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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지금 39]련화촌에는 최의사가 있었다

편집/기자: [ 김정함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1-21 13:34:11 ] 클릭: [ ]

산재지역 농촌에서 41년간 진료소를 경영해온 최길순 의사를 만나다

장춘시 쌍양구 이북 지역에 살고 있는 촌락들에서는 최의사, 하면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가 바로 쌍양구 평호(平湖)가도판사처 련화촌에서 41년간 개인 진료소를 경영해온 최길순(68세) 어르신이다.

2018년 년말에 진료소를 접고 ‘퇴직’을 고하고는 쌍양시가지 아빠트에 살고 있는 최의사, 좀 홀가분하게 살고저 했지만 여전히 ‘환자’ 친구들이 수시로 찾는 바람에 ‘의사’ 모자를 종시 벗을 수 없다며 행복한 ‘귀찮음’에 시달린다.

지난 초겨울 기자와 련화촌에서 만났을 때에도 전화가 쫓아왔었다. 한참을 통화‘진찰’을 하고 나서야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전화번호를 바꾸지 못합니다. 매일 찾는 ‘환자’가 있어서요.” 경상도 억양의 최의사의 말이다. 당지 조선족들은 보편적으로 조선어와 한어를 섞어서 구사한다.

환자의 전화를 받고 있는 최의사

“그래도 최의사를 찾아야 시름이 놓인다”며 간청하는데야 어쩌겠냐고, 찾는 전화마다 성심껏 들어주며 여차여차 일러주고 약처방도 내여주고 지어 막무가내로 찾아오는 환자도 접대하면서 ‘무사봉헌’을 하고 있단다.

이에 곁에서는 “처방비라도 받으시구려” 권고해오지만 “수입을 생각하면 애당초 진료소 문을 닫지 않았지요.”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재미랍니다.” 하며 자부심에 넘쳐 말하는 최의사다.

잔치날 신랑을 ‘우시군’으로 알던 일

“내가 어린 시절 얼마나 곤난했느냐면…” 최길순 의사는 오늘이 있기까지 줄곧 동력으로 되여온 잊지 못할 경력들을 우선 들려준다.

그의 형제들은 엄마가 다르거나 아빠가 다르거나 지어는 아빠 엄마가 다 다르거나 다 같은 등 네가지 출신으로 되여있었다. 그가 8살 나던 해 이런 5형제가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찍게 되였다. 큰누나가 첫 로임을 타갖고 외지에서 집에 왔던 것이다. 그런데 내가 알사탕 자랑하러 나간 사이 형제들이 사진 찍으러 갔을 줄이야. “왜 나만 빼놓고?” 울먹이며 말하는 억울한 항의에 엄마는 “너 열두곳도 기운 옷을 입고 사진이 다 뭐냐…” 하며 말끝을 흐린다. 그래도 철없는 ‘나’는 만사불구하고 뛰쳐나가 뒤집 친구의 헐렁한 옷이나마 빌려입고 사진관이 있는 웃마을로 뛰여갔다.

지난 이야기로 흥이 도도한 최길순 어르신, 론리정연하게 말씀도 변설이시다.

형제들 중에 그부터 량부모의 친자식이였다. “어머니가 대단한 분이셨죠.” 배다른 자식들을 차별이 보이지 않게 똑같이 대하며 키웠고 없는 형편에서 친자식을 홀대할 수 밖에 없은 당시 어머니의 마음인들 오죽했겠냐며 말끝을 흐린다.

“장가 갈 때에도 얼마나 곤난했는지 모릅니다.” 잔치날 입고 나선 첫날옷이 변변치 못한 데서 상객으로 따라간 모직 정장 차림의 자형을 신랑으로 알고 모시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며 입을 다시는 최의사.

“평생 잊지 못할 겁니다. 모두가 가난 탓이였지요.” 그래서 철이 들면서 갖게 된 신조라면 “우리 가문의 생활조건은 꼭 내 힘으로 개선해내고야 말리라!”는 것이였단다.

