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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75)민족 운명의 갈림길에서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20-01-15 16:03:52 ] 클릭: [ ]

연변 인민 쏘련 홍군을 열렬히 환영

중공연변위원회 설립, 당조직 공개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

1945년 8월 10일 밤, 룡정 대성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박근식은 몰래 모스크바 한어말 방송을 듣고 있었다. 낮게 띄워놓았으나 너무나도 똑똑히 들려오는 벽력같은 뉴스였다. 쏘련정부가 8월 8일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것이였다.

박근식은 강동주, 김승호, 유일환 등 친구들을 리상욱네 집에 모여놓고 격동에 넘쳐 뉴스의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들은 쏘련 홍군이 연변으로 곧 진격해들어올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튿날인 8월 11일,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제1차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거리에 내다붙일 선전문이 채택되였다.

13일과 14일 밤, 위원회 성원들은 다시 리상욱네 집에 모여 제2차 회의와 제3차 회의를 열었다. 토의 끝에 전윤필, 림정호, 윤철환, 김동우 등을 위원회에 더 받아들이고 강동주와 박근식에게 쏘련 홍군을 환영하는 환영사를 쓸 임무를 주었다. 다른 성원들은 군중 속에 들어가 선전고동공작을 하도록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환호하는 연길 시민들.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의 무조건투항조서가 방송되였다. 이에 비밀리에 행동하던 위원회는 반공개적으로 활동을 했다. 그 날 밤, 위원회에서는 제4차 회의를 열고 쏘련홍군환영대회를 소집할 문제, 시위행진 로선 등을 토의 결정했다.

8월 10일, 훈춘이 해방되고 15일, 왕청이 해방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7일, 룡정시민들은 박근식과 유일환의 인솔하에 모아산을 향해 떠났으나 쏘련 홍군이 연길에 진주하지 못해 되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18일에야 쏘련 홍군이 연길에 진주했다. 이 소식을 들은 룡정시민들은8월 18일 8시, 환영위원회의 지휘하에 동흥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간단한 동원대회를 가진 후 대렬을 지어 룡문교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붉은 띠를 두르고 군마를 탄 전윤필과 유철환이 대렬 선두에 섰다.

쏘련 홍군은 이날 아침에 벌써 룡정 교외에 진주하고있었으며 다른 한 부대는 심상소학교에서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고 있었다.

룡문교를 지난 행진대렬은 도중에 쏘련 홍군을 만났다. 홍군 전사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는 선전차를 앞세우고 천천히 룡정시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행진대렬 속에서 열광적인 환성이 터져나왔다.

“우라!”

“만세!”

환영대렬은 ‘3.1’소학교 운동장으로 움직여갔다. 여기에서 전윤필의 사회하에 2만여명이 참가한, 쏘련 홍군을 환영하는 군중대회가 열렸다. 박근식이 쏘련 홍군의 승리적인 룡정 진주를 환영하는 열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대회의 결정에 의해 박근식이 축기와 ‘환영사’를 지니고 연길 쏘련 홍군사령부를 찾아갔다. 박근식으로부터 ‘붉은군대 승리’란 글이 수놓아진 축기와 대회에서 채택된 ‘환영사’를 받은 연길 쏘련 홍군 경비사령부에서는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에 여섯가지 지시를 내렸다. 룡정에 돌아온 박근식은 환영위원회 제5차 회의를 소집, 사령부의 지시를 전달했다. 회의에서 강동주가 위원회 창립이래 8일간의 공작을 총화한 후 ‘쏘련붉은군대환영위원회’가 자기의 력사사명을 완수하였다고 선포했다.

회의 후 환영위원회의 9명 성원은 쏘련 홍군 경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각 계층 군중 속에 들어가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녀성동맹 등 인민단체의 조직사업을 했다.

운명의 갈림길에서

8월 18일, 위만주국 황제 부의는 길림성 룡화에서 ‘퇴위’한 후 일본으로 도망치려다가 심양비행장에서 체포되였다.

