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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70]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에 대한 사랑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15 13:57:36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70](정판룡편5)

구술자 김호웅: 연변대학교수, 박사생 도사,정판룡의 제자, 작가.

오늘은 정판룡선생이 보여준 스승에 대한 존경과 제자에 대한 사랑의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사실 교육이라는 건 제자에 대한 스승의 애(爱), 스승에 대한 제자의 경(敬)이 서로 합쳐질 때 제대로 이루어지는 법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저는 정판룡선생께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스승에 대한 지극한 존경이라고 봅니다. 자기 스승을 존중했기에 정판룡선생 또한 제자들의 깊은 존경을 받았지요. 말하자면 정판룡선생이 왜 제자들의 일치한 존경과 숭앙을 받았느냐? 자기 스승을 섬길 줄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어제도 이야기했지만 림민호선생은 연변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한 선구자의 한 분입니다. 지금 말로 하면 공청단조직의 최고 지도자였지요. 그리고 후에는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가서 공부했고 조선 함흥에 가서 지하활동을 하다가 일경한테 잡혀서 서대문감옥에서 7년동안이나 옥살이를 하셨어요. 광복 후 돈화를 거쳐 연길에 오셔서 연변일보사 총편을 거쳐 연변대학 부교장으로 일했어요.

림민호 부교장이 여러 제자들을 사랑했지만 그 중에서 정판룡선생을 눈박아 보고 특별히 총애하셨어요. 정판룡선생을 키워주고 모스크바류학을 시켜준 분이지요. 정판룡선생네 내외는 금방 연변에 돌아왔을 때 일본군의 마구간을 고쳐 만든 집에서 사셨어요. 하루 세끼 아궁이에 불을 지펴야 하는데 왕유선생은 남방에서 나서 자라다보니 아궁이에 불을 지필 줄 모르거든요. 림민호선생이 직접 부엌에 내려가서 풍구줄을 메우고 불을 지피는 법을 가르쳤다는 일화가 지금도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판룡선생은 림민호 교장을 잊지 못하지요.

림민호 교장의 일대기를 제일 먼저 쓴 분이 정판룡선생입니다. 제가 《이 세상 사람들 모두 형제여라》는 림민호평전을 썼는데 만약 정판룡선생의 그 글이 없었더라면 쓰지 못했을 겁니다. 정판룡선생이 림민호 부교장을 가장 존경했고 “곡절많은 인생”이라는 전기를 썼을 뿐만 아니라 연변대학 중앙도서관 옆에 림민호동상을 세우는데도 제일 먼저 발기를 했고 앞장을 섰어요.

연변대학교정에 세워져있는 림민호동상

선생은 2001년 10월 7일에 세상을 떴는데, 세상을 뜨기 전에 김병민교수와 저를 앉혀놓고 유언을 남기셨어요. 내가 죽거든 내 골회 한줌이라도 림민호 교장의 동상주변에 뿌려달라고 말입니다. 이 동상은 연변대학 캠퍼스에 있는데 거기다가 제자의 골회를 뿌린다는 것은 안되지요. 그래서 우선 가족하고 물어 보았어요. 그랬더니 가족에서 하는 얘기가 “우리 아버지가 평생 정판룡선생을 제일 좋아했고 믿었는데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니 학교 하고는 말하지 마십시오.”하고 허락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침에 호미 한자루를 가지고 동상주변을 돌아가면서 홈을 치고 새하얀 정판룡선생의 골회를 뿌린 거예요. 뿌리면서 우리도 생각했어요. 두 어른께서 하늘나라에서 이제부터는 오손도손 이야기를 하리라…

정판룡(왼쪽 두번째)선생과 김창걸(왼쪽 첫번째), 설인(오른쪽 첫번째),현룡순(오른쪽 두번째) 등

연변대학의 원로 교수들

김창걸선생의 문학종사 50주년 기념학술대회도 정판룡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저기 룡정 명동촌 옆에 장재촌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거기에 김창걸문학비가 있습니다. 정판룡선생과 권철선생이 발기를 했고 보란듯이 자기 스승의 문학비를 세운 거예요. 세상을 뜨기 몇달전에 김병민 교장을 보고 장재촌에 가서 선생님한테 하직을 고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김병민 교장이 차를 내서 모시고 가서 김창걸문학비에 절을 하고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스승인 김창걸교수의 문학비앞에서 제자 김병민교수와 함께.

