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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90)제86장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전장으로(3)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7-15 15:51:36 ] 클릭: [ ]

조선민족 장병들 팔면산서 토비와 접전

군중을 발동해 지혜롭게 토비굴 기습

제422퇀 룡산으로 진격

중경을 해방한 후 제422퇀은 해방군 총부로부터 고향인 동북에 돌아가 대생산건설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여 부대는 중경에서 배를 타고 장강의 물길을 따라 내려왔다. 그런데 사천성 반현 부두에 이르렀을 때 뜻밖에도 악서, 리천현 일대에 집결하라는 총부의 명령이 하달되였다.

제422퇀은 즉시 출발하여 리천현소재지에 이르렀다. 알고 보니 국민당 패잔병, 지방 악질분자, 토비 수천명이 상서 룡산지구 팔면산에 둥지 틀고 있는데 이 한무리의 토비를 숙청할 임무가 제47군에 떨어진 것이였다.

해남도전역에 참가하러 떠나가는 40군 포병영의 조선인 전사들.

작전부서에 따라 주공 임무를 담당한 제422퇀은 1950년 1월 3일 이른 아침, 룡산을 향해 떠났다. 3일 동안에 200키로메터의 길을 강행군하여 5일에 룡산현소재지에 이르렀다. 퇀 지휘원들은 우선 팔면산의 토비들의 움직임을 료해하려고 룡산현인민정부에 가서 현장 손기력을 만났다. 손현장은 워낙 우리 주력부대가 한달전에 사천을 진공할 때 룡산현에서 당과 정부의 건설사업을 하도록 이곳에 남겨둔 동지였다. 퇀부에서는 손현장의 소개를 통해 팔면산 토비들의 움직임을 알게 되였다.

서흥주를 두목으로 하는 토비들은 팔면산에 둥지를 틀고앉아 룡산의 다른 토비두목인 구백릉, 구파평 형제패와 이미 20여년을 날카롭게 맞서 룡산을 남북으로 차지하고 할거국면을 이루고 있었다. 사흥주란 놈은 악착하기 그지없는 자였는데 첩을 일곱씩이나 두고도 예쁜 처녀나 색시들을 보기만 하면 강제로 끌어가군 했다. 이 자에게 강간당한 녀자들과 비참하게 살해된 사람이 얼마인지 몰랐다. 이 자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아편을 팔아 무기를 사들이기도 했다. 송희렴은 상서 토비무장에 ‘희망’을 걸고 사흥주에게 소장급 사장 벼슬을 주었다.

제422퇀은 룡산에서 이틀 동안 휴식하면서 사상 동원, 식량 준비, 적정 료해, 행군로선 선택 등을 주밀하게 짰다. 적아의 력량 대비를 보면 아군은 200여명, 토비는 5,000여명으로서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싸워야 했으며 싸워서 꼭 이겨야 했다.

1950년 1월 8일 새벽, 아군은 룡산에서 출발했다. 리야, 팔면산까지는 100키로메터, 직진으로 가지 않고 초두채에서 내계봉 방향으로, 그리고 또 락탑계, 세차하, 모아탄, 륭두 방향으로 에돌아 전진하였다. 적들로 하여금 해방군이 리야를 치지 않고 보청으로 가는 줄로 믿게 하려는 기만전술이였다. 부대는 강행군하여 룡두에 도착한 후 백성들 속에 들어가 보청으로 가는 길을 물어 짐짓 그 곳으로 가려는 것처럼 여론을 퍼뜨렸다.

오후 4시, 정파 퇀장은 제1영을 이끌고 리야를 습격하러 나섰다가 리야진 근처 약 1키로메터 떨어진 곳에서 한무리의 토비들과 조우전을 벌리게 되였다. 토비들은 처음엔 아주 완고했으나 아군의 기관총 사격과 포 사격에 눌리워 황망히 리야진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퇀부에서는 우선 리야진 북쪽 산을 점령하라고 명령하였다. 유수하 남안으로 진격하던 제3영도 총소리를 듣고 재빨리 도하하여 그 곳에 이르렀다. 아군은 리야진 북산의 제일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토비무리를 포격하여 놈들이 팔면산으로 도망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 때 토비두목 사흥주는 다른 토비두목들과 함께 리야진에서 술판을 벌리고 질탕 먹고 마셔대면서 “공산군 주력이 중경에서 팔면산을 공격하자면 적어도 10일 혹은 반달이 결려야 한다.”고 떠벌리고 있었다.

“15년전 하룡, 소극의 부대가 우리 룡산을 포위한 적 있었지. 그러나 나를 잡지 못했거든. 그런데 강서에 있는 고까짓 공산군이 다 뭐야!”

