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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68)-연변에서의 소부대활동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21 12:44:49 ] 클릭: [ ]

당조직 반일단체 새롭게 회복 일제 군사시설 파괴

친일 한간, 주구 청산 항일련군 새로운 투쟁 선고

대량의 소부대 동북에로 파견

“소부대활동은 1941년부터 시작되였는데 남영에 있던 제1로군에서만도 연변에 7개의 소부대를 파견하였다. 소부대의 주요한 활동내용은 첫째로는 이미 파괴된 공산당조직과 반일조직을 회복하는 것이며 둘째로는 쏘련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아있는 부대를 찾는 것이며 셋째로는 일본군의 초소를 습격하고 군사시설을 파괴하여 적들의 후방을 교란하는 것이며 넷째로는 민중들에게 항일련군이 살아있다는 것을 선고하려는 것이였다.

김일성이 지휘한 소부대는 왕청 쟈피거우로 나온 후 다시 몇개 소부대로 나뉘여 각지로 진출하였다. 김일, 림춘추 등은 왕청지대와 천보산지대로, 전문섭과 김홍수는 안도 처창즈부근으로, 한창봉과 한태룡은 장백현지대로, 류경수 등은 화전방향으로 각각 진출하여 활동을 벌였다. 려영준, 박장춘은 동녕현 로흑산지대에서 활동하고 박락권 등은 녕안현 목단강지대에서 활동하였으며 김명주, 김병수 등은 훈춘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군사정보수집은 매우 간고하였다. 례를 들면 1943년, 로흑산으로 진출한 려영준, 박장춘 등은 일본의 방어전선을 정찰하고저 직접 변복하고 일본비행장에까지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여 쏘련으로 전송하였다. 그외에도 그들은 동녕일대에서 적의 방어공사를 정찰하는 과정에 방어공사에 세워놓은 대포들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알아내고 정보를 제때에 아군의 지휘부에 전송하였다. 1945년 8월,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내린 후 그들은 목단강까지 나가 쏘련홍군의 진군로선을 무선전으로 지휘하였으며 일본군의 후퇴로선을 제때에 무선전으로 아군지휘부에 알려 쏘련비행기가 직접 일본군을 소멸하도록 담보하여주었다.

김명주도 1941년에 김병수와 함께 흑룡강성의 우쑤리강변의 호림일대로 소분대활동을 하러 나갔다가 1943년과 1944년 두차례에 걸쳐 차조구일대에 들어와 장기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면서 정찰활동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8월에는 마적달로 나가 쏘련홍군의 진공로선을 알려주었다. 이리하여 려영준, 김명주 등은 쏘련원동군사령부의 표창을 받았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소부대활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면서 “소부대활동은 특정한 력사조건하에서의 일정한 구역과 규정된 시간내에서 동북항일전쟁을 끝까지 진행하기 위한 유격투쟁의 한 형식이다. 소부대활동은 일제를 철저히 소멸하는데 있어서 마멸할 수 없는 공훈을 세웠다”고 피력했다.

동북항일련군은 쏘련경내에서 야영정치군사훈련을 벌리는 한편 동남만지역에서 광범한 소부대활동을 벌려 각지에 흩어져있는 항일련군부대를 회복 정돈하며 동남만과 조선 북부지역 인민군중들의 항일기세를 북돋아줌으로써 항일의 승리를 위한 튼튼한 토대를 닦기 위해 1941년 3월 20일부터 5갈래의 소부대를 동북 각지에 파견했다. 그중 가장 일찍 동북에 파견된 소부대는 김일성이 이끈 제1소부대와 안길이 이끈 제2소부대였다.

“우린 김일성부대다!”

김일성은 29명으로 조직된 제1소부대를 이끌고 4월 9일, 야영훈련소를 떠난 후 쥐도 새도 모르게 훈춘 중쏘변경을 넘어 장백산지대를 향해 전진했다. 이번 걸음에 중공동남성위 서기이며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인 위증민을 찾거나 그 소식을 알아오는 것이 소부대의 주요한 임무의 하나였다. 그러나 한달전인 3월 8일, 화전현 쟈피거우 목단령 이도하자밀영에서 장백산을 주름 잡으면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동북항일련군의 우수한 지휘원 위증민이 32세의 아까운 나이로 불행하게도 이미 타계했다는 것을 이들은 감감 모르고 있었다.