8월 20일, 연길 쏘련 홍군 경비사령부는 간도성림시정부를 설립하고 원 위만간도성 성장 윤태동을 림시주석으로 한다는 제1호 명령을 반포했다. 그 후 쏘련 홍군의 허락으로 연길현림시정부가 설립되고 원 위만현장이였던 애영균이 현장을 맡았다. 얼마 후 애영균은 연길현치안유지회(延吉县治安维持会)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이 유지회는 국민당 길림성판사처의 조종을 받고 있었는데 대다수 성원들은 위만주국 잔여세력들이였다. 이 자들은 치안유지를 명목으로 반혁명활동을 진행했는바 10월에 연길현민주대동맹이 성립되자 핍박하여 해산하게 했다.

광복을 맞아 거리에 떨쳐나서 시위하는 연길 시민들.

8월 26일, 박근식, 전윤필 등은 룡정에서 인민무장조직인 룡정별동대를 조직했고 화룡현 평강구 장인강 농민들도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 패잔병들의 총 20여자루를 빼앗은 후 인민무장조직인 장인강자위대를 설립했다. 연길, 룡정, 조양천 등지에서 선후로 로동자동맹, 농민동맹, 청년동맹, 부녀동맹 등 혁명군중단체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였다.

반동세력들도 가만히 있으려 하지 않았다. 위간도성 군정기관이 와해되자 일부 반동세력들은 국민당 특무의 조종하에 연길, 룡정 등지에 ‘국민당길림성연변판사처’ , ‘국민당연길현당부’ 등 간판을 걸고 일만군 잔여세력과 토비 등을 긁어모아 ‘별동대’, ‘자위군’, ‘치안유지회’ 등 반동조직을 묶었다. 일만군 잔여세력인 왕대정, 안병일 등은 고동하지방유회를, 화룡현 송하평탄광의 토비괴수 곽영춘은 200여명을 긁어모아 반공(反共) ‘보안대’를 결성, 100여자루의 무기를 갖고 있었다. 왕청현 천교령에서도 국민당 특무의 조종하에 일만군 잔여세력 500여명을 긁어모아 토비무장대를 세웠다. 라자구에도 토비무장이 세워졌다.

9월 2일, 일본정부가 무조건투항서에 서명, 이로써 중국인민의 위대한 항일전쟁은 승리적으로 결속되였다.

“그러나 항일전쟁승리의 기쁨도 잠간이였습니다. 국민당 반동파들이 항일전쟁승리의 과실을 빼앗으려 반인민적이며 반력사적인 역행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력사적인 시기에 중국에 거주하고 있던216만 우리 민족은 평화와 민주를 쟁취하고 새 중국을 건설하기 위해 국민당과 날카롭게 맞서 싸우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 반동파 사이의 사활적인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느 켠에 서는가 하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게 되였습니다.”

당시의 정세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견해였다.

애국과 매국, 반일과 친일, 자기 희생과 보신을 가르는 착잡한 분해과정이 ‘8.15’의 포성과 함께 민족 내부에서 빠른 속도로 진행되였다. 각자는 자기의 인생관에 따라 양극에도 붙고 음극에도 붙었다. ‘8.15’ 해방은 민족의 각 성원들의 동향과 본심을 식별하는 하나의 시금석과도 같은 작용을 하였다. 어디로 갈 것인가? 중국의 대다수 조선인은 민족의 운명과 전도에 관계되는 력사적 선택 앞에서 단연히 공산당 켠에 서게 되였다. 이에 대하여 원 연변력사연구소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1945년 가을, 룡정에 세운 ‘동북해방기념비’

“이것은 절대로 우연한 일이 아니였습니다. 근 반세기 동안 벌어진 피어린 반일투쟁 속에서 조선족인민들은 공산당을 믿게 되였습니다.

첫째로, 조선족인민들은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주체민족인 한족인민들과 어깨 겯고 싸워온 영광스러운 혁명전통과 이러한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발양하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일으킬 수 있는 민족의 기둥과 중견들을 갖고 있었습니다.

둘째로, 동북 경내에 살고 있는 조선민족은 국민당에 대해 감정이 없습니다. 이와 반대로 항일전쟁시기 공산당은 영향력을 끝없이 확대해왔었고 조선민족과 두터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로, 공산당이 동북에서 실시한 로선, 방침, 정책이 조선민족 인민의 념원과 리익을 구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절대다수의 조선족들은 중국국적을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국적이 없으면 토지를 분여받을 수 없고 토지개혁에 참가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은 조선족의 이중적인 국적을 승인하고 중국공민이 가져야 할 권리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는 중국공산당의 조선족 인민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공산당은 일본 침략자가 빚은 조, 한 두 민족간의 대립과 반목의 력사적 악과를 가시고 동북의 정세를 안정시키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놀았습니다.”