스승에 대한 존경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였지요. 특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북경대학의 계선림교수를 평생 스승으로 섬겼어요. 저도 한번은 북경대학에 정판룡선생을 모시고 가서 계선림교수께 저녁식사대접을 한적 있어요. 정판룡선생은 다른 장소에서는 굉장히 활기를 띄고 롱담도 잘하셨는데 거기서는 옆에서 깍듯이 모시고 경청만 하는 모습을 보고 크게 놀랐어요. 사실 계선림선생은 동북에 정판룡이라는 학자가 있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하고 인정을 한 거지요. 계선림선생이 그랬어요.

“동북에는 정판룡이가 있다. 잔소리 하지 말아라. 너희들을 모두 모스크바에 보냈는데 정판룡이 제1호박사가 아니더냐? 정판룡은 우리 나라의 우수한 외국문학분야의 학자이다. 조선언어문학의 본산지가 연변대학이고 거기에 정판룡교수가 있으니까 연변대학 조선언어문학학과에 박사학위 수여권을 주는 건 너무나도 당연하다.”

이 어른이 이렇게 한마디 딱 하니까 연변대학에서 1986년도에 국내 처음으로 조선언어문학박사점을 설치하게 된 거지요.

2001년 4월의 일입니다. 《장백산》잡지사의 남영전선생이 장백산문학상 을 설치했어요. 두분한테 드리는 거예요. 하나는 김학철, 하나는 정판룡선생이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보란듯이 북경에서 시상식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북경에 있는 민족사무위원회 회의실에서 시상식을 가졌는데 김학철선생은 림종이라 참가하지 못하고 아드님인 김해양선생이 참가하였습니다. 정판룡선생은 내외분 모두 참가하셨습니다. 시상식을 마치고 나서 정판룡선생이 부인하고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계선림교수를 만나러 가자… 언제 다시 뵙겠는가? 언제 또 계선림선생과 마지막 작별을 고하겠는가? ”

계선림선생께 전화로 여쭈었더니 어서 오라고 해서 북경에 있는 여러 제자들이 정판룡선생을 모시고 계선림선생네 댁을 방문하였지요. 그리고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고 문밖으로 나오는데 계선림선생께서 대문앞까지 나와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더래요.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정판룡, 너무나도 훌륭한 인간이고 아까운 학자이다. 하늘도 무심하다. 정판룡교수를 너무 빨리, 나 먼저 보내는게 가슴이 아프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손등으로 눈굽을 훔치더랍니다.

연변대학에 온 계선림교수(오른쪽 첫번째).

계선림선생은 북경에 계시고 한족학자인데 연변의 한 조선족학자와 몇십년을 하루와 같이 사제사이로 지냈죠. 마지막 세상을 뜨기 전에 다시 한번 찾아가서 스승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는 것, 이게 바로 정판룡선생의 매력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정판룡선생이 왜 이토록 존경을 받는가? 제가 정판룡선생 탄신 80주년 기념행사때 말씀드렸지만 우리 모두가 정판룡선생을 그리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분의 지극한 제자사랑에 있다고 봅니다.

 
정판룡교수의 제자들인 김봉웅 김호웅 리해산교수 

정판룡선생이 아니라면 제가 일본류학을 할수 있었겠어요? 국제전화 하나 칠줄 모르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정판룡선생은 한국의 동훈선생 등 여러분들의 후원을 받아 가지고 해마다 34명의 젊은 학자들을 일본, 미국 또는 한국에 보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도 1989년10월에 일본 와세다대학에 가서 1년반동안 방문학자로 공부할 수 있었지요. 그때 선생께서 키워준 젊은이들이 대성해서 연변대학의 교장이 되고 원장이 되고 각 학과의 선줄군이 됐어요. 제 생각에는 한 30명가량 보낸 것 같아요.

1998년 한국, 일본에 보낸 제자들과 함께.

