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백성이야기119]장백현에 항일투사 리성실이 있었다

편집/기자: [ 최창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2-20 12:50:37 ] 클릭: [ ]

리성실(연안 리씨, 1896년도 출생). 그는 항일전쟁시기 장백현 이도강에서 10여년동안 항일련군들을 도와 량식과 약을 날라주고 비밀리에 정보를 전해준 항일투사였다. 또 해방후에는 이도강촌의 촌장과 부녀회장까지 겸하면서 평생 남을 위하여 살다가 가신 분이다.

소문없이 조용히 이도강에 와 자리를 잡다

조선 평양남도 사람이였던 리성실은 함흥사람인 어리무던한 남편과 함께 1936년 가을에 항일부대를 따라 장백현 이도강 작은 신창동 마을로 이사하여 왔다. 지식분자로서 언변이 좋고 용모를 잘 쓴 리성실은 자신의 지하공작자라는 신분을 속이고 부근의 촌민들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무상기가 짧은 이도강지역의 기후에 알맞는 보리, 귀리, 감자를 심어 가꾸었고 가축을 기르고 물레방아로 쌀을 찧어먹으면서 촌민들과 함께 화목하게 지냈다. 신창동은 이도강 치고 깊은 골안이다보니 항일련군들에게 량식, 장(大酱),소금 등 생활필수품을 보내기 편리했다.

1937년 가을의 어느날 아침, 신창동 마을은 하루아침에 불바다로 변했다. 집도 가축도 뒤주에 장만했던 겨울량식도 모두 재더미로 변했다. 일본침략자들은 집단부락을 만들어 사람들을 집중시키고 백성들이 항일련군과의 련계를 막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작은 마을들을 태워버리며 집단부락으로 사람들을 몰아넣는 발광적인 행패를 부렸다.

사람들이 조금만 반항하면 칼날을 휘둘러대며 죽여버렸다. 왜놈들의 칼 앞에선 사람 목숨이 개미 목숨보다도 못했다. 이 한해에 대여섯집씩 사는 작은 마을까지 합치면 4천여명이나 줄어들었다 한다. 죄없는 무고한 생명들이 하루아침 이슬처럼 희생양이 되였던 것이다. 겨우 목숨을 부지했으나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밖에 나앉은 가련한 백성들은 코를 꿰운 송아지처럼 왜놈들의 지휘에 따라 집단부락에 모여들었다.

리성실가정도 울며 겨자먹기로 정든 신창동을 떠나 이도강으로 이사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왜놈들은 이도강에 높은 토성을 쌓고 토성의 네 귀에 포대를 지었으며 동서남북에다 큰 대문 네개를 내고 보초병을 두었다. 날이 저물면 대문을 닫기에 밖에서 들어오지 못했고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렇게 경계가 삼엄한 정황에서도 리성실과 기타 촌민들은 목숨을 내걸고 그냥 가만가만 항일련군들을 도와주었다. 그 시기 왜놈들의 개다리짓을 하며 다니는 인간들도 있기는 했지만 이도강에는 가만가만 항일련군들을 돕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한다. 겉으로 보면 다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송월이 엄마 (천인필 안해)는 항일련군들의 지하 공작자였고 강의사아주머니(장백현의 전임현장 원현장 장모)도 항일련군의 지하공장자였다. 리성실부부는 농사를 지어 얻은 량식을 가만가만 항일련군들에게 보내다나니 집식구들은 늘 량식고생을 했다고 한다. 감자짐은 부피가 크고 메고 다니기가 불편하였기에 갈아서 농마(淀粉)를 만들어 보내주었다. 준비해둔 것들이 미처 없으면 이듬해에 주기로 하고 먼저 다른 집에 가서 꿔다가 보내주었다. 식량뿐만 아니라 군수물품과 약들을 날라주고 정보를 날라주었으며 부상병들을 엄호해주었다.

항일투사 삼형제

리성실에게는 남녀 두 동생이 있었는데 둘다 항일부대에서 활약했다. 후에 혜산 강구싸움에서 남동생 리광욱이 붙잡혀 서울감옥에 끌려가 10년 징역살이를 하고 돌아왔다. 9월에 감방에서 돌아온 리광욱은 몸이 말이 아니였다.

“누이, 들을라니 액목현(额穆县)(후에 교하현으로 고쳤다가 지금은 교하시로 되였음)에 큰일(항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난 그리로 가겠소.”

“그 몸을 해가지고 어데로 간다구. 먼저 여기서 농사를 지으며 차차 보자꾸나!”