반동세력에 맞서

1945년 9월 15일, 중공중앙 정치국은 중공중앙 동북국을 설립할 결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팽진을 서기로 하는 동북국이 산생되였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좇아 13만명의 인민군대와 2만명의 간부가 동북에 파견되여왔고 9월 18일, 팽진 등은 심양에 도착하여 사업을 개시했다.

당시 조선족 집거구에 들어온 혁명력량은 두갈래였다. 한갈래는 팔로군 총사령 주덕의 명령을 받고 동북에 진출한 조선의용군이였다. 그들은 동북 경내에서 조선의용군 제1지대(남만), 제3지대(북만), 제5지대(동만), 제7지대(길림지구)를 세웠다. 다른 한갈래는 쏘련 홍군과 함께 온 동북항일련군 선견대로서 그들은 연변과 목단강에 주둔하여 연변경비1려와 목단강군구 14퇀 13영, 15퇀 3영을 조직했다.

일본이 무조건 투항하자 국민당은 동북을 접수하려는 기미를 보였다. 이에 중공동북위원회(서기 최석천, 즉 최용건)는 ‘동북항일련군이 쏘련 홍군과 배합하여 동북의 전략요지를 먼저 점령한다’는 방침에 따라 동북에 온 후 장춘, 심양, 할빈, 가목사, 목단강 등지로 간부들을 전격 파견했다. 다른 한갈래는 김일성의 령솔하에 조선으로 진출했다.

‘8.15’ 광복을 경축하는 연길 시민들의 서광장대회장.

항일련군 부대의 전략요지는 도합 12개의 중심도시로서 장춘(주보중이 책임), 할빈(장수전, 즉 리조린이 책임), 연길(강신태가 책임), 치치할(왕명귀가 책임), 북안(왕균이 책임), 해륜(장광적이 책임), 수하(진뢰가 책임), 가목사(팽시로가 책임), 목단강(김광협이 책임), 대련(원래는 동승빈이 7명을 거느리고 갔으나 이미 쏘련군이 접관하였기에 장춘으로 철퇴) 등지였다. 이 밖에 매개 큰 전략요지 아래에 또 각기 약간의 작은 전략점을 두었는데 50개에 가까왔다.

항일련군이 각 전략요지에 분포된 후 중국공산당 조직을 세우고 군대를 조직하여 인민정권을 세우는 등 사업들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14년간 일제가 통치하던 동북에 진정으로 인민이 주인된 새로운 사회환경을 마련하기에 노력했다.

9월 18일,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에 있던 연변분견대는 강신태의 인솔하에 목단강을 거쳐 연길에 도착했다. 연길분견대의 성원들로는 강신태, 최시영, 전운화, 김만익, 림춘추, 류진봉, 조희림, 류상전, 류희문, 김창봉, 박락권, 최명석, 정경숙(녀), 김옥순(녀), 석동수, 강위룡, 김명주, 박춘일, 오죽훈, 김룡근, 홍태학, 려영준, 려련생, 오량본, 상유선, 선포천, 맹도길, 염하동, 임철, 손장상 등이였다. 강신태가 간도주둔 쏘련 홍군 경비사령부 부사령으로 임명되였다. 돈화에 진주한 분견대 성원들로는 류건평, 구회괴, 리문장, 박영선(녀), 심봉산, 류보평, 류복해, 주복창, 사옥곤 등이였다.

이 두 분견대는 쏘련 홍군과 배합하여 동만 각지에 주둔하고 있는 항일련군 선견대와 함께 군중을 발동하고 인민무장을 조직하여 일본제국주의와 괴뢰만주국의 잔여세력을 숙청하고 국민당과 토비세력을 타격함으로써 혁명력량을 발전시켜 해방 초기 연변의 사업을 개척했다.