이번에 제가 정판룡선생의 제자사랑을 가지고 사랑과 믿음의 기적이라는 칼럼 하나를 썼는데 길림신문(사)에서 큰상을 줘서 너무 감사해요. 이 자리를 빌어 재삼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각설하고, 제가 그 칼럼에서 이야기를 했지만, 정판룡선생은“젊은이면 실수를 할수 있다. 흔들리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며 좌절과 실패를 하지 않은 젊은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한번 실수하고 좌절을 했다고 해서 단매에 때려죽인다면 이 인간은 영원히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선생님은 약한 녀자, 이상한 제자, 실수를 저지른 제자들을 특별히 껴안고 다시 “동산재기”의 기회를 마련해주었지요.

제자들을 무랍없이 따뜻이 안아주는 정판룡교수.

대학시절은 한창 이성에 눈을 뜨고 련애하는 시절이 아닙니까? 이때 많이 실수를 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때의 학교규정제도나 고정적인 관습으로 본다면 이런 애들은 처분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정판룡선생은 그때마다 실수나 잘못을 저지른 젊은이들을 구해주군 하셨지요.

하루는 정판룡선생이 강의에 나가려고 치솔질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립니다. 그래서 문을 열어보니 두 젊은 남녀가 들어오더니 넙죽 절을 하는 거예요. 보니 얼굴에 눈물이 비오듯 합니다. 남학생이 그래요, “선생님, 제가 이 학생을 좋아하는줄 아시죠? 그런데 어쩌지 않았는데 이 애가 지금 임신이 됐답니다.”

“허, 큰일 났군, 난 지금 강의하러 나가는 중이야. 몇십년동안 대학에서 강의를 했지만 너희들 같은 학생들을 처음 본다. 내 강의를 끝내고 돌아올 테니까 저녁에 한번 와.”

저녁에 문을 떼고 들어섰더니 두놈이 납작 엎드리고 선생님을 기다리는 거지요.

“어허, 이를 어쩌지? 이 일을 너 아버지께서 아시냐?” 하니까 남학생이 그래요.

“저의 아버지가 모릅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귀뺨 맞습니다. 집에서 쫓겨납니다.”

“이놈아! 아버지 귀뺨 하나 맞는 게 대단하냐? 귀뺨을 맞더라도 이실직고해라, 아버지께 부탁을 해서 얘는 일단 강건너로 보내거라. 고모집에 가서 아이는 낳는 거다. 그리고 너는 돌아와서 공부를 해라. 1년후에 아이를 다시 데려오고 너의 친구는 복학을 시켜라...”

그 방법대로 한 거지요. 그래서 귀뺨을 맞고 강건너에 맡긴거죠. 아, 그런데 이 애가 커서 공부를 너무 잘하거든요. 연변1중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추천을 받아서 북경대학에 입학했어요. 또 북경대학에서 공부를 잘해가지고 토플시험을 보고 미국의 어느 유명한 대학에 갔던 모양이예요. 거기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의 어느 국립연구소의 연구원이 되였어요. 이 남학생이 후에는 연변문학예술계의 큰 어른이 됐는데 저를 보고 이렇게 말하군 했어요.

“정판룡선생이 아니였더면 우리 아들놈이 있을 수 없어, 우리 내외는 아들놈이 초청해서 요즘도 미국을 다녀왔지…”

2000년도 연구실에서 서일범 강순화선생과 함께

정판룡교수와 그의 박사생제자들.

지금 연변대학 조문계(학부)에 재직하고 있는 중년교수의 이야기인데, 이 친구가 연변사범학교에 다니는, 한 마을의 처녀와 련애를 하였어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택시가 없었던 시절이라 공원에 들어가 얘기를 하고 갈라지자고 보니 어느 새 밤은 깊었고 저 아래 개방지에 있는 사범학교까지 보낼 수 없었어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이 토요일이란 말이에요. 그럼 남학생 숙사가 비지 않겠어요. 그래서 슬그머니 처녀와 함께 남학생 숙사에서 잔 거예요. 둘이 머리는 반대쪽으로 놓고 이렇게 잤대요. 아, 그런데 저 구석에 있는 침대에 남학생 하나가 있었어요. 카텐을 치고 누워 잤는데 누구도 없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이 학생하고 둘이 라이벌이야. 이 학생이 고자질한 겁니다. 아, 우리반의 서기라는 자식이 좋아하는 처녀를 끼고 남학생숙사에서 련애를 했다, 이겁니다. 이 일이 보고되니까 학교에서는 퇴학이다, 무조건 퇴학이라고 하는 거예요. 련애도 못하게 하는 세월에 제가 좋아하는 녀자를 데리고 남학생숙사에 와서 자다니 이건 퇴학이라는 거예요. 학생담당부서에서는 무조건 퇴학이라는 거지요. 방법이 없어 정판룡선생께 보고를 한 거지요. “이거 어떻게 합니까?” 하니 정판룡선생이 그랬대요.

