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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살 소녀 꿈을 안고 자동차공장 로동자로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2-12 09:35:10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29)

제1자동차공장건설에 참가한 조선족로일대들을 찾아다니면서 이렇게 어린 나이에 공장에 입사한 분을 만나기는 처음이다. 지금 같으면 16살이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막 고중에 입학해서 한창 고중공부를 시작할 꿈이 많은 나이다.

“네, 그래요. 16살이 되던 해에 기술학교에 입학했는데 학교는 하루도 못 다니고 저를 포함한 남녀학생 60여명이 장춘에 있는 제1자동차공장으로 로동자로 뽑혀서 오게 됐지요. 아마 당시 로동자들이 많이 모자랐던가 봐요.” 1942년 2월 생인 박려숙녀사는 이렇게 1958년 10월 14일 제1자동차공장에 입사할 때 일을 날짜도 잊어먹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제1자동차공장 시절을 회억하는 박려숙녀사와 남편 김동해.

박려숙녀사의 고향은 공주령 진가툰이다. 1958년 여름에 공주령기술학교에 입학했는데 장춘에 있는 제1자동차공장에서 금방 입학한 학생들을 공장에 데려간다는 소식이 떨어졌다. 그때만 해도 교통이 불편하고 밖에서 도는 소식도 크게 모를 때라 부모들은 멀리 떨어진 장춘에 어린 자녀들을 보내거니 안보내거니 의논들이 많았다.

“저희 어머니도 저를 장춘에 보내는데 반대해 나섰지요. 한족말도 모르는 녀자애가 장춘에 가서 혼자 보낼 일이 태산같이 근심돼서 가지 말라고 말린거지요. 이때 아버지가 나서서 사람은 그래도 큰 곳에 나가서 한번 뒹굴어봐야 한다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가라고 등을 떠밀었어요.”

16살 되는 박려숙은 이렇게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어린 나이에 제1자동차공장의 로동자로 들어오게 되였다.

“처음에 승용차생산직장에 들어갔지요. 그때까지 아직 승용차는 정식 생산에 들어가지 못하고 한창 공장을 세우는 단계인 것 같았어요.”

1957년 5월 국가제1기계공업부에서는 제1자동차공장에 승용차를 시험제조할 데 관한 임무를 내렸다. 주덕은 승용차를 만드는데 참고하라면서 자신이 타고 다니던 외제 승용차를 직접 보내오기도 하였다. 자동차공장의 연구일군과 기술자 그리고 로동자들의 노력으로 이듬해인 1958년 5월에 ‘동풍 CA71'라고 명명한 첫 승용차가 나왔다.

그리고 그해 8월에 ‘홍기 CA72'로 명명한 홍기표 승용차가 생산선에서 내려왔다. 비록 승용차의 제조에 성공하였다고는 하지만 이 시기의 승용차는 거의 로동자들의 수공작업으로 완성되였으며 규모화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박려숙은 바로 이 시기에 승용차생산직장에 들어온 것이다.

그가 자동차공장에 들어와서 거의 일년이 지난 1959년 7월 자동차공장 3호문 남쪽에 만평방메터에 달하는 승용차생산직장이 준공되여 비로소 홍기표 승용차는 한곳에서 생산할 수 있게 되였으며 역시 그해 9월에 처음으로 생산된 30대의 홍기표 승용차가 북경 중남해에 있는 중앙령도들의 전용차량으로 교부되였고 그중 두대가 국경 10주년 검열차로 지정돼 국경절 열병식에 참가하게 되었다.

“저는 조립직장에서 홍기표 승용차의 내부장식을 하는 일을 했어요. 기술자들이 가르치는 대로 승용차 안에 들어가는 운전좌석이며 계기판이며 차문 안에 대는 보호판넬이며를 하나씩 장치하는 일이이죠.”

이렇게 박려숙은 16살에 제1자동차공장 승용차생산직장에 들어와서 1대 홍기표 승용차 생산에 직접 참가하였으며 1964년 6월에 승용차공장이 정식으로 설립되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홍기표 승용차의 창업단계인 1956년부터 1965년까지의 초창기 건설과정에 직접 참가해 자신의 힘을 이바지한 조선족건설자중의 한사람이다.

제1대 홍기표 승용차 내부장식 일을 하던 시절.

1965년 박려숙은 23살이 되던 해에 자동차공장 운수처로 자리를 옮겨 사무실에서 통신원 겸 타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다. “뭐니 뭐니 해도 한어글을 모르는게 큰 일이였어요. 그때는 활자를 찾아 기계타자를 할 때였지요. 글을 알아야 거꾸로 된 활자들을 찾던지 할거 아닙니까, 무척이나 힘들었어요.”

그래서 그 당시 공장의 허다한 로동자들이 다 그랬다싶이 그는 공장에서 꾸리는 업여학교에 다니면서 글을 배웠다. 오전 7시부터 10시까지 학교에서 글을 배우고 수업이 끝나면 부랴부랴 사무실에 나가서 자기가 맡은 일을 했다.

“그때 한 사무실에 있는 비서가 저를 많이 관심하여 주었지요. 원고가 전부 만년필로 쓴 손글인지라 알아보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제가 힘들어할 때마다 비서는 한글자한글자씩 저에게 가르쳐 주면서 용기와 신심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고마운 분입니다.” 박려숙녀사는 이렇게 어려움에 처했을 때 공장 업여학교를 다니면서 그리고 주변의 따듯한 도움을 받아가면서 차츰 새로운 일을 익혀나갔다.

그 후에도 박려숙은 1992년에 퇴직할 때까지 일자리를 두곳이나 옮겼지만 그래도 제일 인상이 깊은 곳이 운수처 사무실에서 일할 때라고 말했다. 비록 시작은 힘들었지만 그곳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때로는 제시간에 타자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홀로 사무실에 남아서 늦게까지 연장근무를 하던 일이며 자전거를 타고 문건을 전달하러 나갔다가 뒹굴어서 큰 사고를 당할 번한 일이며 일을 잘한다고 령도와 동료들이 칭찬하던 일이며... 박려숙녀사는 지금도 젊은 시절에 직장에서 바삐 보내던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하다고 말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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