리성실의 반대도 마다하고 동생 리광욱은 흰제메기만 얇게 입고 싸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치는 심심산속 만장을 지나 액목현을 향해 항일부대를 찾아 떠났는데 그후 다시는 소식이 없었다.

리성실의 녀동생 리경실도 그 때 항일련군들에게 비밀을 나르는 일을 하였는데 명란젓과 밸젓을 팔러다니는 장사군으로 변장하고 조선 혜산으로부터 이도강을 오가며 비밀을 날랐다. 왜놈들의 경계가 하도 심하여 이도강에 오면 늘 언니인 리성실의 집에서 묵었다 가군 하였다. 동생이 오면 리성실은 슬그머니 물동이를 들고 송월이 엄마에게 동생이 왔다는 것을 알리러 나간다. 리성실이 물동이를 이고 들어오면 한나절 있다가 송월의 엄마가 와서 방에서 소근거리다가 가군 하였다. 어떤 날은 강의사아주머니를 찾아 정보를 알아가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리성실은 서로 만날 수 있게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튿날 토성문이 열리면 리경실은 비밀을 가지고 다시 이도강을 떠나 혜산으로 떠나갔다.

1937년말 이도강지역의 항일부대는 떠나갔지만 리성실의 지하활동은 계속 진행되였다. 1948년 장백현에서는 327명의 우수한 조선족청년들이 리홍광지대에 가입하였다. 부패장 최희원이 인솔한 소분대는 이도강지역에서 황무지를 일구고 곡식과 채소를 심어 자급자족하였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당의 정책을 선전하여 군민의 관계가 아주 좋았다. 그때 리성실은 동네 녀성들을 조직하여 된장과 김치를 거두어 장병들에게 날라갔고 밤새 국수를 눌러서는 전사들을 위문하였다. 늘 전사들을 도와 옷을 씻거나 밤을 새며 바느질을 해주어 장병들의 환영과 군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극산병으로 부모 잃은 애들의 어머니로 되다

1947년 이도강마을에 극산병이 돌았을 때였다. 한집에 한사람만 걸리면 온 가정에 전염되였다. 20여집이 이런 봉난을 당하자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을 둘러업고 손목 잡고 천교, 독골, 삼수골을 걸쳐 무송현으로 떠났다. 지금도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만 보면‘무송현 이사군’처럼이라고들 말한다. 500여호가 이렇게 무더기이사를 떠나가자 마을에는 백여호 밖에 남지 않았다. 남들은 살겠다고 이사를 갔지만 리성실만은‘고지’를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극산병으로 죽은 사람들이 남기고 간 고아들을 빈집에 가서 하나 둘 안아다 좁은 방안에다 쭉 눕혀놓고 먹여주고 대소변을 받아냈다. 하늘이 알아봐주었던지 안아 온 열명의 아이중 넷은 죽었으나 집식구 네명과 고아 여섯은 살아남았다. 서춘한, 방춘옥 등 네 고아는 해방후에 연변고아원에 보냈고 방호익이는 고중까지 졸업하고 사평기계학교에 갔다가 그곳에서 장가를 갔고 정금옥이는 그때 소학교까지 졸업시켰는데 불시로 집에 중병환자가 생기는 바람에 학교에 더 보내지 못했지만 지금도 장백진에서 별고없이 살고 있다

그는 일찍 지식의 중요성을 깨친 분이였다

자식들의 공부를 중시한 리성실은 자기 아들 딸들을 서울에 보내여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하였다.초신을 삼아서 팔고 감자를 심어서 농마엿을 만들어 팔아서는 자식들의 뒤바라지를 하였다. 심지어 입양한 고아들까지도 학교를 다니게 하였으니 리성실이 글공부를 어느 정도 중시했다는 것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해방후 토지개혁을 시작하면서 농회가 나왔다. 리성실은 마을에서 촌장직과 부녀회장직을 맡았다. 부녀회장사업을 할 때 리성실은 “문맹을 퇴치하자!”는 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낮에는 밭에 나가 일하고 저녁이면 야학에 나가 사람들에게 조선어문을 가르치고 혁명가요를 배워주느라 눈코 뜰 새 없었다. 그 때 이도강의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던 사람들이 열성분자인 리성실의 아낌없는 노력으로 조선어를 배우게 되였고 <총동원가>, <리홍광가>, <유격대행진곡>, <적기가> 많은 혁명가요들을 배우게 되였다

1948년 2월, 리홍광지대가 해외로 이동하면서 리성실을 함께 가자고 여러번 사람을 파견하여왔으나 리성실은 굳이 만류하고 선렬들의 피가 물든 이도강에 그냥 남았다. 리성실은 1968년에 73세를 일기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글 김금선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