9월 19일, 연길에서 3만여명 회원을 대표한 600명이 참가한 연변 로동자, 농민, 청년, 부녀 동맹위원회 대표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 ‘연변로농청부총동맹(延边劳农青妇总同盟)’ (10월에 연변인민민주대동맹으로 개명)이 설립되였다.

9월 20일, 간도성림시정부는 화룡현림시정부를 설립, 원 위만현장이였던 진앙근을 현장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했다. 9월 30일에는 쏘련 홍군 경비사령부의 지령에 의해 왕청현림시정부를 설립, 소립동을 현장으로 임명했다. 한편 돈화에서는 위만현장 대광원이 쏘련 홍군에 체포, 쏘련군의 지지하에 돈화현림시정부를 설립, 류화일을 부현장으로 임명했다. 류화일은 암암리에서 국민당 특무와 결탁하여 돈화현공안대를 설립했다.

10월 5일, 주보중은 연변지구 공작에 대한 지시편지를 강신태에게 보냈다. 주보중은 국민당 군정이 동북에 진입해 들어오는 긴급정황을 강조하면서 빨리 정권 건립과 인민무장부대 건립을 다그치라고 지시했다. 10월 20일, 동북위원회의 지시 정신에 근거하여 중공연변지구공작위원회는 강신태의 령도하에 1개월간의 준비공작을 마친 후 중공연변위원회를 설립, 당조직을 공개했다. 강신태가 서기 겸 군사부장으로, 강동주가 조직위원, 지희겸이 선전위원, 전윤필과 박근식이 위원으로 되였다.

 연길시 ‘쏘련 홍군에게 감사드리는 대회’(1946년 4월 24일)

중공연변위원회는 아래와 같은 임무를 제정했다. 첫째, 군중을 발동하여 혁명군중 조직을 건립하며 일제와 위만주국 자산을 몰수하고 생산을 회복한다. 둘째, 원 동북항일련군 간부들을 골간으로 연변경비사령부를 건립하며 각 현에 경비퇀을 건립한다. 이런 무장은 토비와 일만군 잔여세력을 숙청하고 지방치안을 유지하며 인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한다. 이로써 쏘련 야영에서 건립된 중공연변지구공작위원회는 력사적 사명을 완수, 공작을 정지하게 된다.

10월 20일, 주보중은 원 중공동북위원회 서기 최석천(최용건)과 함께 심양에 도착, 중공 동북국에 동북항일련군 14년간의 투쟁려정과 중공동북 당조직 정황, 및 쏘련 홍군을 협조하여 동북에 들어온 후 전략요지를 점령한 정황 등을 상세히 회보했다. 팽진, 진운 등은 동북항일련군의 투쟁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동북국에서는 원 동북 각지 당조직 관계를 접수하기로 결정했다. 쏘련 홍군 속에 있는 항일련군 대원들을 잠시 철수하지 않기로 결정, 쏘련 홍군이라는 편리한 신분으로 계속하여 당의 임무를 수행하기로 했다. 주보중과 최석천은 중공중앙 동북국에 동북 당의 일체 조직관계를 인계했다. 이로써 중공동북위원회의 력사적 사명을 완수, 공작을 정지하게 되였다.

1945년 10월, 동북항일련군은 동북인민자위군(东北人民自卫军)으로 재편성되고 11월 3일에는 동북인민자위군과 관내에서 온 팔로군, 신사군 부대와 함께 동북인민자치군(东北人民自治军)으로 편성된다. 1946년 1월, 자치군을 동북민주련군으로 고쳤다. 그리하여 가렬처절한 나날에 동북 대지를 넘나들며 싸우던 항일련군은 자기의 력사적 사명을 완수하고 새로운 군대로 장성, 발전하였다. 당시 연변의 항일련군 분견대는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별동대, 자위대, 보안대 등 무장대오를 받아들이고 분견대를 골간으로 한 경비사령부를 세웠으며 강신태가 사령원을 맡았다. 그리고 산하에 경비 1, 2, 3퇀을 두었다. 이 부대는 그 후 동북인민자위군에 편입되였고 11월에는 동북인민자치군 간도(연길)분구 사령부로 되였는데 사령원은 그냥 강신태가 맡았다. 산하에 6개의 경비퇀을 두었는데 병력이 만 1,000여명이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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