과 쿠차석굴의 벽화를 소개했다.

7월초 한락연은 다시 적화로 돌아왔다. 마침 국민당 감찰원 원장으로 있는 우우임이 신강에 정부 관원들의 선서의식을 감독하러 왔다가 한락연이 고고학에서 성과를 거뒀다는 소식을 듣고 접견했다. 며칠 후 우우임은 신강 남부 지역으로 가게 되자 다시 한락연을 요청하여 비행기로 동행하면서 이곳의 고고학 상황을 상세히 들었다. 우우임은 한락연의 학식과 분투정신에 매우 탄복해하면서 그의 혼자 힘으로는 이 일을 해내기 힘들다고 여겼다. 그를 지지해주기 위해 우우임은 한락연을 신강 감찰부문의 전문위원으로 위임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락연은 완곡히 사절했다.

1947년 3월 한락연은 두번째로 신강에 갔다. 그는 그림을 팔아 모은 돈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사고 다시 서부행을 시작했다. 함께 간 조수들로는 조보기, 진천, 초국강, 손필동 등이였다. 4월 중순, 신강 남부의 쿠차에 도착하였다. 쿠무투라에서 그는 세파에 무너져버린 동굴과 외국인들에 의해 략탈된 벽화의 남은 모습을 보고 심정이 매우 비통했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상심해서 이렇게 썼다. “당년의 성스럽던 모습은 형편없이 파괴되였습니다. 먼곳에서 흘러오는 도도한 위간하의 슬픔에 우는 소리는 마치도 옛날을 추억하며 슬퍼하는 것 같고 우리를 탄식하게 합니다.” 그는 분노해서 이렇게 썼다. “외국인들은 비단 벽화를 도적질해갔을 뿐만 아니라 이곳의 모든 한자에 대해 계획 있는 파괴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들의 이런 파괴는 철저하지 못해 많은 불상들의 이름과 이야기에 대한 해설은 의연히 희미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림 속 인물들의 복식도 모두 한족습관을 따랐습니다. 그 자들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지워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중국문화는 결국엔 중국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4월 19일 한락연은 키질천불동에 도착하였다. 그 곳에서 그는 한쪽으로는 이미 발굴한 동굴에 대해 통일번호를 매기고 한쪽으로는 계속하여 새로운 동굴을 찾았다. 그는 모두 100여개의 동굴에 대해 번호를 매겼다. 그중에서 75개의 동굴에 벽화가 있었다. 어떤 동굴은 절벽에 있어 길이 통하지 않자 나무계단을 만들어 올라갔으며 더욱 높은 곳에 있는 동굴은 암벽에 발 디딜 곳을 파고 몸에 바줄을 매고 가까스로 올라갔다. 후에 모래로 덮인 곳에서 새로운 동굴을 발견했는데 그 동굴 속의 벽화가 아주 잘 보존되여 색갈이며 풍격이 더없이 선명했다. 한락연은 날듯이 기뻐서 피로도 마다하고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단숨에 그려내려갔다. 이번 고찰에서 그는 또 불상이 없는 한 동굴에서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는데 이는 중국미술사에 중요한 의의가 있다.

후에 한락연은 가지고 간 기자재를 다 써버려 란주로 돌아가 필요한 장비를 보충하고 다시 신강 남부로 갔다. 키질을 떠나올 때 그는 동굴의 석벽에 친필로 이런 글을 남겼다.

“독일의 레코크(AlbertvonLeCoq, 탐험가)가 쓴 신강 문화보물고에 관한 책과 영국의 스테인(Sir Aurel · Stein)이 쓴 서역의 고고학 유적에 관한 글을 읽고 신강에 고대 예술품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신강에 가서 답사할 생각을 갖게 되였다. 그래서 1946년 6월 5일 홀몸으로 이곳에 와서 수두룩한 벽화를 보게 되였으며 모두 고상한 예술가치를 가지고 있어 우리 나라 여러 지역의 동굴이 비할 바가 아니였다. 그러나 가석하게도 대부분 벽화들이 외국의 고고학 발굴대에 의해 략탈되여갔는바 참으로 문화사의 하나의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곳에서 수폭의 벽화를 유화로 모사하고 14일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준비를 다시 충분히 해서 이듬해 4월 19일 조보기, 진천, 초국강, 손필동을 데리고 두번째로 이곳에 왔다. 우선 번호를 매기고 75개의 석굴에 대해 기록했으며 나중에 모사와 연구, 기록, 촬영, 발굴을 진행하였다. 6월 19일에 잠시 한단계 마무리를 하게 되였다. 고대문화를 발양하고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하여 참관하는 이들이 특별히 애호하고 잘 보호하며 관리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그 옆에 보충으로 또 한마디의 글을 적었다. “마지막에 13호 동굴 아래에서 하나의 완전한 동굴을 발견하였다. 벽화가 신기하여 번호를 특1호로 매겼다.”

7월 한락연은 적화로 돌아와서 스무번째이자 그의 일생에서 마지막으로 되는 유화전을 열었다. 전시 내용은 매우 풍부해 신강 남부 지역 소수민족들의 풍도인정을 담았는가 하면 또 얻기 힘든 키질천불동의 모사도 있었는바 서북 각계 인사들의 호평을 받았다.

