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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127] 연변의 사과고향 대소과수농장의 토박이가족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08 16:02:22 ] 클릭: [ ]

올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부모님 산을 찾아 고인들의 명복을 빈 박금석 형제자매들

올해 추석에도 어김없이 고향을 찾아 조상들의 무덤 앞에 술을 붓고 제를 지내며 고인들의 공적을 기리는 박금석(76세), 박금룡(65세) 형제는 대소과수농장마을을 굽어보며 감회가 깊었다. 최근 들어 빈곤부축사업이 초요건설사업의 주요과제로 떠오르면서 80년대이전까지 연변의 유일한 사과농장이였던 대소과수농장건설을 두고 매체에서 론의가 오가는 가운데 일부 잘못된 력사기록 때문에 두형제는 “잘못 된 력사는 바로잡아야 한다”며 나섰던 것이다.

원조 사과나무 임자는 외할아버지 리도원

“대소과수농장의 원조사과나무를 두고 일부 력사를 모르는 사람들이 무슨 허씨 성을 가진 지주가 서울에서 가져왔다고 말하는데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박금석씨는 대소마을에 원조 사과나무를 심은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외할아버지 리도원(李桃源)이라고 확실하게 밝혔다.

12살 때부터 물동이로 두만강물을 길어 원조사과나무를 키웠던 어머니 리순금.

“1936년에 외할아버지가 고향인 조선 길주에 갔다가 일본에서 들여온 사과묘목을 가져다 1.5헥타르 되는 밭에 심었습니다. 사과묘목을 직접 심은 것이 아니라 북방의 겨울날씨에 단련이 된 야산의 ‘알구배(山定子)’나무그루에 사과묘목을 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과종류로는 국광(国光苹果), 황원수(黄元帅), 홍원수(红元帅) 외에 또 한가지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그 이름은 모르고 있고 사과나무 외에도 조선 회령에서 들여온 복숭아나무, 살구나무도 있었다고 합니다.”

외할아버지네가 두만강을 건너온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이주초기 지금의 대소마을 북쪽 ‘금박골’이라는 깊은 골짜기에 땅굴막을 짓고 땅을 뚜져 감자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그렇게 감자농사를 지어서는 겨울에 감분국수를 눌렀고 강판이 얼면 국수를 등에 지고 20리 산길을 넘어 탄광마을에 가져다 팔아서는 돈을 만들군 했다고 한다.

그렇게 10여년을 아글타글 모은 돈으로 대소마을 평지의 비옥한 땅을 사들였는데 사과묘목을 들여오던 그 해에 외할아버지께서는 그 좋은 평지 밭과 산밑의 ‘도투구렁덩'이라는 형편없는 돌밭을 맞바꾸었다고 한다. 그 때는 외할아버지의 그 ‘타산'을 누구도 알 수 없는지라 사람마다 입을 딱 벌렸지만 먼 후날 알고 보니 그 산밑 돌밭은 대소마을에서도 기온이 가장 높은 곳이였다고 한다.

외가집 원조사과이야기를 들려주는 박금석(왼쪽), 박금룡(오른쪽) 형제분들.

그렇게 돌밭을 차지한 외할아버지는 밤낮이 따로 없이 아들을 데리고 밭의 돌을 주어내며 제전을 만들었고 하루에 팔토시 하나씩 닳아떨어져 나가면서 밭을 가꾸고 또 가꾸었던 것이다. 그맘 때 1925년생으로 대소마을에서 태여난 열두살 나는 어머니 리순금마저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작은 물동이로 두만강물을 길어서는 사과묘목에 물을 주며 정성껏 사과나무를 키웠다고 했다. 그렇게 봄가을로 물을 길어올린 세월이 몇년을 흘렀는지 모른다.

박금석씨는 외가집에서 그토록 애써 가꾸어낸 ‘도투구렁덩'이란 과수원이 지금은‘로과수원'이라고 여전히 불려지고 있지만 “원조사과나무를 한그루도 살려 내지 못한 것이 가장 가슴 아프다.”고 안타까와 한다. 한평생 과수를 해온 ‘전문가'로서 사과나무의 수명이 일반적으로 50년좌우인데 그 때 사과나무를 지금까지 살려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외할아버지네가 야산의 ‘알구배’나무그루에 사과묘목을 접했던 방법만큼은 사과나무의 과동과 수명을 연장하는데 가장 리상적인 방법이였다고 한다.

대소과수농장의 첫 선견대 대장

“60년대초에 주덕해 주장께서 우리 마을에 오실 때에는 삼합쪽으로 짚차를 타고 오셨어요. 그쪽 길은 1958년 대약진시기에 이미 개통이 되였는데 개통식이 있던 날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처음으로 해방표자동자가 마을에 들어오는 걸 경축했지요. 그런데 그때 서쪽으로 대소마을과 백금사이에는 길이 없었습니다.”

명동, 백금 두지역 농민들이 3년간 닦은 백금도로.

