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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69]다문화주의의 사고방식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10-06 11:30:19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69](정판룡편4)

구술자 김호웅: 연변대학교수, 박사생 도사,정판룡의 제자, 작가.

정판룡선생이 가졌던 다문화주의의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좀 말씀드려야 할것 같습니다.

앞에서도 말씀을 드렸지만, 정판룡선생은 왕유라는 한족녀성과 함께 평생 행복하게 살았고 또 왕씨가문의 큰 사위로서 처신을 잘 했습니다. 선생은 젊은 시절에 모스크바에 류학을 가셨고 쏘련이라는 다민족국가에서 살았던 경험을 가지고 있지요. 선생이 가장 존경했던 림민호 교장 역시 1930년대 초반에 모스크바 동방대학에 가서 공부를 했어요. 동방대학이라는 것은 세계 약소국가들의 혁명자들을 키워주는 대학입니다. 거기서 여러 민족 혁명가들과 어울리면서 다문화적인 사고방식을 가졌던 거지요. 정판룡선생은 림민호 교장의 영향을 받아 다문화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게 된 것 같습니다.

정판룡선생은 1990년대부터 조선족문학의 이중성격이라는 훌륭한 론문을 펴냈고 이를 보통 백성들이 알아듣기 쉽게 비유를 했지요. 이게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며느리론입니다.

선생은 말합니다.

“우리 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중국대륙에 온 조선의 딸들이다. 한국의 딸들이다. 그런데 딸이 중국에 와 가지고 열심히 시집살이 하지 않고 남편하고 빡빡 대들고 시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못된 짓만 한다면 시집마을에서 이 며느리를 고와할리 만무하다. 이와 반대로 성심성의로 시집살이를 하면서 시부모를 공경하고 남편을 받들면서 이쁘게 논다면 시집마을에서 이 며느리를 인정할 것이다. 우리 가문에 보배가 들어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시부모가 나서서 사돈집을 도와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셨어요.

저는 이걸 아주 근사한 비유라고 봅니다. 우리 조선족들이 중국 주류사회에 얹혀서 밤낮 얻어만 먹고 칭얼대기만 하면 꼭 이방인으로 몰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류사회에 적극 개입해가지고 좋은 일을 많이 하자는 말이지요. 사실 우리 조선족들은 항일전쟁과 3년 국내전쟁 때 가장 많은 희생을 치렀지요. 또 동북의 논을 개발해서 동북의 량곡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높였지요.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존중을 받고 중화인민공화국의 당당한 공민으로 대접받는 거지요. 그래서 선생은 “좋은 며느리가 되자”는 얘기를 많이 하셨어요.

1963년 정판룡교수 부부가 아들애의 백일을 기념하여 어머니와 함께 남긴 사진.

정판룡선생은 모스크바에서 왕유선생을 만나가지고 중국에 돌아온 후 우선 상지에 있는 어머니를 모셔옵니다. 그 다음 처가집 식구들을 만나러 무석으로 가는 거예요. 거기서 처가집 친척들에게 인사를 드렸어요. 그런데 이 왕유녀사의 댁을 보니까 아버지는 기술자입니다. 호광제2공장이라고 호수 호자에 빛 광자인데 이 공장에서 정년퇴직을 해가지고 1983년도에 세상을 떴는데 유명한 기술자예요.