사흥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전에 밖에서 자지러진 총소리가 울렸다. 희떱게 소리치던 사흥주는 정황을 알아보려고 황망히 진교로 나갔다가 불의의 습격만 당하고 진으로 돌아와보니 다른 두목들은 진자현만 남겨놓고 벌써 팔면산으로 도망쳐버리고 없었다. 사흥주는 부관에게 노새 두마리를 끌어오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노새는 아군의 포소리에 놀라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황급히 밖에 나온 사흥주는 졸개놈의 말을 빼앗아 타고 허겁지겁 팔면산으로 달아났다.

제422퇀은 지친 데다가 지형까지 익숙하지 못해 그 날은 더 추격하지 않고 리야진에 주둔한 뒤 사부의 명령을 기다렸다. 사의 정찰과장이 아군에게 투항한 원 국민당 영순지구의 전원 섭붕승을 데리고 와서 정파 퇀장에게 팔면산의 지형을 소개하게 하였다.

팔면산은 룡산현 남부와 사천 동부의 유양현 사이에 있는 호남, 사천, 호북 3개성 경계지대로서 높이가 해발 1,400메터나 되고 길이가 45키로메터나 되는 아주 험악한 산이였다. 산은 사면팔방이 험한 낭떠러지, 층암절벽으로 이루어졌으며 산허리에는 소문난 연자동, 뢰풍동, 로동 등 크고작은 동굴이 많아서 실로 천연적인 지하보루였다. 산꼭대기로 통하는 네갈래 오솔길은 모두가 울통불퉁한 돌길이였다. 토비들은 멜대광주리를 메고도 나는듯이 오르내리지만 지형에 생소한 아군 전사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찔해나서 기여다닐 지경이였다. 토비놈들은 이런 험난한 길에다가 또 갑문, 가시목문, 또치까까지 설치했고 대량의 토막나무무지와 돌무지를 쌓아놓고 있었다.

1월 18일 아침 5시 정각, 팔면산에 대한 총공격의 포성이 울렸다. 아군은 정파 퇀장의 지휘하에 제2영은 대암문으로, 제1영은 소암문으로 동시에 공격을 들이댔다. 두 곳은 모두 70—80도의 가파로운 절벽이였는데 산 우의 길에 있는 세개의 가시목문 우에다는 소방울까지 달아놓았고 또 가시목문 량켠에는 또치까를 구축해놓았다. 가시목문을 다쳐 소리가 나면 인차 또치까에서 총을 쏘고 토막나무와 바위돌을 내리굴렸다. 지형에 익숙하지 못한 아군은 몇번의 돌격에서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군중 속에서 길잡이를 찾아내 재차 진공하자는 방안을 세운 후 많은 전사들이 군중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곳의 대부분 군중들은 자녀와 친척들을 산 우에 두고 있는 형편이라 산우의 정형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여 해방군의 모든 행동을 토비들에게 알려주었다. 전사들이 공산당의 정책을 선전하고 실제행동으로 군중을 도와주어서야 군중들은 차츰 해방군을 믿게 되였다. 토비들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던 일부 군중들은 자진하여 팔면산의 길안내로 나섰다.

팔면산을 지혜롭게 탈취

1월 20일 새벽 3시, 팔면산에 대한 공격을 재차 벌리였다. 돌격임무를 맡은 양보재 련장은 퇀장의 명령에 따라 련의 전사들을 거느리고 세사람의 길안내를 따라 바줄이며, 줄사다리며, 갈구리 등을 지니고 대소암문 사이에 있는 이가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 이르렀다. 마을 뒤 잡목이 우거진 오솔길을 따라 걷노라니 안개 속에서 기암절벽이 희미하게 나타났다. 팔면산으로 오르는 첫머리였다. ‘원숭이’라 별명을 가진 길잡이 팽오보가 허리에 줄사다리를 치고 어깨에 바줄을 맨 후 절벽 우의 한그루의 소나무를 겨냥해 손에 쥔 갈구리를 올리던졌다. 갈구리가 소나무에 가 면바로 걸리자 힘주어 잡아당겨 든든히 자리 잡게 한 후 팽오보는 휙 몸을 날려 10여메터의 절벽을 눈깜작할 새에 톺아올랐다. 팽오보는 나무에다 줄사다리 한끝을 단단히 매놓고 다른 한끝을 절벽 아래로 내리던져 전사들이 타고 오르게 했다. 이렇게 그가 줄사다리를 놓은 후 녀전사들이 타고 오르고 하여 두시간이 되나 마나 해서 100여명의 전사들이 팔면산에 오를 수 있었다.

독립15사 퇀급이상 간부들.

양보재가 신호총을 세발 발사하자 인차 포성이 울리고 기관총소리가 울렸다. 이는 토비들의 주의력을 딴 데 돌리고 돌격련을 엄호하기 위한 것이였다.