월급쟁이를 거절하고 농민으로

장백현 금화향 산골에서 태여난 최길순(1952년 출생)은 일찍 전 현 일등의 성적으로 중학교에 입학하며 총기를 자랑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대학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68년 련화촌으로 이사오고 이어 쌍양조중을 졸업하며 ‘광활한 천지’ 농촌으로 향했다. 16세부터 농사일을 하며 련화촌 공청단 서기와 민병련장을 겸해오던 7년 만에 당시 유일한 출로였던 추천을 받아 장춘위생학교에 입학했고 3년간 열심히 의학 공부를 했다. 졸업 후의 방향은 향진병원 취직, 이는 당시 모두가 오매에도 바라던 월급쟁이가 되는 길이였다. 그러나 그는 거절하고 다시 농민이 되였다.

20대 시절의 최길순 의사

당시 그의 생각이라면, 월급 38원을 받아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부모님에 세 동생을 끝까지 공부시킬 수 없다는 것이였다. 농민으로 촌위생소 의사를 하면 촌에서 주는 공수가 38원 로임보다 높다는 계산과 함께 집에 농사일도 거들 수 있다는 판단도 따랐다. 부모님은 극구 말렸지만 그의 선택은 변함없었다. 그때가 1970년대 말이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선택이 맞는 것이였지요.” 세 동생 모두 공부로 출세했고 자신도 오늘의 충실한 만년을 맞아오기에 이르렀다며 최의사는 감개한다.

개체진료소의 길은 험난했다

개혁개방과 함께 촌위생소는 개체진료소로 되였다. 련화촌은 조선족과 한족이 함께 화목하게 사는 혼합동네다. 부근 촌들에도 거의 전부 한족이고.

농촌에서 처음으로 하는 개체진료소인지라 그 길은 험난했다. 주위에서는 최의사가 가짜약을 판다느니, 그러다 들켜서 벌금당했다느니, 주사를 잘못 놓아서 아이가 죽었다느니, 깡패들이 밤중에 뛰여들어 최의사를 랍치해 몇만원을 내고 풀려났다느니… 별의별 터무니 없이 한심한 소문이 다 돌았다.

“이런 상황에서 견지한다는 게 참 힘들었어요.” 그래서 ‘어디 두고 보자’ 벼르다가도 정작 환자로 찾아오니 의덕이 우선이 되더란다. 끝내는 주위로부터 “그래도 최의사가 대단해!”라는 한결같은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동료들 사이 경쟁도 치렬했다. 하루는 늦은 밤인데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查夜, 查夜(야간검사)!” 하고 웨쳤다. “결국 닥칠 것이 닥쳤구나!” 최의사는 맞닥뜨려보리라 작심했다. 급해맞은 안해가 이웃에 사는 시동생(련화촌소학교 교장)과 그의 친구에게 전화했다. 이들이 달려왔고 얼마 후 소란하던 문밖은 마침내 잠잠해졌다.

“이튿날 맥이 탁 풀리더라구요.” 그냥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지, 놀라신 어머님은 자리를 뜨자고 조르고. 그러나 최의사는 동요할 수 없었다. 아무 데를 가도 이 고비는 꼭 넘겨야 할 것이였다. 유일한 대책이란 방범문을 하는 것이였다. 대문도 창문도 전부. 후에 알고 보니 아닌 게 아니라 한 의료계통 내에서 한 짓이였다. 정당한 경쟁으로는 이길 수 없으니 깡패들과 짜고 든 것이였다.

“40여년을 거치며 이런 일 뿐이였겠나요…” 그 어려움을 한마디로 일축하는 최의사.

“딱 내가 못살던 때의 모습이여서”

진료소가 점차 립지를 굳히고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물론 의술이 첫째가는 조건이긴 하지만 의덕이 특히 중요함을 느꼈습니다.” 그의 결론이다.

최의사의 진료소는 주로 농촌 환자를 상대하다 보니 경제여건 상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마주하면 “딱 옛날 내가 못살던 때의 그 모습”이여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외상으로 병을 봐주고 후에도 갚지 못하면 아예 면제해버리고. 진료소를 접으며 정리할 때 보니 1만 5000원 외상이 아직 남아있었다. 흔연히 그대로 덮어버렸다고 한다.

