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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자동차공장의 재단사 언니 김오금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2-17 13:02:55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30)

제1자동차공장 차체공장(车身厂)에서 김오금녀사는 손끝이 여물기로 소문났다. 재봉일을 전혀 배운 적도 없었지만 그는 한복으로부터 솜저고리며 어지간한 솜씨로는 힘들다는 전통 헝겊단추까지 눈을 감고서도 척척 틀기도 했다.

 자동차공장의 정다운 재단사 언니로 불린 김오금녀사.

1932년 3월 생으로 올해 87세에 나는 김오금녀사는 당년에 직장에 출근하던 시절을 회억한다.

 "늦가을부터 자매들이 자기가 입을 솜저고리부터 자기 아이들의 솜저고리까지 천과 솜을 사갖고 와서 부탁했지요. 솜저고리에 달 헝겊단추는 또 얼마나 틀었다고요. 재봉가위를 직장에 두고 다닐 정도였어요."

점심시간에 직장에서 휴식도 못하고 동료자매들의 솜옷에 달 헝겊단추를 틀던 이야기다.

김오금녀사의 고향은 연변 화룡이다. 1954년 길림재정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장춘에 세워진지 1년밖에 안되는 제1자동차공장에 배치 받은 남편 송세일을 따라 그 이듬해인 1955년 11월에 4살 나는 어린 아들을 업고 장춘으로 왔다.

"처음에 와서 집에 먹을 소금이 거의 다 떨어져 나가서 사와야 하겠는데 글쎄 한어가 안 통해 소금알을 들고 상점에 가서 이런 것을 달라고 했지 말입니다. 어디 그것 뿐이겠어요, 아이의 솜저고리를 만들려고 솜을 사야겠는데 솜을 한어로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지요. 그래서 또 이불의 솜을 떼내서 갖고 가서 달라고 했다니깐요. 주변에 말할 사람도 없지 너무 답답해서 연변에 돌아가자고 남편에게 몇번이고 조르기도 했지요."

김오금은 처음 장춘에 왔을 때의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이야기를 꺼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오금의 남편 송세일은 다른 조선족동료들 가정에서도 존해하고 있는 류사한 상황을 고려해 공장지도부에 조선족들을 한곳에 집중시켜 살게 할 데 대한 보고서를 올렸다. 공장에서는 이에 대해 매우 중시를 돌리고 조선족들을 한 아빠트에 집중시켜 살게 했다.

"그래서 저희는 오늘까지도 이 아빠트에서 60년 넘게 지내고 있어요. 이전에 이 아빠트는 조선족동네라고 불리웠는데 20가구도 넘게 살았어요. 오손도손 얘기도 나누고 떡도 함께 만들었구요. 그리고 또 가을이 되면 김장에 넣을 빨간 고추를 돌절구에 빻으면서 재미있게 살던 동네였는데 그 때가 참 그립네요."

 
조선족동네로 불리웠던 자동차공장 ‘붉은 벽돌집'40동 아빠트.

1966년 김오금은 자동차공장의 차체공장 림시공 모집에 신청해 처음에는 반년 기한으로 해방패자동차의 차문을 만드는 직장에서 일했다.

"자동차 문의 손잡이가 들어가 붙는 안부분의 용접을 하는 일이였는데 제가 건강상황이 그리 안 좋은 것을 보고 저를 가르치게 될 사부는 일이나 제대로 하겠는가 하면서 어지간히 걱정된 모습이였지요. 그런데 생각과는 정반대로 얼마 배우지도 않고 용접을 척척 해내니 눈이 휘둥그래해졌지요."

솜씨가 날랜 김오금은 이렇게 몇번 보는 것만으로 마치도 숙련공처럼 일을 능란하게 해낼 수 있었으며 하루에 백개도 넘는 문을 거뜬히 용접하였다. 지금도 그의 손가락에는 용접불꽃이 튕기면서 생긴 상처 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당시에는 많이 아파도 단 하루도 병가를 내고 쉬지 못했어요. 그렇게 되면 저로 하여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보너스가 없어지거든요."

김오금의 재단솜씨를 잘 아는 동료자매들은 늦가을이 돌아오면 너도나도 찾아와서 겨울을 날 솜옷을 해달라고 부탁해왔다. 그래서 그는 집에 돌아와서는 밥술을 놓기 바쁘게 설거지는 학교 다니는 딸에게 맡기고 재봉틀 앞에 마주 앉아서 부지런히 손발을 놀려가면서 일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일하는 직장 사물함에 가위와 바늘 같은 재봉도구를 보관해놓고 점심 휴식시간에 쉬지 못하고 일했다. 그 모습을 보는 동료자매들은 우리 조선족 큰언니가 제일 좋다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호북 십언 제2자동차공장에서 온 견습공 처녀(앞줄 왼쪽 세번째)의 솜옷을 지어준 김오금(두번째 줄 왼쪽 세번째). 

"어떤 때는 하도 힘들어서 거절하려다가도 모두가 어렵게 사는데 하고 생각을 고쳐먹고 일감을 받은 적도 있었지요."

한번은 호북성 십언에 있는 제2자동차공장에서 처녀견습생 두명이 김오금이 있는 직장으로 왔는데 추운 동북에서 겨울을 날 솜옷이 없어 근심에 싸였다. 이때 김오금은 선뜻이 나서서 그 두 처녀견습생에게 솜옷 한벌씩 정성들여 만들어 주었다. 견습기한이 끝나서 돌아갈 때 그들은 김오금을 모처럼 찾아와서 그때 일이 고맙다고 하면서 두손을 꼭 잡고 석별의 눈물을 흘렸다.

1983년 퇴직 후에도 김오금의 재봉일은 늘어만 갔다. 지인들을 통해 한입두입 소문이 나면서 첫날색시들의 한복으로부터 로인들이 환갑에 입을 한복 그리고 로인협회의 무용복에 이르기까지. 1992년 장춘영화제 때에는 백명 조선족 단체무용단의 무용복을 제시간에 내놓기 위하여 코피까지 흘려가면서 작업을 했다.

"직장시절을 돌이켜보노라니 비록 힘들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저의 손재간으로 동료자매들을 도와주었다는 생각으로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흘러간 과거의 직장생활을 회억하는 김오금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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