“그 곳은 깊은 강물과 높은 산이 맞닿인 곳이라 사람이 어떻게 닿을 수 없는 지형이였는데 그 산우의 펑퍼짐한 곳에 마침 로과수원이 위치하여 있어 주덕해 주장께서는 마을의 리하린 서기의 안내를 받으며 얼어붙은 강판으로부터 가파른 산을 톺아 로과수원을 둘러보기도 하였지요.”.

당시 주덕해주장께서는 로과수원을 지키던 농민집에서 김치독에 보관해두었던 사과를 직접 맛보고 대소마을을 국영과수농장으로 건설하여 연변인민들이 사과맛을 볼 수 있도록 결정을 내리기까지 외가집 로과수원의 사과는 너무나 맛과 향이 좋았다고 했다.

주덕해 주장께서는 늘 연변조선족자치주 농업처 개간국 권필주 과장과 함께 대소마을로 다녀가시군 하였다고 한다. 그분들이 다녀가시면서 1963년부터 산바위에 대남포질을 하여 대소와 백금사이의 길을 개통하였고 이듬해에는 대소과수농장을 세웠으며 1965년도에는 또 마을에 전기를 끌어들였다고 한다.

1964년 4월 19일, 대소국영과수농장이 세워지면서 주덕해 주장께서는 한해에 열번도 넘게 대소마을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또 료녕성의 과수전문가 관치승을 기술원으로 배치해주셨고 권필주 과장은 나중에 아예 대소과수농장의 농장장으로 되여 친히 농장건설에 몸과 마음을 다 바쳤던 것이다.

1965년 대소과수농장 단지부간부로 활약했던 박금석(뒤줄 오른쪽 첫사람).

대소과수농장을 설립한 첫해에 마을에서는 7명의 선견대를 선출하였는데 그때 박금석씨는 선견대 대장을 맡았다. 그는 당시 관치승기술원과 함께 과수재배기술을 연찬하던 정경을 떠올렸다. “관치승기술원은 북방의 기온에 맞게 사과나무를 재배하기 위해 ‘알구배’나무뿌리에 해당(海棠)나무를 먼저 접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해당나무가 가지를 뻗으면 또 그 가지에 사과나무를 접했지요. 그렇게 3층으로 접한 고접묘(高接苗)사과나무는 동해를 적게 받고 열매를 빨리 맺었습니다.”

이렇게 사과재배기술관을 넘고 대련, 심양, 집안 등지에서 여러 가지 사과묘목을 들여다가 3년사이에 700헥타르되는 과수원을 건설하였다. 당시 대소과수농장의 간부와 군중들은 한결같이 뭉쳤고 그 생산열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애목을 심어서 3년, 4년간은 봄이면 봄마다 가을이면 가을마다 농장인들은 줄을 지어 물동이를 이고 지게를 지고 두만강물을 퍼날라 매 사과나무마다에 물을 주며 가물을 방지하였다. 그 노력이 10년이 되면서 대소과수농장은 대흥성기를 맞아 로씨야로, 동북 각지로 사과판로가 열리면서 대소과수농장은 말그대로 하나의‘무릉도원'으로,‘북방의 강남'으로 거듭났던 것이다.

지난해 겨울 1964년 대소과수농장이 설립된 첫해에 ‘알구배’나무 뿌리에 사과묘목을 접해 키운 사과나무 두그루를 발견한 박금석과 그의 딸.

“그 때는 대소골에 들어서기만 하면 마을과 2리쯤 떨어진 곳에서도 사과향기가 물씬 풍겼습니다. 고향마을은 정말 풍성하고 흥성한 곳이였지요. 소학교로부터 중학교, 고중반까지 300여명 학생들이 있었습니다. 연변 각지에서 청년들이 농업로동자로 모집되여 왔고 현문공단 못지 않은 선전대도 꾸렸으며 단독 영화방영대도 갖추고 풍부한 문화생활을 누렸습니다.” 대소과수농장 문화선전분야의 주력일군으로 활약하였던 박금룡씨는 그제날의 대소마을의 풍경을, 그리고 주덕해 주장과 권필주 농장장을 비롯한 대소농장건설에 청춘을 바친 많은 간부와 군중들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고향을 찾은 걸음에 룡정시화룡대소사과전업농장유한회사의 사과고추장 생산흐름선을 참관하는 가족들

1980년까지 이 농장마을의 주력군으로 대소과수농장에서 맹활약을 하던 박금석씨는 연변농학원 과수학부 기술원으로 초빙되여 갔다. 박금룡씨 역시 연길시정부로 전근하게 되면서 그들은 고향마을을 떠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상들의 뼈가 묻혀있고 또 자신들이 태를 묻고 자란 고향마을을 그들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대소농장 사람들이 외가집 사과나무덕분에 시골마을 농민들이 국영농장 로동자로 운명을 바꿨고 평생 퇴직금까지 받고 산다며 기념선물을 마련해주던 일도 잊지 않고 있었다. 1996년에 어머니 리순금씨가 세상뜨자 그들 형제들은 이듬해에 부모님의 무덤앞에‘사과고향의 어머니'라는 묘비를 세우고 해마다 청명과 추석이면 때를 어길세라 어머니산, 고향산에 오르고 있었다.

/길림신문 김청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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