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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54] 혁명의 길에 나선 문학청년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6-19 11:22:26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 대형구술시리즈-[문화를 말하다-54](김학철편-3)

김학철의 본명은 홍성걸입니다. 중앙륙군군관학교(전신은 황포군관학교)시절 조선청년학생 전원이 교장의 명령에 의해 이름을 바꾸게 되면서 어머니의 성을 따서 지은 이름이 김학철입니다. 

1924년 6월 광주 황포에서 성립된 황포군관학교는 1931년부터 중앙륙군군관학교로 개칭되였다. 1937년에는 남경, 락양 등지에 분교를 두고 많은 청년군관들을 양성하였다. 

김학철은 어린 시절 산수가 골치거리였어요. 소학교 때 5점이 만점인데 늘 2점을 맞고 어머님의 꾸지람을 받았지요.

“너는 산수 오리 점수를 좀 면할 수 없느냐?”

그런데 흥취는 다른데 가 있었지요. 당시 고향 원산에는 훌륭한 도서관이 있었는데 일어로 된 세계문학전집을 하루에 한권씩 빌려와 밤을 새며 읽었습니다. 거기서 세상을 알게 되였고 문학을 알게 되였지요. 이것이 김학철이 후날 작가로 변신한 바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시기 원산에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대파업이 일어났어요. 원산 부두 로동자들의 파업이 한창일 때 어린 김학철로서는 리해 할 수 없는 일이 생겼습니다. 글쎄 원산 앞바다에 정박한 수십척의 일본 배들이 일제히 우렁찬 고동소리를 울리며 조선인 부두 로동자들의 파업을 성원하는 것이였습니다. 조선을 침략한 일본인들이 왜 피점령국 로동자들을 성원하는 것일가? 어린 김학철은 그 까닭을 리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국제주의 프로레타리아 뉴대감인 줄을 깨달은 것은 썩 후날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은 나라나 민족으로만 갈라지는 것이 아니라 계급으로, 통치계급과 피압박 인민으로 나뉜다는 것도 알게 되지요.

 
조선의용대의 정기 간행물(잡지).

김학철은 중학교를 서울 이모집에서 다니게 되였습니다. 그가 다닌 보성고교는 서울에서 이름 있는 중학교였어요. 그 학교 졸업생 가운데는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도 있는데 후날 작가 김학철과 깊은 우정을 나눈 문학동지가 되였습니다. 보성고에서는 해마다‘자랑스런 보성인'을 선정하여 상패를 주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에는 김학철을 자랑스런 보성인으로 정했기에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조정래도 만났습니다.

김학철이 보성고를 졸업할 무렵 중국 상해에서 있은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이 세상에 알려졌어요. 윤봉길사건은 김학철의 가슴을 설레이게 하였습니다.

(윤봉길은 나라와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목숨 바쳐 싸웠는데 나는 가만히 앉아 공부만 할 수 있는가? )

그리고 노르웨이 작가 입센의  《민중의 적》이라는 작품을  읽으며 용기를 얻게 됩니다.

군사훈련을 하는 조선의용대 대원들(자료사진).

김학철은 중국대륙에 있는 반일독립조직에 참가하려고 결심했습니다. 어머니가 알게 되면 당연히 동의하지 않을 것이기에 몰래 어머님이 감춰둔 비상금을 꺼내 갖고 험난한 길을 떠났어요. 그런데 후날 어머님은 아들이 떠나가면서 그 비상금을 다 가져가지 않고 일부 남긴 것이 그렇게 가슴 아팠답니다.

그때는 부산에서 북경으로 가는 직행렬차가 있었어요. 당시 조선청년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일본 헌병들이 렬차에서 자주 검사를 했습니다. 하여 김학철은 야구복장 차림을 하고 북경으로 야구시합 가는 일본학생으로 가장했지요. 아니나 다를까 일본헌병이 다가와 어디로 가는가 캐여 묻는데 김학철은 류창한 일본어로 북경에 야구시합을 간다고 하였어요. 그러니 일본헌병들이 칭찬하며 함께 떠들썩 했지요. 그렇게 무사히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역에서 먹을 걸 사는데 중국어를 모르니 손으로 물건을 가리키고 무조건 큰 돈을 내서 거스름 돈을 받았더니 호주머니가 점점 무거워 졌지요. 그리고 다시 북경에서 상해로 림시정부를 찾아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런데 상해에서‘의렬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줄을 어찌 알았겠습니까. 김원봉이 이끄는 의렬단은 중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무정부주의 반일테러단체였습니다.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반일운동을 하는 중요한 세력이였지요.