소부대는 적들의 삼엄한 봉쇄선을 피하면서 눈덮인 산속으로 행군하였다. 그러다 보니 행군속도가 빠를 리 없었다. 부대가 로흑산을 지나 헤이샤즈거우에 이르렀을 때 김일성은 집단부락을 기습하여 지방에 남아 활동하고 있는 항일련군부대에 우리가 왔다는 것을 알리자고 했다.

집단부락 성문보초막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자위단놈은 고래고래 지르는 성난 목소리에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밖을 내다보니 웬걸 한무리의 ‘일본군’이 버티고 서있지 않는가. 성문이 열리자 욱 몰려들어온 ‘일본군’중 사관복차림을 한 이가 보초놈을 모질게 닦아세웠다.

“바가야로! 무슨 놈의 꼬락서니야! 꾸벅꾸벅 졸면서 보초를 어떻게 서겠다는 거야!”

“하이, 죽을 죄를…”

자위단보초병은 꺽꺽거리면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어서 대장실로 안내하라!”

‘일본군’의 불호령에 시래기가 된 보초놈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면서 자위단실로 안내했다.

자위단놈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일본군’의 왕림에 쩔쩔매고 있을 때 벽에 걸려있던 총이며 혁띠에 차고 있던 총들이 눈 깜박할 새에 해제당했다.

“되질 놈들아! 우린 김일성부대다! 살겠거든 고분고분해라!”

벼락같은 소리에 자위단놈들은 그저 부들부들 떨 뿐이였다. 다 죽었다던 항일련군이 하늘에서 떨어졌나 땅에서 솟았나. 놈들은 얼이 빠져 눈이 화등잔이 되였다.

총 한방 쏘지 않고 집단부락을 점령한 소부대는 군중들을 모아놓고 선전고동사업을 벌리는 한편 남아있던 항일부대들이 소식을 탐지했으나 동정이 없었다. 이에 김일성은 대오를 이끌고 석두하자를 지나 소왕청부근의 쟈피거우에 이르렀다.

무전기까지 휴대한 소부대가 도가선(도문—가목사), 경도선(신경—도문) 철도와 여러 갈래의 큰길 곁에서 활동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였다. 김일성은 박덕산, 김철우 등더러 이곳에 남아있으면서 쟈피거우를 근거지로소성자, 도문, 동녕, 왕청 일대에서 적정을 조사하며 군중들 속에서 정치조직사업을 벌려 항일련군과 군중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반일혁명의 대중적 기반을 튼튼히 다지도록 지시하였다. 그외의 대원들을 거느린 김일성은 5월 12일 도가선을 넘어 왕청현의 삼차구, 다홍왜, 사하장과 돈화현의 황니허즈를 지나 경도철도를 무사히 통과한 다음 다시 돈화현 이도하자, 삼도하자를 거쳐 하발령 산줄기를 타고 안도현 한총구일대에 이르렀다. 1년전에 위증민과 헤여진 곳이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5월 20일, 소부대는 다시 세개 소조로 나누어 위증민과 기타 부대의 종적을 찾기로 했다. 동숭빈(한족)이 책임진 한개 조는 돈화현소재지부근의 이도하자, 고려모자, 유수천, 삼도황구, 사도황구, 마호, 륙과송 등지에서 위증민과 제1로군의 분산된 부대들의 종적을 찾을 임무를 맡고 류삼손(류경수)이 책임진 한개 조는 화전현 동부의 부루하, 쟈피거우, 로금창, 희춘잔 등지에서 제1로군 총부와 기타 부대의 종적을 찾을 임무를 맡았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거기에는 전광과 1로군 후방부 관부관의 밀영이 있었댔다. 제3조는 김일성이 직접 맡고 안도현 대전자, 대사하, 소사하, 화룡현 북부, 무송현 동북일대의 넓은 지역을 류동하면서 각 부대와 련락을 취하고 제1로군을 다시 수습하려 하였다.

