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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 44] TV문화의 새 지평을 열던 보람찬 나날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3-27 12:00:23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44](채영춘편-9)

제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국장으로 임명받아 가던 때는 1992년 8월이였어요. 도착 신고날 주당위 선전부 리정문 부장이 몸소 저를 데리고 기타 관계자들과 같이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국에 가 지도부성원들과 만남의 자리를 가졌지요. 그리고 9월 1일부터 정식 출근하게 되였어요.

줄곧 지면매체에 적응되여 왔던 저에게 텔레비죤방송매체는 너무나 낯설었죠. 그래도 미술을 알고 사진촬영을 했던 밑천이 있어서 별로 당황하지는 않았어요. 매일 나가는 뉴스프로의 원고심열부터 제작과정을 살펴 보고 다른 부서에서 보내 온 기타 프로그램을 심사하는 한편 15개 부서를 한칸 한칸 다 돌아보고 각 부서 책임자들과 만나 담화를 나누면서 프로그램 실태와 운영상황을 자세히 알아 보았어요.

TV보도부 제작실을 돌아보는 채영춘 국장(뒤줄 왼쪽 세번째).

지면과 인쇄기에 의한 출판과 달리 TV프로그램은 전부 TV카메라와 편집기에 의해 만들어지고 송출기와 미크로파전송을 거쳐야 하는 것이였지요. 전 과정을 기술장비로 풀어나가는 것이였어요. 신문사와 출판사가 신문, 도서로 승부하는 것처럼 TV는 프로그램으로 승부하는거얘요. 그런데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당시의 프로그램제작수준은 높았으나 렬악한 장비의 제약을 심하게 받고 있었지요. 한마디로 장비수준은 '좁쌀에 소총'이였습니다.

TV의 가장 중요한 부서인 보도부만 보더라도 5850형(TV에서 최하수준)을 기본으로 움직였고 취재임무가 딸릴 때는 개인의 민용카메라(민간에서 쓰는 비방송 기기)까지 동원하다 보니 화질이 말이 아니였죠. 이런 기술지표로는 중앙TV 화질요구와 거리를 좁힐 수 없어 채용률이 대폭 떨어졌어요. 다른 부서의 프로그램도 대동소이했어요. 장비가 발목을 잡다 보니 프로그램 생산률이 올라가지 못하고 자연히 시청률도 영향받으면서 광고주문도 떨어지는 악성순환이 생긴 것이예요. 경제가 락후한 변강소수민족지구에서 고소비 TV를 운영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죠. 15년간 연변TV 전임 지도부와 선배들이 이 정도로 TV 기틀을 닦았다는 것은 대단한거죠. 그런 상황에서 1992년 당시 연변TV 자체제작프로그램비률은 25%였고 한해 방송 총시간은 1800시간이였어요. 낮 방송은 희망사항에 불과했지요.

조룡호 려영준 등 로일대 지도자들로부터 드라마 <초연속의 수리개> 후원금을 접수하는 장면.

<초연속의 수리개> 촬영현지 선경대를 찾은 로일대지도자들과 드라마 출연배우, 스탭들과 함께(1995년)

락후한 장비는 일조일석에 개변시킬 수 없지만 그렇다고 손놓고 앉아 현상유지만 할 수 만은 없었지요. 일단 사람의 저력을 살려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을 높히는데 모를 박기로 했죠. 김영택선배 부국장 (그때 부국장이 한분이였음)과 토의한후 총공정사 오기송의 기술자문을 받으면서 '정품화로 텔레비죤방송을 부흥시키는' 전략을 짜고 지도부의 공감대를 형성한 후 1993년부터 실행에 옮겼어요.

우선 각 부서 책임자들과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나누고 좋은 아이디어들을 구김없이 터놓게 하고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큰 믿음을 주었지요. 전국범위에서 YBTV정품화만이 살길이라는 인식이 살아나면서 분발하려는 직업의식이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갔어요. 보도부가 선참으로 <카메라추적> <경제산책 18번> 등 정기 프로를 증설했는데 그 즉시 히트를 쳤어요. <함께 하는 세상>, <두만강 1번지>, <우리네 동산>, <주말극장>, <문화 살롱>, <스포츠 대행진> 같은 인기프로는 이 시기 에 발족한거얘요.