김학철이 상해 기차역을 빠져 나와 정거장광장 앞에 있는 눈에 잘 띄는 려관에 들어섰는데 누군가 조선말로 부르는 것이였어요. “어 이봐 학생, 조선에서 왔지?” 우리 말 소리에 깜짝 놀란 김학철은 너무 신기하고 또 반가웠습니다.

당시 조선에서 독립의 뜻을 품고 상해로 오는 청년들은 기차에서 내려 가장 가깝고 눈에 잘 띄는 이 려관으로 찾아오기 마련이였어요. 하기에 의렬단은 이 려관에 그물을 쳐놓고 조선에서 오는 청년들을 포섭하며 조직을 늘이고 영향력을 키우는 것이였습니다.

 

1994년 상해 반일테러활동 아지트를 찾은 김학철과 그의 아들 김해양.

그때 의렬단 책임자들로는 김원봉, 석정, 류자명 등이 있었는데 (그들은) 김학철과의 첫 대면에서 입단심사를 하면서 일제침략자를 몰아내고 독립을 하면 어떤 나라를 세우고 싶은가고 물었습니다. 김학철은 당연히 임금님을 모셔다 왕정을 복구하고 나라를 회복해야 하지 않겠는가고 답하였습니다. 이를 유심히 지켜보던 석정 등은 웃음을 머금고 더는 깊은 얘기를 하지 않았답니다.

젊은 시절 조국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를 위하여 단연히 상해를 찾아갔을 때 그의 세계관은 왕정복고사상이였습니다. 그가 의렬단에 흡수되여 김원봉, 석정의 인솔하에 무정부주의 반일테러활동에 참여할 때는 또 무정부주의 사조에 고스란이 물들었습니다. 그 후 중국의 중앙륙군군관학교에서 김두봉선생을 비롯한 교관들로부터 비밀리에 맑스주의를 전수받고 사회주의자가 된 것입니다. 그로부터 김학철은 맑스주의신앙을 지니고 피 흘려 싸웠고 진리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죽을 때까지 그 신념을 고수하였습니다. 김학철의 문학에서 그의 세계관의 변화는 아주 중요합니다.

김원봉이 이끄는 의렬단은 중국 관내 지역의 막강한 지하 반일혁명조직이였지요. 일본의 군정요인과 민족반역자들을 처단하고 그들로부터 군자금을 빼앗는 것이 의렬단의 주요한 투쟁방식이였습니다.

의렬단에 들어 첫 임무를 수행하던 날, 김학철은 현장에서 일본헌병들이 나타나는가를 살피며 망를 보았는데, 머리우의 2층집에서 웬 사나이 하나가 창문을 열고 뛰여 내리더니 바삐 골목길로 줄행랑을 놓는 것이였습니다.

(저 미친놈이 왜 2층집에서 뛰여 내리는가?)

잠시 후 동료들이 울안에서 뛰쳐나오면서 그 놈이 어디로 갔는가 물었지요.

김학철은 “누구를요?” 하면서 어리둥절해하였어요.

“이층에서 뛰여내린 놈!”

“아, 그 사람 저쪽으로요……”

어느 사이 투박한 손길이 김학철의 뒤통수를 들이쳤습니다.

“야! 이 멍청아, 그놈이 우리가 죽이려는 놈인데 그걸 잡지 않고 보고만 있었어?! ”

김학철의 첫 임무는 그렇게 영예롭지 못하게 실패했어요. 사실 항일투쟁은 이렇게 수많은 오류와 실수를 거치면서 진행되였지요. 전설적 영웅의 신화는 없었습니다. 목숨을 건 의렬단의 투쟁은 중국 현지인들에게 크나큰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지하테러방법으로 일본제국을 패망시킨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김원봉을 비롯한 의렬단 수령들은 뼈아프게 느꼈지요. 하여 우리에게도 정규화된 항일무장부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절박하게 느끼고 100여명의 조선청년들을 중국 최고의 군사학원인 중앙륙군군관학교에 입학시켜 정규화 군사교육을 받게 하였습니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립현장에서의 김학철(뒤로 두번째 줄 표시된 분).