그러나 두달 남짓이 찾았으나 위증민과 제1로군의 종적을 끝내 발견할 수 없었다. 7월 28일, 세갈래의 소조는 왕청현 대두천부근에서 집결, 박덕산소조와 류삼손소조가 남아 도문, 석현, 왕청부근의 적정을 계속 살피기로 하고 김일성은 기타 대원들을 이끌고 상황을 회복하고저 야영으로 돌아갔다. 9월 14일, 김일성은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연변에 들어와 왕청일대에서 활동하는 소분대와 회사한 후 활동을 전개하다가 11월 12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소부대활동을 전개하면서 이들은 1로군의 잔여부대에 대한 소식을 많이 수집했으며 적정도 대량 파악했다. 이들은 또 항일단체와 지방당조직도 회복시켰고 한간과 주구들을 투쟁, 처단하여 항일련군의 위신을 높이기도 했다.

신출귀몰

1941년 8월 25일, 안길이 이끄는 제2소부대 일행 17명은 국경을 넘은 후 왕청, 도문, 연길, 훈춘일대에서 활동하다가 10월 19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동년 7, 8월에는 최현이 이끄는 10여명 소부대가 국경을 넘어 왕청현 로흑산부근에 도착했다. 이들의 임무는 라자구에 건설되여있는 일본군 간이비행장에 관한 시설을 정찰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낮이면 산골짜기에 숨어있었고 밤이면 정찰활동을 개시했다. 하여 끝내 비행장의 규모, 편대를 정찰해냈다. 이들은 또 군중들의 협조하에 가치가 있는 많은 정보을 수집하기도 했다. 소부대는 로항일근거지의 공청단원 최봉선을 지도하여 라자구에 ‘경성사진관’을 세워 소부대활동의 련락처로 활용하기도 했다. 이 사진관을 통해 1941년부터 1944년 사이 일만군의 군사시설, 우두머리들의 활동상황이 담긴 가치가 상당한 사진 300여장을 촬영하기도 했다. 이러한 자료들은 금후 연변지구를 해방하는 전투에서 중대한 작용을 발휘했다.

소부대는 임무를 완수한 후 10월19일에 순조롭게 남야영에 도착했다.

1942년 봄, 남야영총부는 쏘련방면과의 협상에 쫓아 소부대를 중쏘변경에 파견하여 단기적인 정찰임무를 완수하게 했다. 이러한 정찰활동은 금후 대일작전의 수요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3월부터 시작하여6개의 소부대를 연변에 파견하여 활동하게 하였다. 3월 20일, 도정비를 대장으로 하는 5인소부대가 동북으로 들어와 활동, 8월 적들과의 조우전에서 도정비와 혁자신이 희생되였다. 리청이 인솔하는 소부대 12명은 중쏘변경을 넘은 후 녕안, 동경성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전부 야영으로 돌아갔다. 4월 27일, 최현이 인솔하는 10명 소부대는 야영을 떠난 후 왕청, 도문, 연길 등지에서 활동하면서 만주와 조선의 철로교통도 등을 수집하기도 했고 배초구일대에서 항일선전을 벌리기도 했다. 소부대는 대류수구에서 북하마탕경찰서 특무 4명을 총살하기도 해 당지군중들의 우환을 없애주었다. 소부대는 군중들과의 관계를 밀접히 건립한 후 11월 11일, 야영으로 돌아갔다.