대신 지금도 어느 동네에 가나 옛날 최의사의 덕을 입었다며 감사해하는 사람을 종종 만나게 된다. 이때마다 그는 ‘내가 제대로 살아왔구나’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며 이는 “평생을 의사로 살아온 보람”이라고, “돈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라고 ‘자랑’한다.

“41년간 일, 일만 했어요!”

간호사도 따로 없이 진찰과 치료 모든 것을 혼자서 해야 하는 그의 하루 진료는 숨 돌릴 사이 없이 바빴다. “환자수가 하루 평균 40명이였거든요.” 지금 돌이켜보면 어떻게 해왔던가 싶다며 자기로도 감탄하는 최의사다.

보통 아침 3~4시에 기상하면 저녁 9시까지 진료소에 붙어있는다. 진료소 일을 지체시키지 않으려면 될수록 외출을 삼가해야 했다. 그래서 평생 유감도 없지 않다고 한다.

장인의 림종에 모든 일을 제쳐놓고 달려갔지만 장례에 못 참가한 유감, 자형이 돌아갔을 때에도 밤차로 새벽에 도착해 장례에 참가하고는 오후로 되돌와 어머님의 핀잔을 들었던 일…

“제가 이 정도로 일, 일만 했어요…” “그러나 솔직히 이렇게 일해왔기에 환자들 승인을 받았고 내 가정 경제번신도 실현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두 딸 모두 대학교 공부를 시켰고 성가 때에는 그의 로모마저 “눈이 휘둥그래지며 혀를 끌끌 찰” 정도로 엄청난 지참금까지 두둑하게 넣어주었고 지어 두 딸의 평생보험까지 사서 담당해온 아버지다. 안해로부터도 평소의 ‘깍쟁이’에서 모든 것을 앞만 바라고 달려온 원견성 있는 남편으로 리해와 높은 인정을 받기에 이르렀고.

41년간 견지해온 진료기록

최의사는 41년간의 진료소 일상에 하루도 빠짐없이 진료기록부를 적어왔다. 아무리 바빠도 매일매일 기록하면서 그날 장부는 그날로 결산을 마쳤다. 그 목적은 두가지였다.

하나는 당날 수입을 당날로 결산하면 자기로 자기를 감독하고 추진할 수 있었다. 다른 하나는 처방지를 매일 검토해보면서 미흡한 부분을 발견하면 즉시 보충하기에 처방을 점점 주도면밀하고 완정하고 완벽하게 할 수 있었다.

“혼자 하는 일이다 보니 감독하고 독촉하는 사람이 없기에 이런 방식으로 자신이 라태해지지 못하도록 재촉하고 추진했습니다. 적어도 전날의 ‘임무’에는 미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날마다 자신을 편달하며 초월하기에 애썼습니다. 참말 쉽지 않았어요!”

진료소도 원래의 살림집 한칸을 사용하던 데로부터 규모를 늘여 새로 짓고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무슨 일이든 대가 없이 성공하는 법이 없지요.” 최의사가 하는 의미심장한 말이다.

“왔던 환자는 99%가 다시 찾아요”

“오직 나한테 왔던 사람은 99%가 다시 찾아와요.” 의료사고 한번 없이 40여년을 달려온 최의사가 성공의 표준으로 삼는 ‘자랑거리’다.

의료수준 제고는 영원한 과제였다. 진료 과정에 어떤 문제에 부딪치면 이를 과제로 삼고 거듭거듭 의학서적을 뒤지고 사고하고 연구하고 림상실천을 거듭하며 자신의 의학지식으로 굳혀왔다. 이중에 아이들 감기 고열 근육주사 처방은 최의사의 유일한 비방이다. 곁에서 눈독들을 들이지만 누구한테도 내놓지 않고 있다고 한다.

그의 진료소는 가격 또한 “헐해서 남의 절반”이고 “엉큼하게 붙는 것”이 없다. 그의 의료 원칙이라면 약으로 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주사를 놓지 않고 주사 또한 근육주사가 우선이다.