1938년 10월 10일, 중앙륙군군관학교 졸업생  100여명은 당시 국민정부 림시 수도인 무한(한구)에서 우리 민족 최초의 정규화 항일무장부대 조선의용대를 창립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는 당시 중국국민정부가 정식으로 비준한 국제무장부대였어요. 중국공산당 대표이며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인 주은래가 창립식에서 《동방 피압박 약소 민족의 해방에 관하여》라는 연설을 하고 정치부 제3청 청장인 곽말약(郭沫若)이 시를 지어 축하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창립소식은 당시 신화일보 (중국공산당 기관지)에 실렸고 지금도 무한팔로군판사처 박물관에 소장되여 있으며 북경의 중국항일전쟁박물관에도 전시되여 있습니다.

무한은 장강을 끼고 3진으로 나뉘어 있는 곳입니다. 항일전쟁력사에서 유명한 무한보위전은 조선의용대 창립과 동시에 시작되였어요. 그러니 조선의용대는 창립된 첫날부터 중국항일전쟁의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습니다. 당시 곽말약이 쓴 항일실기저서 《홍파곡》은 지금도 대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작품인데 그 중에는 조선의용대에 관한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습니다.

무한이 함락되기 전야에 곽말약은 찌프차를 타고 무한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며 텅 빈 시내를 돌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란 것이 시내 한 복판에 아직도 한 부대가 남아 길바닥과 건물 벽에 큰 붓으로 일본어 표어를 쓰고 있는 것이였어요.

“일본군 병사들이여, 당신들은 속아서 이 전쟁에 참가하였다. 군관을 처단하고 정의의 품으로 찾아가라.” “부모형제가 기다린다. 그리운 조국으로 돌아가라!”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발전하였고 항일최전선에서 무장선전을 계속하였다. 항일선전구호를 쓰고 있는 조선의용군 전사들.

곽말약이 차에서 내려와 보니 이 부대는 바로 조선의용대였습니다. 후날 일본포로들의 말에 의하면 무한이 함락된후 그 표어들을 아무리 지워도 말끔이 지울 수가 없었고 머리속에 남은 인상은 더구나 지울 수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곽말약은 “우리에게도 일본어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많은데 우리의 사랑하는 무한을 마지막까지 남아서 지켜준 사람들은 조선청년들이다. 정말 부끄럽고 가슴 아프고 또한 고맙다.”라고 썼습니다. 《홍파곡》의 이 아름다운 기록은 지금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줍니다. 

중국의 항일전쟁에서 조선의용대는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중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비장한 항전서사시를 엮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시종일관 항일최전선에서 일제와 싸우려고 화중 국민당구역으로부터 화북 팔로군근거지에로의 북상을 결정하게 됩니다. 조선의용대 주력이 국민당 몰래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야 하는데 필수인 도강증이 있어야 했어요. 이러한 위기 속에 락양판사처에서 련락관으로 있는 문정일이 국민당 전구사령부를 찾아가 도강증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로 인해 조선의용대는 무사히 황하를 건널 수 있었고 태항산지역 팔로군근거지에 도착하게 되였습니다.

조선의용대 전우이자 중앙륙군군관학교 동창인 문정일(오른쪽 두번째) 등 조선족지도자들과 함께.

그 당시 팔로군전방사령부는 산서성 마전(麻田)에 있었는데 팔로군사령부에서는 성대한 환영식을 열고 조선의용대를 영접하였습니다. 환영식에서 팔로군 부총사령원 팽덕회가 직접 환영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의용대가 우리와 함께 일제와 싸우는 것은 중대한 국제적 의의가 있다고 강조하면서 우리의 무기창고와 후근창고 대문은 항상 조선의용대에 활짝 열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화북지역에 모인 조선의용대는 화북지대로 새로 편성되였고 본격적인 무장선전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을에 내려가 좌담회, 련환회, 집회를 가지고 군중들의 항일 의지를 북돋아주었으며 적의 진지에 접근하여 군심을 동요시키고 적군을 와해시키는 전호함화(战壕喊话)선전을 진행하였습니다.

1941년 12월 12일, 태항산기슭 호가장에서 벌어진 치렬한 대일전투에서 제2대 분대장 김학철은 다리뼈에 총상을 맞고 일본군에 체포됩니다. 그리고 석가장헌병사령부의 취조와 일본령사관구치소의 수감을 거쳐 일본 나가사끼감옥으로 압송됩니다.

글 구성/ 김청수기자

영상 사진/ 김성걸 안상근 김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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