드라마제작에서도 오랜 숙망을 달성하여 련속드라마 <갈꽃>, <초연속의 수리개> 등을 줄줄이 뽑아 냈어요. 특히 1996년 9월부터 115일간 9000키로메터에 달하는 먼 려정을 소화하며 벌린 ‘조국만리변경기행’ 취재활동은 중국기자협회로부터 “우리 나라 보도계의 일대 장거”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지요.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양위광 국장을 모시고 장백산에 올라(1995년).

이 시기 연변TV 인들의 긍지감을 촉발시킨 사건이 있었어요. 1993년 현지생방송으로 제작한 대형종합야회 <장하다, 백두호랑이>였어요. 부동한 의견을 잠재우고 인식을 통일하면서 어렵게 성사시킨 장거였지요. 연변축구팀이 전국운동회축구종목에서 좋은 성적을 따내여 전국축구계를 놀래운 사건을 모티브로 기획한 200분 길이 프로그램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사상 첫 현지생방송으로서 연변TV인들이 합심하여 만들어 낸 걸작이였지요. 우리의 저력을 마음껏 과시한 한차례 성공적인 합동작전이였던거죠. 생방송이 종료되자 60여명 전문일군들이 무대로 달려나와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자축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해요.

큰 사건인만큼 사후 현지생방송성공기념총화대회를 성대히 개최하였어요. 이 시기에 창출된 인기프로그램과 드라마제작, 현지생방송 프로그램은 모두 렬악한 장비수준에서 이루어졌다는데 큰 의미가 있는거죠. 특히 현지생방송 <장하다, 백두 호랑이>는 최소 전송과 송출을 위한 케이블선이 복선으로 돼야 하는 전제조건도 무 시하고 단선으로 밀고 나아갔다는 점이얘요. 물론 사고방지를 위해 여러 차례 모의 실험을 거쳤지만.

다음으로 시도한 것이 시청조사였어요. 우리 스스로 자화자찬하면서 프로그램을 자평 하지 말고 시청자들이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시각을 두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시청 조사원대오를 형성했어요. 각 현시에 시청조사원팀을 두어 그들이 정기적으로 연변 텔레비죤 각 쟝르의 프로그램을 평가하고 시청보고를 올려 오도록 했어요.

제1회연변텔레비죤방송시청조사원회의 참가자 일동.

총편판공실에서 구체적으로 책임지고 각 현 시의 시청보고서를 분류하여 매 분기마다 한번씩 프로그램 시청률서렬을 매긴 뒤 공개함으로써 프로듀서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 주었지요. 텔레비죤방송국 범위에서 프로그램질을 높이기 위한 경쟁분위기를 고조시켰지요.

프로그램수준은 결국 방송인의 수준인거죠. 방송인의 수준은 또한 TV장비에 대한 완벽한 리해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하는거지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기술양성학교를 꾸리고 매주 오후 한번씩 전문 학습시간을 마련하고 오기송 총공정사가 기술강의를 하게 했어요. 1993년부터 장비갱신을 위한 투자에 공을 들였지요. 1994년 한해에 170만원을 투입하여 보도부를 중심으로 장비개선혁명을 했어요. 드디여 1994년부터 보도부는 전기취재 카메라를 방송급으로, 후기제작편집기는 준방송급으로 승격하면서 그해 중앙TV 뉴스 채용률이 20건을 훌쩍 넘겨 그 전해보다 1배 이상 늘어났어요.

주정부 지도자들에게 장비상황을 소개하고 있는 채영춘(왼쪽 두번째).

1996년에는 700여 만원을 투자하여 연변TV가 드디여 '업무급 5형시스템을 철저히 도태시키고 베타캄을 위주로 하고 9형시스템을 부차적으로 하는' 높은 차원의 장비갱신목표를 달성하였지요. 질적인 프로그램의 량산, 장비수준의 격상에 따라 한낱 희망사항에 그쳤던 낮방송을 1996년부터 현실화시킴으로써 연변TV의 1997년 자체제작프로그램비률은 38.5%, 총 방송시간은 3788.1시간을 웃돌게 되였어요.

1993년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초청으로 평양에서 교류활동을 진행(왼쪽 세번째).

90년대 초중반에 들어서면서 연변축구가 전성기를 누리며 갑급리그 그라운드를 주름잡고 있을 때 연변TV의 현지중계방송시스템도 서서히 화제에 오르게 되였어요. 축구가 연변에서는 단순한 스포츠개념을 넘어 언녕 문화현상으로, 정치현상으로 격상되여 있었고 제일 큰 민생화제로 말밥에 올라 있었어요. 이런 상황에서 현지중계 방송은 연변TV 앞에 주어진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지요.

