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대형련재 중국조선족력사(73)]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3)

편집/기자: [ 유창진 ] 원고래원: [ ] 발표시간: [ 2019-12-30 18:28:16 ] 클릭: [ ]

불멸의 시인

윤동주 시집

윤동주의 첫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여나온 것은 1948년이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이나 지나 비로소 해빛을 본 것이다. 이 시집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이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 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의 일부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출판하련다는 소식과 함께 있는 시고들을 다 가지고 오라는 기별이 윤일주로부터 전해오자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씨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다닐 때 집에 가져다두었던 세권의 습작노트와 수많은 스크랩과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을 바라고 떠났다.

때는 남북대결이 첨예한 시기라 시국이 몹시 험악했다. 렬차에서는 사람마다 샅샅이 검사하면서 의심스럽기만 하면 잡아가두거나 물건들을 마구 압수하였다. 윤혜원부부는 룡정을 떠날 때 짐군을 삭내여 스크랩과 사진이 든 보따리를 맡겼다. 그 때를 오형범선생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런데 그 짐군이 차칸수색이 시작되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 화장실에 피신해 들어갔다가 아예 창문으로 스크랩과 사진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밖으로 던져버리고 말았잖고 뭡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였어요. 지금 윤동주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것은 이러한 원인에서입니다. 노트 세권만은 그래도 우리의 짐 속에 있어서 다행이였습니다.”

윤혜원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청진에 이른 우리는 교회당에서 우연히 박춘해(朴春海)라고 부르는 예쁜 처녀를 만나게 되였습니다. 눈에 너무도 익숙한 처녀였지요. 생각을 굴려서야 전에 사진으로 많이 보아오던 처녀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동주와 동창이고 딱친구였습니다. 동주오빠가 그녀의 사진을 집에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랑 아버지랑에게 보였고 나한테도 보이면서 ‘혜원아, 어떠냐? 이쁘지? 마음에 들어?’ 하고 물으면서 싱글벙글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주오빠가 그녀를 몹시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가능하게 그녀와 련애를 했을 수도 있고 어쩌면 결혼을 약속했는지도 모를 일이였지요.”

3.8선을 넘을 때 또 한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함께 3.8선을 넘던 어떤 사람의 보짐에다 윤동주의 노트를 간수했는데 그 사람이 너무 당황한 김에 그만 짐을 떨구고 온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전 속이 타서 재가 되는 것 같더군요. 그걸 지니고 어떻게 3.8선까지 왔다고 그럽니까. 우린 생명을 무릅쓰고 되돌아섰지요. 오던 길을 샅샅이 뒤지다가 요행 풀밭에서 그 짐을 찾았을 때 얼마나 격동되고 떨리던지 눈물이 마구 쏟아졌어요.”

윤혜원녀사는 눈물이 핑 돌아 말했다.

이렇게 습작노트만을 겨우 보전하여가지고 12월 22일 겨우 서울에 도착하였다. 하여 이듬해인 1948년 1월 30일, 정병욱이 보관하고 있던 자선시집의 19수의 시와 윤혜원녀사네가 갖고 간 노트 속에서 고른 12수를 합친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디여 출간하게 되였다. 정지용의 서문,

〈서시〉를 비롯한 31편의 유고작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인 유영의 추도시와 강처중의 발문이 순서 대로 수록되였다.

그 후 1955년 2월, 윤동주 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다시 간행되였다. 1968년에 간행된 증보판 시집은 5부로 나뉘여져있는데 1부엔 윤동주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는 도꾜시절에 쓴 시 5편, 3부엔 습작기의 작품들을, 4부엔 동요, 5부엔 산문인 〈트루게네프의 언덕〉, 〈달을 쏘다〉 등 5편이 실리였다.

사실 윤동주가 사망하기까지 활자화되여 발표한 작품은 고작 6편의 동시와 3편의 시, 그리고 한편의 산문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도 본격 문단활동과는 거리가 먼 《카톨릭 소년》 등 아동잡지와 조선일보 학생란 〈활천〉, 〈문우〉 등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시작품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모두 117편이다. 그중에서 동시가 35편 정도이다. 시인으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었으니 초판과 여러 차례 걸친 증보판 출판의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연변에서는 감감 모르고 있다가 1984년 연변에 다녀온 미중한인우호협회 회장 현봉학씨로부터 처음 시인의 신상이 연변에 전격 소개되게 되였습니다.”