5월 13일, 박덕산이 인솔하는11명 소부대는 무선전발사기를 휴대하고 국경을 넘은 후 수분대전자, 왕청, 도문, 목단강, 장춘—도문철도연선에서 활동하면서 적정을 정찰, 6월 24일, 천보산에 이르렀다. 6월 25일, 곽지산이 몇몇 대원들을 이끌고 화전현 쟈피거우로 들어가 과동준비를 하고 박덕산, 강위룡, 김홍수, 리두익 등 4명이 개산툰일대에 가 중단되였던 군중관계를 회복하였다. 소부대가 본영으로 돌아간 후 강위룡 등은 개산툰일대에 남아 친척관계를 리용하여 계속하여 반일조직을 회복시킴과 동시에 연두봉아지트를 거점으로 조선 회녕의 비행장정황, 비행차수와 규률을 정찰했다. 연두봉은 지금의 룡정시 개산툰진 자동촌 서남쪽 6키로메터되는 곳에 있는 산봉우리이다. 이 산봉우리 북쪽 기슭 길 서쪽에는 항일소부대시기에 소부대 대원들이 거점으로 삼고 있던 비밀아지트의 옛터가 있었다. 이 비밀아지트에 대하여 〈룡정현근현대유적지조사표〉(1984년 5월, 제72페지)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비밀아지트는 광개향 자동촌 제2툰 남쪽 8리 되는 연두봉 북쪽 기슭에 있는 인행도로의 서쪽에 있는데 판전구(板田沟)어구 남쪽 1500메터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비밀아지트자리가 남아있는 흔적을 보면 남북의 길이가 5메터이고 동서의 너비는 3메터로서 동, 서, 남쪽은 돌로 쌓은 벽이고 북쪽은 흙으로 쌓은 벽이다. 남쪽벽은 제일 높은데 80센치메터 밖에 되지 않는다.

이 연두봉 항일아지트는 로전사인 강위룡이 항일련군소부대활동시기에 리용하던 것이다. 1944년 후에는 지점산(池占山)이 막을 차지하였고 토지개혁 때에는 김기룡(金基龙)이 사용하였다. 1959년 조선항일전적지답사단에서 원래의 집재목들을 가져갔었다. 1960년 6월말에 자동관리구에서 목축장으로 쓰기 위해 이곳을 늘구어 원래의 면모가 없어졌다. 지금은 단지 허물어진 흙벽만 있을 뿐이다.

5월 29일, 안길이 인솔하는 12명 소부대는 국경을 넘은 후 왕청현 수분대전자, 라자구 동남방향으로 움직이면서 정찰활동을 하는 한편 농민들 속에 심입하여 동북항일련군의 정황, 쏘독전쟁정황 등을 선전하면서 항일전쟁에 대한 필승의 신념을 심어주었다. 11월 5일, 소부대는 순조롭게 본영에 도착했다. 7월 17일에는 시세영이 8명 소부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활동하다가 넘어갔고 11월 중순에는 김윤호가 5명 소부대를 이끌고 넘어와 활동했으며 련이어 안길, 최현 등도 다시 소부대를 이끌고 왕청, 연길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43년 봄에 본영으로 돌아갔다.

“총적으로 이 시기 남야영에서 파견한 소부대는 간고한 지하투쟁을 벌리면서 항일련군 잔여부대를 찾고 당조직을 회복하기 위해 전력을 다하면서 왕청현 이란구에 1개 중공구위와 공청단구위를 회복시켰으며 액목현 남대창에 1개 당소조, 녕안현 동부와 개산툰에 반일회 등 조직을 세웠다. 소부대는 또 왕청현 라자구, 십리평, 왕청역, 도문 북대동, 명월구 남산툰 등지에 비밀련락원과 련락거점을 두고 일만군의 정치, 경제동태와 군사정보를 수집하게 했으며 적들의 초소를 습격하고 친일파주구를 숙청하면서 항일련군이 살아있으며 적들과 새로운 투쟁을 벌리고 있다는 것을 과시했다.” 소부대활동에 대한 박창욱선생의 지적이다.

1943년 이후 동북항일련군은 소부대활동을 중지하고 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던 극소수의 항일련군을 제외한 대다수 대원들을 야영에 집결시켜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1941년 6월22일, 파쏘독일은 쏘련과의 불가침조약을 찢고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며 일제는 진주항을 습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을 발동하였다. 몇년간의 치렬한 박투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동서방전선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쏘련에서의 쓰딸린그라드전역의 승리를 전환점으로 하여 쏘련군은 전략적인 방어로부터 전략적인 진공으로 돌입하였다. 하여 구라파에서의 독일의 패배는 불가피하게 되였다. 태평양전쟁에서도 미국은 드센 반격을 보여주면서 일본의 패배를 재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동북항일련군은 대일작전의 준비를 다그치게 된 것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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