그런데다 제가 또 연변축구 구락부회원협회 초대회장으로 당선되여 텔레비죤방송국은 당연히 연변축구팬들의 대본영으로 둔갑되여 있었어요. 갑급리그 연길경기구 중계방송을 잘하는 것은 우리한테 너무 무거운 짐이 되여 있었어요. 연변 나아가서 중국조선족축구관중의 뜨거운 축구열망과 반비례하여 렬악한 연변TV중계방송시스템은 우리를 무척 괴롭히고 있었지요. 제일 큰 문제는 중계방송차가 없는 것이얘요.

매주 토요일 오후 세시에 경기를 하는데 이 시간에 맞추려면 오전 9시부터 서둘러야 했어요. 9시반에 뻐스공사에 가서 뻐스 한대를 임대해가지고 와서는 뻐스안의 의자 나사를 다 풀어 뜯어내고 중계 방송용 편집장비를 뻐스안에 싣지요. 중계방송에 쓰는 편집기는 기술지표가 꼭 9850형(준방송급)이상이 되여야 중앙방송에서 중계할 수 있는데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는 이런 수준의 편집장비가 제작중심에 딱 한조밖에 없으니 그 편집장비를 뜯어가지고 뻐스에 옮겨 싣는거지요. 그 다음 공정기술일군들이 따라 올라가서 편집장비를 뻐스에서 부리워 경기장기술통제실에 다시 설치해야 했어요. 보통 한심한 정도가 아니였지요. 방송중계차가 없는 텔레비죤방송국,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이 국면을 타개해야겠다고 결심했지요.

전국갑급련맹전 연길경기구에서 자작 방송중계차로 첫 생중계방송을 마치고 제작팀과 함께(뒤줄 오른쪽 다섯번째).

그런데 천문수자가 드는 방송중계차를 구입한다는 건 언감생심 말도 안 되는 일이였지요. 방송중계차 한대는 하나의 중소형 방송국과 맞먹거든요. 총공정사 오기송을 비롯한 공정사들과 자문을 구하고 지도부성원들과 머리를 맞대고 토의하여 내놓은 방법이 방송국 15주년 행사때 뻐스공장으로부터 선물받은 중형뻐스를 밑천으로 방송중계차를 자체로 조립하자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어요.

뻐스공장 공장장을 찾아가 일단은 선물로 받은 중형뻐스를 들여놓고 웃돈을 더 내겠 으니 방송중계차 한대를 조립해달라고 간곡히 사정했어요. 어이없어 하는 공장장을 겨우 설득하여 5만원만 더 내기로 하고 타결하였어요. 그 즉시 오기송 총공정사를 한단에 있는 방송중계차 제조공장에 보내여 중계차 설계도면을 구해오게 하였지요.

이렇게 방송중계차제작이 본격적으로 뻐스공장에서 이뤄져 갔어요. 저는 곧 출생할 자식을 학수고대하는 마음으로 거의 매일 뻐스공장으로 출근하다 싶이 했어요. 중계차가 완성되고 외곽에 페인트칠까지 하고 ‘YBTV’라는 네 글자를 보란듯이 새겨넣으니 이제 진짜 우리도 방송중계차가 있게 됐다는 감격에 붕 뜰 것만 같았지요.

그 다음은 중계차 안에 채워 넣어야 할 편집장비마련에 총력을 기울렸어요. 해외기업의 협찬, 정부재정의 지원, 은행대출, 광고수입 등 여러 방면의 수백만원에 달하는 자금조달로 중계차 안의 편집장비 시스템을 완벽하게 마무리했어요. 산뜻하게 단장한 방송중계차가 방송국 울안에 들어설 때 방송국 안팎은 환희로 들끓었지요. 연변TV력사의 첫 방송중계차가 탄생한거죠. 그날이 바로 1994년 10월 19일이였어요.

조남기 장군께 사업회보를 올리고 (1996년).

중계차가 생기니 축구경기 생중계도 탄력을 입게 되였어요. 오전 아홉시가 아니라 오후 1시에 여유있게 중계차에 앉아 경기장으로 떠났어요. 그때 쯤이면 이미 연길경 기장 관중석은 빈틈 없었어요. 남대문이 열리면서 ‘연변텔레비죤’이라는 글발을 새긴 방송중계차가 신바람을 일구며 경기장에 들어 서던 첫날, 온 장내 관중들이 박수를 치고 환호하던 그 광경이 지금도 눈앞에 선합니다.