오형범씨는 윤동주를 처음으로 연변에 알려준 사람이 일본학자 오오무라씨가 아니라 현봉학씨였다고 딱 짚어 말했다. 오형범씨의 증언은 현봉학선생이 쓴 〈윤동주의 유적지를 찾아서〉에서도 명확히 서술되고 있다. 이 글에서 현봉학선생은 이렇게 쓰고있다.

1984년 봄 어느 날, 서재필기념재단(필라델피아시소재)리사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태민씨(언론인, 전 경향신문사 부사장)댁에 잠간 들렸다. 우연히 그 댁에서 발견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 30 초판)에 매력을 느껴 빌려본 것이 나의 일생에 그렇게도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47년부터 ‘6.25’전쟁 3년을 빼고는 줄곧 미국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윤동주하면 일제말기에 옥사를 치른 애국시인이였고, 그의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라는 서시가 아름다왔다는 희미한 기억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락서로 오염되였고 찢어진 이 낡은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때 한구절 한구절 흐르는 그 시에 나는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나는 남은 생을 좀 더 아름답고 순박하게 살고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장한 정의감으로 싸울 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윤동주의 몸은 비록 흙으로 돌아갔어도 그의 얼, 그의 정신은 그의 시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확실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 해 8월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처음으로 중국방문을 하게 된 나는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애국시인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 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고 또 아무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위대한 애국시인이였음을 력설하고 래년에 다시 그 곳을 방문할 터이니 꼭 우리 일행이 그 유적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해두었다.

그 다음해인 1985년 7월, 제2차 단체중국방문을 했을 때 나는 오로지 윤동주의 묘소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룡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 리사장, 룡정중학교 유기천 교장 그리고 연변농학원 김동식교수 제씨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오시면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밤새 억수로 쏟아진 비 때문에 우리가 탄 뻐스는 동산묘지 언덕으로 올라가지를 못했다. 진흙땅에 묻힌 뻐스 뒤바퀴를 십여명의 힘으로 겨우 밀어내긴 했지만 비로 인한 험한 길을 자동차는 물론 걸어서도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어서 우리 일행의 묘소참배는 묘소를 눈앞에 두고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문인으로 알려진 내 동생 피터 현을 포함한 우리 일행의 실망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 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나큰 감동을 받었다는 일본의 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선생이 도꼬 히비야의 한 다방에서 윤일주씨를 만나 룡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곳의 략도를 그려받게 된다. 윤동주묘소와 그가 살고 있던 고향을 찾고저 하는 강렬한 충동으로 하여 1985년 오오무라부부(부인 조선인)는 연변으로 오게 되며 연변대학 권철, 리해산 등 교수와 향토력사에 밝은 한생철선생과 함께 윤동주묘소를 찾게 된다. 그 때 장면을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옛 동산교회묘지로 올라가는 흙길, 승용차로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구릉의 급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조선의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지나가고 그 좌측에 멀리 바라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흙 둔덕과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산밑 쪽의 묘비들은 넘어지고 부서진게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윤동주의 묘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고생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앞에서 걸어가던 리해산교수가 큼직한 비석을 찾아가 정면을 보니 ‘시인윤동주지묘(诗人尹东柱之墓)’라는 글이 보인다. 끝내 찾아낸 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산기슭에서 찦차로 10—15분 올라가서 비탈길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었다…

이 때로부터 불멸의 시인 윤동주가 완정한 모습으로 연변에 나타나게 되였다. 고향은 윤동주로 하여 진동을 받았다. 연변이 낳은 윤동주가 세계적인 시인인 줄을 깜박 몰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1980년대 중엽부터 윤동주는 해마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시인’, ‘좋아하는 시인’의 으뜸으로 뽑히고 있고 그 기세는 세계에로 물결쳐나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은 해마다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되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이미 30~40명 된다고 한다.

《정본 윤동주전집》의 저자 홍장학씨는 “윤동주는 변절과 배신으로 신음해온 우리 현대정신사의 중심에서 민족적 량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그리 많지 않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라고 쓰고 있다. 연변대학 권철교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겨레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정을 담은 노래이다”라고 했고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그의 시는 자아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 고뇌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 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다… 문익환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진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수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가 되였다. 아무튼 연변땅에 시심(诗心)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祭壇)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 아름다운 시편들은 한줄기 밝은 별빛이요, 우리 청소년들이 삶의 거울이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 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리 연변사람입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 윤혜원녀사의 말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조선민족의 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 시인으로 세인들 앞에 나섰다. 윤동주로 하여 연변과 우리 겨레는 이제 더 큰 긍지를 느끼며 자랑을 느낄 것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0

관련기사 :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