그래서 부근에는 “얼라(어린애)들 감기 고열에 전 구에서 궁디주사(근육주사) 놓는 건 최의사 뿐이다”는 소문이 퍼져있다. 근육주사 한대에 10원이면 고열이 물러난다. 약까지 곁들여도 “아이들 감기에 15~16원이면 충분해요”다. 주위에서는 “당신 10원 받고도 돈이 남는가?”며 못미더워한다. “그래도 절반은 남아요.”가 최의사의 대답이다. 이런 의사를 왜 환자들이 찾지 않겠는가.

“지금은 남 부럽잖게 살고 있지요”

‘좋은 사람은 복이 따른다’는 말이 그른 데 없는 같다. 마침 최의사가 진료소를 접던 해부터 향촌의사들에게 퇴직제가 실시되였다. 그래서 최의사는 영광스럽게 41년 ‘근무년한’으로 ‘퇴직’을 고하고 매달 재정에서 발급하는 ‘생활보조’를 향수하고 있다.

지금 행복할수록 옛날 수고스러움이 더 새삼스럽고 안해의 뒤받침이 고맙게 느껴진다는 최의사, “우리 집사람 만큼 고생한 사람 없을 거예요.” 하며 안해의 로고를 높이 산다.

최길순, 백명월 부부가 회갑잔치 때 남긴 기념사진

최의사의 안해 백명월씨는 겉보기에도 현숙함이 한눈에 안겨오는 녀성이다. 시부모님을 모시고 시동생들을 춰세우고 자녀를 키우는 등은 제쳐놓고 근 20무지기 땅을 거의 혼자 부치며 농사를 지었고 터밭 일마저도 전부 혼자 해왔다고 한다. 거기에 진료소의 자질구레한 후근일까지 모두 담당하면서.

행복한 대 가족

“우리 가족은 안해 뿐만 아니라 형제들까지 모두 마음씨 무던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손이 잘 맞는 화목한 대가정입니다.” 이미 가정을 이루고 애 엄마가 되고 사회의 중견이 된 딸네들을 포함해 “지금은 다 남 부럽잖게 살고 있구요.” 하며 자부에 넘쳐 말하는 최의사다.

구로인회 회장으로, 새 촌주임으로 충실한 만년

현재 쌍양구조선족로인협회 회장으로 충실히 보내고 있는 최의사, 6년전부터 맡아온 회장 직인데 진료소를 경영할 때에는 두 일을 함께 하려니 참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내가 사욕을 차렸더라면 이렇게 못합니다. 순 봉사정신이였습니다.” “반날씩 년간 60일, 경제수입 2만원 차이 나더라구요.” 역시 기록부에서 나온 장부 결산이다. 하여 다른 사람을 회장으로 선택하고 “년간 2만원을 기부할게요.” 하며 나눕기도 했지만 오늘까지 오게 되였단다.

근래에는 로인회 활동도 재래의 틀에서 벗어나 여러가지 새로운 형식을 탐색하며 실사구시적으로 조직하며 재미를 누리고 있다는 최회장, 그러나 아무 일에도 쉬운 일은 없다고 덧붙인다.

우리 취재팀에 촌민위원회 구성원들을 소개하고 있는 최길순

지난 가을 련화촌에서의 길림신문사 당원 실천활동을 주선해주던 최길순(오른쪽)

50이 넘어 입당하고 련화촌 당지부 위원으로, 여직껏 ‘무관왕’으로 활약해온 최의사, 촌서기 진득평(陈德平, 한족)으로부터 ‘형님’으로 불리며 의사로서도 촌민으로서도 민족단결 실천자로 꼽히고 있다. 주동적으로 가두 당지부를 찾아가 핸드폰 ‘학습강국’에 등록하고 대학 교수로 있는 사위와 서로 심득을 교류하고 학습점수를 비기는 공산당원이다. 더우기 2020년 새해부터는 련화촌 촌주임의 중임을 떠메고 ‘청춘’을 불사를 의지로 충만되여있는 최길순 어르신이다.

시작부터 인생 목표가 명확했고 그 실현 과정에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사명감을 안고 분투해온 최의사, 41년간 곁눈 한번 팔지 않고 한우물을 파온 그의 집념은 오늘날에 이르러 주위의 인정을 넘어 자녀들, 지어 손군들에까지 이어져가고 있어 무엇보다 더 보람을 느낀다는 최길순 어르신이다.

/글 김정함기자, 사진 정현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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