TV 자작방송중계차 리용률도 대단히 높았어요. 축구현지중계방송 뿐만 아니라 사회 교양프로나 문예프로도 어떤 장소든 가리지 않고 전부 가능했어요. 중계차가 하나의 방송국 맞잡이니 어디서든지 신호송출이 될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TV 방송중계차의 탄생은 연변텔레비죤사상 한차례 중요한 전환인거죠.

1996년에 들어서서 프로그램제작이 활성화되고 모든 방송장비들이 갱신되면서 방송시간이 늘어나고 프로그램의 품종이 불어나고 시청조사시스템에 의한 프로그램의 질이 담보되니 악성순환이 서서히 연성순환으로 바꿔지더라구요. 텔레비죤방송국의 사회적 이미지도 날따라 높아가면서 광고주문도 급물살을 타게 되였어요.

텔레비죤방송의 주체는 사람이지요. 사람이 적극성이 없으면 아무리 날고 뛰는 재간이 있어도 쓸 모 없어요. 아무리 정치각오를 강조하더라도 물질적인 것을 도외 시해서는 안되지요. 지도부에서 수차례 회의를 거쳐 상부의 허락을 받고 내놓은 타결책이 <프로그램으로 프로그램을 살리기>였지요. 각 프로그램의 앞뒤부분(片头片尾)에 광고시간을 배당해 주어 각 부서 자체로 광고주문을 받게 하고 그 수입으로 프로그램 운영비를 해결하고 종업원복리를 하게 했지요.

프로그램을 잘 꾸려야만 가능한 일이라 각 부서마다 적극성이 굉장했어요. 물론 이에 따른 통제와 감독기제도 엄격했어요. 국에서 조달할 수 있는 자금이 미미한 상황에서 이 <정책>은 프로그램질과 사업일군들의 적극성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였다고 생각합니다.

1997년 세계한국어방송인대회에 참가하고 남긴 기념 사진(왼쪽 네번째).

1997년은 연변텔레비죤방송국 개국 20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텔레비죤방송국이 한차례 도약을 꾀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라고 생각했지요. 이 시기 우리 방송인들의 사기는 한껏 높아져 있었어요. 조선, 일본, 한국, 미국, 뉴질랜드 등 나라의 방송사들과는 이미 1993년도부터 서서히 공식적인 합작과 교류의 물고를 틔웠고 세계와의 접목을 이루어 낸 상황이였지요.

지정학적으로 동북아복지에 위치한 연변TV가 새로운 꿈을 가져야 할 때라 판단하고 지도부성원들과 함께 빈번한 소통과 토의를 거쳐 내놓은 포인트가 <세계속의 YBTV>였어요. 이를 기본테마로 세계를 피복하는 YBTV 이미지를 담아 낸 연변TV 공식마크(채영춘의 디자인으로 제작됨)가 연변 TV 하루 방송개시곡과 더불어 모든 프로그램상단에 정식으로 오픈했어요.

1996년 새로 출범하는 연변TV 마크와 국훈에 대해 설명하는 채영춘 국장.

따라서 '품위 높은 방송, 능률적인 사업, 화목스런 기분, 주인다운 본새, 예견있는 사고'가 국훈으로 출범하고 방송국 청사안에는 'YBTV의 미래는 지금의 인식과 행동에서'라는 슬로건이 크게 내걸렸어요. 전체 임직원은 스튜디오에서 YBTV 강령을 되새기는 선서대회도 가졌구요. 세계화에 걸맞는 연변TV의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한 첫 발자국을 뗀 셈이였지요.

2007년 연변TV 개국 30주년 기념대회에서 공로패를 받은 채영춘(왼쪽 두번째).

개국 20주년 기념대회에서 저는 텔레비죤방송국을 대표하여 우리 방송의 지표를 아래와 같이 제시했어요. 세계화 시대를 열어가는 자세와 안목을 키워주는 향도의 방송, 떳떳한 삶을 부각해가는 창조의 방송, 연변을 세계에로 이끌어 가는 견인의 방송, 중국조선족특색의 문화창출을 힘있게 이끄는 선도의 방송.

1998년 5월 저는 연변TV에서 6년 남짓한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사랑하는 일터와 동사자들을 떠나게 되였어요. 지도부와 임직원들의 지지와 보살핌이 여러 모로 저에게는 큰 힘이 되였어요.

/길림신문 글 구성 김청수 기자 영상 김성걸 안상근 김파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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