국민당시절부터 국민당병기공장에서 제도, 즉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부인하고 사이에 8명의 자식을 두었어요. 저의 아버지도 8남매를 두었습니다만, 왕유선생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항일전쟁이 일어나자 공장이 이전됨에 따라 무석에 있다가 남경에 갔고 거기서 또 광서 계림으로,다시 중경으로... 이렇게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자식 여덟을 낳아 키웠어요. 이 여덟 자식이 다 똑똑하고 공부를 잘했어요. 여기서 몇 사람만 보면 복단대학 부총장을 지낸 중국의 유명한 수학가인 엄소중선생은 정판룡선생의 아래 동서입니다. 그의 부인 왕산은 왕유와 함께 모스크바류학을 했는데 모스크바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후에 상해에 돌아가서 복단대학 물리학교수로 되였어요. 이 집안을 보면 절반 이상이 대학교 교수가 아니면 대형기업의 기술자들입니다. 이런 훌륭한 가문에 조선족사위가 들어간 것입니다. 애초에 왕유녀사는 정판룡선생을 만났을 때 사람은 참 똑똑하고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데 너무 촌스럽게 생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흑룡강 상지에서 온 촌놈이 아닙니까. 정판룡선생은 또 몸을 그다지 가꾸지 않는 타입이예요. 그러니까 처가집에서 얼마나 촌놈으로 보았겠어요. 그러나 일처사하는 것을 보니까 어느 자식보다 나은 거예요. 이 집에서는 정판룡선생이 항렬로서는 둘째인 왕유의 남편이지만 왕유의 오빠까지 다 정판룡선생을 판룽거(判龙哥)라고 부른답니다.

1992년 정판룡교수 처가집 형제자매들이 로모의 85세 생일을 맞아 모였을 때 남긴 사진.

여기서 두가지 얘기만 하겠는데, 하나는 처가집 가문의 자식들이 모두 출세하다 보니까 전국 여러 도시에 취직해 일하는 거예요. 점점 그들도 나이가 들고 하니까 어머니 보러 무석에 잘 오지를 않아요. 여덟자식이면 부부까지 열여섯명이나 되는데 설이 와도 기껏해야 서넛밖에 안 오는거예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조금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거지요. 특히 한족들은 막내가 부모를 모시지 않아요? 그러니 막내동생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어요. 아버지도 세상을 뜨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85세까지 모시는데 설이 되고 일년이 다 가도록 오지 않는다, 그런 섭섭한 눈치를 보이는 거지요. 그래서 정판룡선생이 하루는 열여섯명 형제들한테 공문을 낸 거예요. 아니, 일일이 전화를 했지요. 이번 설에는 무조건 무석에 가서 어머니를 모시고 설을 쇤다, 특별한 사유가 없이 오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짐짓 으름장을 딱 놓은 거지요. 그랬더니 설에 하나도 빠지지 않고 다 온 거예요.

1991년 음력설 정판룡교수 부부가 무석에서 장모님을 모시고.

정판룡선생이 형제자매들을 앉혀놓고 이야기했지요. 중국공산당 당원인 사람은 손을 들어 보아라 하니까 다들 손을 들더래요. 그럼 당원이 아닌 사람이 손을 들어보라고 하니 한사람도 손을 드는 사람이 없더래요. 나두 당원이고 왕유도 당원이고 우리 모두 당원인데 달마다 당비를 내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모비(母费)를 내지 않았다. 당은 하나의 군체이고 개개인의 실체가 없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여기 앉아 계신다. 어머니는 우리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공부시켜 주었다. 그런데 우리는 당비만 내고 모비를 내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는가? 우리 두 사람은 모두 다 교수이니까 두몫을 내겠다. 너희들은 한몫씩만 내라… 내 말에 동의한다면 박수를 쳐라… 그러니 모두 박수를 치더래요. 모두 여덟가족이 아니예요? 100원씩만 내도 800원, 정판룡선생은 두몫을 냈는데 엄소중 복단대학 부총장이 한몫만 냈겠어요? 두몫 냈겠지요. 그때 월급이 보통 400500원 될 때인데 어머니가 받는 모비는 1000원도 넘었지요. 그러니까 막내동생이 그렇게 좋아하더라고 해요. 사실 정판룡선생이 세상을 뜰 때 마지막 한달은 막내동서가 와서 옆을 지켜주었어요. 한족 막내동서가 와서 림종을 지켜준 거지요. 왕씨가문의 조선족 사위가 굉장히 멋있게 처사한 거지요.

항일전쟁이 끝난 후 중경에서 남긴 왕유교수의 부모님 사진.