“사랑과 재채기는 참지 못하는 법이야! 나는 쏘련에 가서 공부하면서 결혼까지 했어. 그리고 말이야, 걔들이 돈이 없어서 려관에 들지 못하고 잠간 남학생숙사에서 눈을 붙였겠지. 설사 하루밤 같이 잤다 해도 그 녀석의 고추가 여물었겠어? 다들 모르는 것처럼 해라…”

이 말씀이 학교의 학생담당부서에 전달이 되였어요. 아, 연변대학의 제일 유명한 교수가 이런 롱담을 하니까 어쩔수 없지요. 그래서 풀어준 거지요. 이 친구는 후에 박사가 되고 교수가 되였어요.

 
1997년 가을 제자, 동료들과 함께 화룡시 선경대에서.

하나 더 재미있는 것은 김병민교수가 박사공부를 할 때 하도 살림이 구차해서 설인사를 갈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박사학위공부를 할 때라 도무지 술을 살 돈이 없는거예요. 그래서 시중에 나온 불개미술을 한병 들고 설인사를 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식사대접을 받고 나오는데 정판룡선생께서 “설련휴니까 고향에 가겠지?” 하시더래요. 김병민선생의 고향이 저 흑룡강성 녕안 향수, 귀한 쌀이 나오는 동네가 아닙니까? “자네를 자식처럼 키워준 형님이 계시는데 빈손으로 갈수는 없지.”하시더니 왕유녀사를 보고 술과 담배를 가져오라고 해요. 귀한 모태주 한병에 봉황표담배 한보루를 주더래요. “자네를 공부시키는 형님께 대접하게”하면서 말입니다. 그걸 가지고 고향에 간 거예요. 형님은 그 마을 조선족중학교 교장입니다. 시골교장이 모태주를 봤겠어요? 그런데 연변대학 교장선생이 보낸 모태주에다가 봉황표담배이니까 온마을 사람들을 돌아가며 다 청하더래요. 청해놓고는 술을 딱 알각잔으로 한잔밖에 안 주더래요.

“야, 모태주다, 대학교의 교장선생님이 보내주셨다. ”

한병을 가지고 온동네 잔치를 다 했대요.

정판룡교수와 그의 제자이며 원 연변대학 총장이였던 김병민교수.

이걸 보면 정판룡선생이 자기가 젊었을 때 림민호 교장 같은 분들이 키워준 일을 늘 생각했고 자기가 큰 다음에는 제자들을 품어주고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수 있죠. 참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정판룡선생님의 이야기만 나오면 지금도 고개를 숙이고 그분을 추앙하는 거지요. 특히 병환에 계실 때 이분이 졸업시키지 못한 두 제자를 두고 늘 근심하셨지요. 그래서 일일이 불러서 론문을 어떻게 수정, 보완해야 한다고 가르쳐주었을 뿐만아니라 김병민교수를 불러놓고 “문일환, 리광일이 아직 졸업하지 못했다, 좀 미숙하지만 졸업시켜 달라. 그리고 내가 론문답변회에는 참가하지 못하겠지만 이러이러한 방면을 조금 수정, 보완하면 훌륭한 론문이 될 것 같다.” 그렇게 부탁을 하고 나중에 “장학금을 내 살아 생전에 한번 더 주고 싶다”고 해서 병상에서 5명의 학생을 선발해서 일일이 장학금을 주고 손을 잡아주고 눈을 감은 거지요.

 
정판룡교육발전기금회 장학금발급식.

이런 점을 볼 때 저는 해방후 조선족교육계에 이런 훌륭한 어른이 계셨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길림신문 글 구성: 안상근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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