6. 민족단결의 모범

한락연은 인민의 화가이며 영원히 인민군중들의 마음속에 살아있다. 인민군중은 그의 작품의 원천이였다. 발표된 한 문장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나는 시종 위대한 자연과 광대한 대중들로부터 과거를 학습하고 현실을 관찰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그는 “풍경과 정물만 그릴 수 있고 빈한한 대중을 그리지 못한다.”는 국민당 당국의 금지령을 아랑곳하지 않고 서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로동생활을 열정에 넘쳐 화폭에 담았다. 그가 창작한 회화예술은 당시 서북 여러 민족 인민들의 로동생활의 진실한 반영이였다. 그는 한족로동자가 천란철도를 건설하는 장면을 화폭에 담았으며 위글족목민이 방목하고 까자흐족녀성이 양털실을 뽑고 장족녀성이 물을 지고 있는 장면, 몽골족녀성이 양털을 깎고 회족농민이 관개하는 장면 등 여러 민족 인민들의 로동생활 모습을 생동하고 진실하게 화폭에 담아냈다.

한락연은 무신론자로서 래세나 천당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소수민족들의 풍속습관과 종교적 감정을 존중하였으며 특히는 종교문화에 내포한 예술성과들에 대해 아끼였다. 그래서 한락연은 타얼사와 묘회를 그렸으며 또 청진사와 이맘(이슬람교의 례배 인도자)를 화폭에 담았다. 그는 해방전 여러 민족 인민들의 가난한 생활과 락후한 모습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현했으며 찬란한 미래가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한락연은 서북에서 오래동안 생활하면서 가는 곳마다 당지의 여러 민족 군중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의 생활을 관심하였다. 처음으로 키질에 갔을 때 당지의 위글족군중들에게 약품이 없는 것을 발견한 그는 두번째로 갈 때 많은 약품을 사서 가지고 가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다. 이렇게 두달 있는 동안에 200여명의 백성들을 치료해주었는데 어떤 백성들은 수십리 떨어진 먼 곳에서 도보로, 혹은 나귀를 타고 와서 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병을 봐주면서 또 위생상식과 질병예방지식도 가르쳐주었다. 서북에 있을 때 한락연은 당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지지와 협조를 받았다. 그가 두번째로 키질에 갔을 때 위글족 집주인은 마치도 오래동안 갈라졌던 친우를 만나듯이 기뻐하면서 제일 좋은 방을 그에게 내주고 집주인 식구들은 지붕도 없는 다른 방에 가서 생활했다. 이를 안 한락연은 그 자리에서 그들에게 돈을 주어 지붕을 덮을 나무를 사오게 했다. 이 집의 로인은 또 한락연이 유적을 발굴하는 일에 길잡이로 적극 나서기도 했다. 한락연 일행이 일하다가 휴식하는 시간이 되면 위글족농민들은 한데 모여 하모니카도 불고 호금도 치면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한락연 일행이 떠나올 때 위글족농민들은 몹시 아쉬워하면서 이들을 키질진까지 바래주었다.

동란의 세월에 복잡한 민족관계 앞에서 한락연이 서북의 여러 민족 인민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수시로 그들과 우정을 나누고 협조를 받은 것은 매우 쉽지 않은 일이다. 이에 대해 한 국민당 고위 인물은 매우 탄복해하면서 이렇게 감탄했다. “만약에 신강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처럼 처사한다면 민족 사이에 생긴 그 어떤 골도 메울 수가 있을 것이다.”

한락연은 한 문장에서 신강 문제에 대해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내가 보건대 신강은 결국에는 신강 인민들이 다스리고 건설해야 한다. 만약 그들에게 지식이 부족하다면 신강은 영원히 락후할 것이며 그들은 영원히 외래세력들의 유혹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은 영원히 신강은 중국의 한개 성이라는 것을 모를 것이다. 때문에 신강에는 비단 의료지원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교육지원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당시 국민당 신문에 그가 자신의 견해를 전면적으로 표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러나 외부세력들을 반대하고 국가의 통일을 수호하려는 생각은 견정하였다.

1947년 7월 30일 한락연은 국민당 275호 군용기를 타고 적화를 출발해 란주로 떠났다. 그러나 그는 란주에 도착하지 못했다. 친인들은 그가 와서 한데 모일 수 있기를 고대했으며 벗들은 그와의 상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한락연은 란주에 이르지 못하고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8월 6일, 《감숙민국일보》는 비행기가 7월 30일 적화에서 출발해 점심에 하미에 도착한 후 계속해서 동쪽 방향으로 날아갔으며 그리고 두시간 후 지면과 련계가 끊겼다고 보도했다. 후에는 또 “악천후로 가욕관 상공에서 추락되였다.”는 말도 떠돌았다. 그러나 그 후 사고 현장에 대한 보도는 없었으며 또 그 어떤 유품도 보내오지 않았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믿기 어려워했으며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바 력사의 수수께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락연이 불행히 조난당했다는 소식은 서북 각계를 놀라게 했다. 국내의 영향력이 있는 많은 신문에서도 이를 보도했다. 10월 30일 서북의 각계 인사들은 란주에서 추도식을 열고 인민예술가 한락연을 추모했다. 한락연은 일찍 신강 고고학 발굴 5년 계획이 있었으나 이를 실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오래전부터 바라던 서북의 해방을 보지 못했으며 이를 위해 분투해왔던 새 중국의 탄생을 보지 못하고 돌아갔다.

전국이 해방된 후 당과 정부에서는 한락연을 혁명렬사로 추인하였으며 그의 200폭에 가까운 유작들이 중국미술관에 소장되였다.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한락연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북경에서 한락연 유작 전시를 가졌다. 전국 여러 민족 인민들은 혁명가이며 예술가인 한락연동지를 영원히 그릴 것이다.

/번역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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