두번째는 왕유선생의 아버지, 즉 정판룡선생의 장인어른이 국민당시대부터 병기공장의 기술자였어요. 해방후에 이 병기공장의 이름을 바꾸어서 호광제2공장으로 되였는데 거기서 평생 중요한 기술자로 활약을 했지요. 하지만 력사문제가 있는 거지요. 너는 왜 국민당시절에 무기를 만들었느냐? 그러는 거지요. 그래서 1982년도인가, 1983년도인가 세상을 뜨게 되는데 이 공장에서 추도식을 못하겠다고 해요. 정판룡선생께서 따님 소홍이를 데리고 연변에서 부득부득 무석에 갔는데 이 공장에서 추도회를 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가족에서 사흘동안 눈을 펀히 뜨고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정판룡선생이 형제들을 이끌고 공장 지도자들을 찾아갔어요. 선생은 이렇게 말했어요.

“나도 대학의 부교장이다. 우리가 ‘문화대혁명’과 같은 여러 차례 정치운동을 해서 애매한 사람들을 많이 잡았다. 억울함을 품고 세상을 뜬 사람들이 많다. 오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복권시켜 줘야 한다. 한을 풀어줘야 한다. 나도 연변대학에서 이런 일을 주로 하고 있다. 그렇게 했더니 군중들이 당을 더 신뢰하고 더 따르더라”

이렇게 설득했다는 겁니다. 그랬더니 공장 당위에서 밤도와 토론하고 나서 이튿날 추도식을 거행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선생의 장인어른을 이 공장의 건립자의 한 사람으로, 중요한 공헌을 한 사람으로 추대하고 추모했다는 거지요.

딸 정홍이와 아들 정진이가 문화혁명기간 외할머니와 함께 남긴 사진.

장례식이 끝나가지고 어른들은 저쪽에서 식사를 하는데 정판룡선생의 장모가 얼마나 즐거워 했겠어요. “쑈훙~” 하고 정판룡선생의 딸이름을 부르더래요. 난 그 말이 재미있어요. 한어로 얘기하면 “你的爸爸是我们家长的最难看的女婿,但也是最能干的女婿” (너의 애비는 우리 집에서 제일 못생긴 사위이다. 그렇지만 제일 머리가 좋고 제일 일처리를 잘하는 사위이다.) 라고 이야기하더래요. 물론 이는 여전히 정판룡선생의 생김새에 대해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는 로인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반어를 구사해 해학적으로 조선족사위를 긍정한 거지요.

1999년 겨울 두 손녀를 데리고 연변대학 교정을 산보하는 정판룡교수 부부.

아무튼 정판룡선생은 왕씨가문에서 굉장히 존중을 받았습니다. 왕유선생도 늘 저하고 그래요.

“호웅씨, 내 한달 중에 가장 기쁜 날이 어느 날인지 알겠어요?” 그래서 (제가)“모르겠습니다. 사모님은 늘 기뻐하시니깐요.”하고 대답했더니 (왕유선생은)“내 월급이 나오는 날이야!”고 말하였지요. “월급을 받는 날은 저도 기쁩니다”(고) 했더니 사모님은 “아니야, 나는 월급을 손에 쥐면 그 즉시로 우체국으로 가서 모비(母费)를 부쳐보내거든. 무석에 모비를 부쳐보내는 날이 한달 중 가장 기쁜 날이야…”(라고) 하는 것이였지요.

이 말인즉 자기 남편에 대한 존중이고 사랑이지요. 이처럼 두분은 평생 의지하고 서로 보다듬으면서 살았지요. 또 정판룡선생은 “나는 조선족사위로서 한족가문에 들어가서 처신을 잘해가지고 존경을 받아야 한다”, 아마 이런 생각을 가지고 한평생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왕씨가문의 존경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런 점도 오늘을 사는, 특히 요즘 세계화시대 또는 노마드시대라 해서 우리 조선족 젊은이들도 한족아가씨와 결혼하는 경우도 있고 또한 조선족 아가씨들도 한족남자한테 시집가는 경우도 있는데 일단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가면 그야말로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사랑받고 존경을 받는 존재가 되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글 구성: 안상근

영상 사진: 김성걸 김파 정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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