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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장도 두손 든 계획출산사업일군 주혜숙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1-07 08:43:05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25)

시월의 마지막 밤도 다 가고 어느새 초겨울 ‘동장군’이 성큼 다가온 11월 초의 어느날 1950년대 구쏘련의 건축풍격 그대로 지은 제1자동차공장 ‘붉은 벽돌집’ 18호 아빠트에서 1943년 생으로 올해 76세에 나는 주혜숙녀사를 만났다. 첫 인상이 젊었을 시절 아주 미인이시였겠구나 하는 인상을 주는데 동행한 자동차공장 조선족로인협회 김수금 전임 회장이 “이 녀사는 젊었을 시절에 자동차공장의 미녀였어요.” 이렇게 랑만적인 첫 소개를 했다.

젊은 시절 원칙을 철칙 같이 지키며 일해왔던 주혜숙녀사.

주혜숙녀사는 웃으면서 “스무살이 금방 넘었을가 해서 공군위생학교를 졸업하고 부대 위생원에서 간호사로 있을 때의 일이예요. 글쎄 제가 비행사들의 혈압을 잴 때마다 웬 일인지 이상하게 모두 정상치보다 훨씬 높게 나오는거예요. 그래서 지도원하고 말했더니 ‘비행사들하구 알아봤더니 네가 너무 예뻐서 너를 보면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쿵 뛰면서 혈압이 올라간다고 하더라. 혜숙아, 이를 어찌하면 좋을가요. 허 허 허....’ 그래서 그후부터 저는 할 수 없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비행사들의 혈압을 재였지말입니다.” 라고 반세기전의 이팔청춘 꽃같이 아릿운 시절의 로맨스를 말해 우리를 한바탕 웃게 만들었다.

주혜숙은 1962년에 장춘에서 부대에 입대하여 공군위생학교 호리전공을 졸업하고 공군부대에서 간호사로 있었다. 1969년에 공군부대에서 퇴역하고 제1자동차공장으로 배치받게 되였는데 원래대로 하면 자동차공장 종업원병원으로 가게 되였다.

“당시 저는 그저 일반로동자로 되고 싶었지요. 그래서 공장 인사부문에 로동자로 공장에 보내달라고 말했어요. 그러자 그들은 눈이 휘둥그래서 남들이 오매불망 바라는 간부대우도 마다하니 리해가 안된다면서 저의 요구가 하도 간곡하니 머리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공구분공장으로 보내주는 것이였어요.”

이렇게 26살이 되던 해에 주혜숙은 제1자동차공장 공구분공장 공구과에 로동자로 들어갔다. 거기서 미녀로동자 주혜숙은 매일과 같이 출근시간 반시간 전에 공장에 도착해서는 그날 할 일들을 미리 준비했다.

“그 당시 우리 공장의 서서기도 매일 아침 여섯시반이면 공장에 나와서 한 바퀴 돌아보는 습관이 있었지요. 그 분은 공장이 돌아가는 정황을 손금 보듯 장악하고 있는 분이였어요. 어느 하루 일찍 출근한 저를 보구 저의 정황을 묻는거예요. 그래서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역시나 리해가 안간다는 눈치였어요.”

공구분공장의 지도일군은 주혜숙의 정황을 료해하고 얼마후에 그를 로동자선전대로 자동차공장제1중학교에 파견하였다. 그때까지도 ‘문화대혁명’ 시기라 학교는 여전히 자동차공장에서 파견된 로동자선전대, 부대에서 파견한 군대선전대 그리고 학교 이렇게 세곳에서 련합으로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3년이 지나서 돌아올 시간이 되자 학교에서는 일을 그 누구보다도 빈틈없이 깐지게 하는 주혜숙을 돌려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깝다면서 남아달라고 권유했다. 그 때에도 주혜숙은 학교측의 호의를 마다하고 결연히 공장으로 돌아오는 길을 택했다.

“다시 공장으로 돌아오니 지도부에서는 저를 공구분공장 정치처의 간사로 안배하면서 계획출산을 책임지게 하는 것이였어요. 그렇게 본의 아니게 로동생산 일선을 떠나서 1980년에는 또 제1자동차공장 본공장의 계획출산사무실로 자리를 옮겨가서 퇴직할 때까지 줄곧 계획출산과 관련된 행정일을 맡아하게 되였던 것이지요.”

1970년대 중반부터 중국력사에서 전례가 없던 ‘한 가정 한 자녀' 계획출산이라는 정책이 추진되면서 다자다복이라는 수천년간 이어 내려온 전통 관습을 타파하는 이 일이야말로 날마다 욕을 뒤통수에 달고 다니기에 딱 좋은 직업이였다. 어느 한사람에게 면목을 봐주는 물고를 텄다가는 수습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미녀 계획출산사업일군 주혜숙의 칼날 같은 원칙 앞에서는 공장장도 당위서기도 그를 저만치 무서워했다.

자동차본공장 계획출산사무실 동료들과 함께 공장 정문 앞에서(왼쪽 두번째).

한번은 아버지가 본공장의 모모한 간부로 있는 공구분공장의 24살이 되는 남자가 결혼하겠다고 소개신을 떼러 주혜숙을 찾아왔다. 국가에서 규정한 나이보다 한살이 어려서 안된다고 하자 당위서기가 다 동의했다면서 시뚝했다. 도리를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화가 난 주혜숙은 “그럼 좋다. 나는 소개신에 절대 싸인을 못하겠으니 그 서기를 찾아가서 자기가 싸인하라고 해라. 그럼 될게 아니냐.”라고 말했다. 며칠 후에 서기가 못 오고 공장장이 직접 주혜숙을 찾아와 한번 사정을 봐줄 수 없겠는가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공장대회에서 당신들이 계획출산정책을 잘 지킬 것을 말해놓고 어기면 로동자들이 뻔히 다 알고 있는데 그러면 당신들이 제 뺨을 저절로 치는 격이 되지 않느냐. 어쨌든 원칙 앞에서는 누구라고 면목을 봐줄 수 없다. 우리 공장에서 이 사업이 잘 돼 나가기를 바란다면 나를 지지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더니 저의 말에 동감이라고 하면서 되돌아가는 것이였어요. 결국 그 청년은 일년을 더 기다려서 결혼했지요." 주혜숙은 공장의 지도일군들과 원칙을 놓고 외줄타기를 하던 그 때를 이렇게 회억했다.

주혜숙이 책임진 공구분공장의 계획출산사업은 전 공장의 25개 분공장 가운데서 제일 앞장에 섰다. “어찌 보면 공구분공장의 지도자들은 오히려 원칙 앞에서는 누구의 얼굴도 안 봐주는 저를 내심으로 더 좋아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1980년에 본공장 조직부에서 공구분공장에 와서 저를 본공장의 계획출산사무실로 데려가려고 할 때 주혜숙은 놓아줄 수 없다면서 대신에 다른 사람을 4명 내놓겠으니 그중에서 마음대로 골라가라고 했지요. 그렇게 거의 반년 동안 조직부와 우리 공장 사이에서 실랑이를 하다가 결국은 그리로 가게 되였어요.”

제1자동차공장에서 미녀 계획출산사업일군으로 통한 주혜숙은 수차나 공장의 모범사업일군으로 되였으며 국가계획출산위원회에서 발급한 영예증서까지 받고 당시 공장의 통일적인 퇴직정책에 따라 1994년 51살의 나이에 사랑하는 일터를 떠났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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