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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연구소의 일어 전문가 허순길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10-29 08:02:14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22)

국경절련휴를 보내고 자동차공장에 일본사람 못지 않게 일어를 잘한다는 허순길 고급공정사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젊은 시절에 일본에 류학해서 일어를 잘하는가 했더니 사실 그렇지도 않다. 1939년 10월생인 그는 고향이 화룡시 진달래촌이며 1965년에 길림공업대학 자동차전공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곧바로 제1자동차공장에 있는 장춘자동차연구소 발동기연구부에 입사하여 1999년 퇴직하기까지 35년 동안 오로지 한우물만 열심히 파온 발동기연구에 조예가 깊은 고급공정사다.

 
허순길고급공정사와 부인 최춘월

“우리 집은 다문화가정이예요. 며느리는 일본사람이고 사위는 한족이지요. 아들이 일본 여자친구와 사귀여서 결혼식을 치르게 되였지요. 일본 결혼식장에서 량가 부모로부터 답사가 있을 때의 일인데 아이들은 편안하게 중국말로 하라고 하더군요. 그때까지 아버지의 일어 실력을 잘 몰라서 근심돼서 그랬지요. 그래서 너희들이 한번 지켜보라고 했지요. 저는 일어서서 미리 준비한 발언고도 없이 아주 류창한 일어로 결혼식에 참석한 래빈들에게 즉석 인사말을 올렸지요. 좌중의 일본 래빈들은 눈이 휘둥그래지더군요. 그리고 일본 사돈은 호주머니에서 발언고를 꺼내서 읽더군요. 허허허... 그날 례식이 끝나자 사회자 녀사는 저를 찾아와서 중국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옳으냐, 왜서 이렇게 일어를 일본사람보다 더 잘할 수 있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일어는 나의 애호라고 말했더니 저그만치 놀랍데다.” 허순길 고급공정사는 이렇게 아들의 일본 결혼식에서 있었던 한단락의 에피소드를 이야기했다.

자동차연구소에서 허순길의 일어실력은 정평이 나있다.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우리 나라에서 선진국인 일본을 따라 배울 때 국가에서는 해마다 인재를 일본에 파견했는데 1984년 자동차공장에 처음으로 명액 하나가 떨어졌으며 이를 연구소에 줬다. 너도나도 가고 싶어 하는 상황에 지도부에서는 일어시험을 쳐서 보내기로 했다. 결과 허순길이 거의 만점으로 일등을 하였고 지도부에서는 그를 파견하기로 결정, 성적이 일등인 그를 동료들은 지붕을 쳐다보는 식으로 그저 부러워할뿐이였다. 이렇게 그는 그해 10월에 대련외국어학원에 가서 전국 자동차업종에서 온 기타 일군들과 같이 심도있게 일어를 학습, 졸업시험에서도 역시 모든 이들을 거뜬히 제치고 일등 성적을 따냈다.

1986년 10월부터 1989년 1월까지 허순길은 국가교육부의 파견으로 일본에서 유명한 국립대학인 규슈대학 공학부에 건너가서 방문학자로 있으면서 학습과 연구를 병행했다.

 
1980년대 일본 규슈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체류하던 시절

“일본에 체류하는 기간 도요다와 미쯔비시 두 자동차연구소에 한달 넘게 있을 기회가 있었지요. 그때 저는 우리 나라 자동차공업과 일본의 거리를 눈으로 실감하게 되였으며 따라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짬짬이 시간을 아껴가면서 더욱 열심히 노력했던 것 같아요.” 일본 규슈대학에서 허순길은 실험실의 일본 동사자들과 손잡고 두편의 론문을 각각 미국과 일본 간행물에 발표했으며 일본 공학분야에서 손꼽히는 지도교수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일본에서의 학습을 끝마치고 연구소에 돌아온 후 허순길은 그 즉시로 ‘CA6102’ 자동차 발동기 품질문제를 해결하는 난관공략 임무를 맡았다. 당시 ‘CA6102’ 자동차 발동기는 엄중한 품질문제가 존재하여 자동차공장의 말밥에 올랐다. 허순길은 난관공략소조성원들이 참석한 회의에서 본인이 장악한 자료와 실험수치를 바탕으로 품질에 문제가 존재하는 근본원인과 이를 해결할 구체적인 방법에 이르기까지 상세히 소개하여 다른 연구일군들의 열렬한 토론을 불러일으켰으며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이렇게 허순길은 근 2년 동안 동사자들과 협력하여 1990년말에 최종적으로 발동기에 존재하던 품질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였다.

“저는 한 연구과제를 15년 동안이나 해온 적도 있어요. 1965년에 자동차연구소에 들어와서 삼각형회전피스톤발동기 연구개발소조에 참가하였지요. 이 연구는 제가 들어오기 전인 1960년에 이미 시작되였지요. 선배 연구일군들의 소개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설계도와 견본 발동기가 전무한 상황에서 외국의 한 과학잡지에 실린 그림과 발동기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기초로 시작을 뗐다고 하였습니다. 연구일군들은 온갖 난관을 돌파하면서 1963년에 드디여 견본 발동기를 만들어냈습니다. 1970년에 연구팀의 책임자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자 연구소에서는 한창 나젊은 저에게 이 책임을 맡겼어요. 우리 팀에 연구일군이 많을 때에는 20여명까지 된 적도 있어요.”

 
자동차연구소 도서관 앞에서
 
지휘봉을 넘겨받은 허순길은 동사자들을 거느리고 난이도가 지극히 높은 이 과제를 계속하여 풀어나갔다. 실용화의 목적에 도달하기 위하여 그는 당시 이 발동기에 큰 관심과 열정을 보였던 광서 계림기계공장을 합작단위로 선택하였는데 거의 한달에 한번씩 계림으로 출장을 나갔다. 비행기가 없던 세월에 기차를 타는 데만 며칠씩 걸렸다. “1979년에 우리는 과제를 원만히 완수하였고 이 기술은 당시 세계선진수준에 도달하였습니다. 이 과제의 총책임자로서 저는 1982년 국가기계공업부로부터 과학기술성과 2등상을 받았습니다. 한 과제를 이렇게 오래도록 한다는 것은 결코 말처럼 그렇게 쉽지만 않습니다.”

퇴직 후에도 허순길은 2009년까지 꼬박 10년 동안이나 바쁜 일상을 보냈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자신의 일어 능력을 발휘하여 제1자동차공장 중일합작회사에서 일어 통역과 기술자료 번역을 책임지고 하였는데 선후로 120여장의 도면 번역과 단행본으로 58권에 달하는 일본공업표준을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리사회의 동시통역, 일어로 된 총화보고 등을 작성하여 주변의 사람들을 탄복시겼다. 그 후에도 허순길 고급공정사는 제1자동차공장 전동축유한회사 기술부에서 기술고문을 맡고 외국으로 수출하는 자동차부품의 품질관리를 책임졌으며 북경화태자동자회사에 가서 발동기연구실의 주요 책임자로 있으면서 우리 나라 자동차공업에 기여를 하였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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