제3패는 다른 두 길안내의 인도를 받아 대암문 공격에 나섰고 제1패와 제2패는 팽오보의 안내를 받으면서 소암문으로 접근해 들어갔다. 날이 이미 밝고 있었다. 소암문을 지키는 100여명 가량의 토비무리가 우등불 곁에 모여 불쬐임을 하고 있다가 총소리와 고함소리에 놀라 나무와 바위돌을 마구 굴려내렸다. 나무와 돌들이 굴러내리는 소리가 산사태가 터지는 것처럼 요란하게 울렸다.

“총을 바치면 죽이지 않는다!”

산 아래서 떠들썩하는 소리가 요란할 때 산 우에서 갑자기 벼락같은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울렸다. 10여명의 적들이 총소리와 함께 나자빠졌다.

“공산군이다! 빨리 도망쳐라!”

토비들이 질겁하여 뒤돌아섰지만 양련장이 거느린 두개 패가 덮쳐들어가면서 한명도 놓치지 않고 몽땅 생포해버렸다. 대암문을 지키던 토비들도 아군 돌격패의 불의의 습격에 어쩌지 못하고 투항하고 말았다.

주력부대는 산에 오른 후 련을 단위로 수색전을 벌리였다. 조련장은 즉시 5련을 거느리고 연자동에 이르러 전투대형을 지어 연자동을 포위하고 굴안의 동정을 살폈다.

연자동에는 네개의 동굴이 한일자로 나란히 뚫려져있었는데 굴과 굴 사이는 약 10메터 되였다. 그리고 굴 안에는 첫 굴로부터 네번째 굴까지 통하는 길이 있었는데 사흥주의 사령부와 후군부는 네번째 굴 안에 있었다. 가장 특이한 굴은 세번째 굴이였다. 굴안에 들어간 다음 한구간의 내리막을 내려가면 수백명을 용납할 수 있는 ‘대청’이 있고 그 주위에는 오불꼬불한 골목길이 있었으며 대청에 가득 널려있는 석주, 석순, 석화는 천연적인 엄페물로 되고 있었다. 굴 안에는 또 사천으로 통하는 비밀도로도 있었다. 실로 혼자서 만인을 대적할 수 있는 요충지였다.

오후 5시, 수색하러 나갔던 부대가 모두 연자동에 집결하여 연자동을 물샐틈없이 겹겹이 포위한 후 정치공세로 사흥주를 투항시켜보려 하였다. 그러나 사흥주는 투항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날이 어두워졌다. 연자동 안의 컴컴한 굴 안에서 기관총사격을 하기도 하고 보총사격을 하기도 하던 토비들중 담 큰 작자가 굴어구에 나서서 큰소리를 질러댔다.

“공산군은 들어라. 여기는 어르신님들이 계시는 ‘작은 대만’이네라. 신선도 쳐올라오지 못하는데 너희들이 다 뭐냐!”

그러자 다른 토비가 나서서 악독하게 웨쳐댔다.

“올라오려면 어서 올라오너라! 술도 있고 고기도 있으니 어르신께서 초대하련다. 그리고 계집들도 붙여주마!”

토비들의 조롱에 참지 못한 전사들은 명중탄을 안겨 그 놈들을 쏴눕혔다. 악다구니질하던 놈들은 벼랑에 굴러떨어졌다.

정퇀장의 명령에 의해 산포가 불을 토했다. 연자동 굴어구마다에 포탄이 날아가 터졌다. 토비놈들은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날 때마다 “아이쿠!”, “아야!” 하고 법석대다가 한참 지나니 쥐죽은듯 고요했다.

이튿날 동틀 무렵, 연자동에서 나온 토비 한놈을 붙들어다 심문하니 그 놈은 사흥주가 굴 안에 없다고 했다. 자정이 지나서부터 어둠을 빌어 굴에다 바줄을 매서 절벽에 드리우고는 그것을 타고 굴아래로 도망쳤다는 것이였다.

제3련과 제5련은 즉시 연자동 산마루를 점령하고 폭파약으로 연자동 중심문을 폭파했다. 그러자 산중턱에 대기하고 있던 두개 패 전사들이 제꺽 신을 벗어 휘발유를 쳐 홰불을 만들어 들고 굴 안으로 들어갔다. 굴 안을 샅샅이 수색했으나 대부분 토비들은 굴 안의 삼면에 낸 출구로 도망치고 남아있는 놈은 얼마 안되였는데 바닥에 20여명의 토비 시체가 널려있었다. 굴 안에서 아군은 무전기 1대, 수십자루의 보총, 10만여근의 량식, 대량의 천과 의복, 아편, 소금, 기름 등을 들춰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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