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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자동차공장 ‘예술외교' 활동에 참가한 성락문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9-09 09:32:34 ] 클릭: [ ]

[국경 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18)

만년에도 노래경연에 나갔다하면 무조건 상패를 따오는 성락문

예술을 통한 문화외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정치외교에 윤활제 작용을 하고 서로간의 우의를 증진하는데 모름지기 큰 역할을 논다. 공급시장이 절대적 우세를 차지하던 계획경제 세월에 한다하는 제1자동차공장도 력사를 비켜갈 수는 없었다. 자동차 생산에 수요되는 원자재와 부자재들을 차질이 없이 구입하기 위해서는 때때로 대방의 공장에 예술단을 파견해 ‘예술외교'를 통해 물건 구입에 가로막힌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제1자동차공장에서 ‘예술외교'를 활발하게 펼치던 시절 예술단에 조선족들도 아주 간혹 있었으니 그중의 일원이 1964년 보통로동자로 자동차공장에 입사했다가 노래를 잘 불러 이듬해부터 공장예술단 독창가수로 단단히 활약한 성락문(成乐文)이다.

1943년 4월에 장춘 구태 룡가보에서 삼형제중 둘째로 태여난 성락문은 장춘조선족중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에 제1자동차공장 발동기분공장에 입사해 생산라인에서 로동자로 일했다.

1980년대 초반, 안산 등 8개 강철공장을 돌면서 공연하던 시절

"한번은 공장에서 활동을 조직했는데 제가 나가서 노래를 부르게 되였어요. 그 후 공회에서는 제가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을 알고 매번 활동이 있을 때마다 저를 찾곤 했지요. 그렇게 돼서 차츰 공장예술단까지 들어가게 되였던 것 같아요." 이렇게 성락문은 자동차공장에 로동자로 입사한지 일년도 안되여 1965년부터 공장예술단 일원으로 각종 무대에 올라가 독창가수로 뛰게 되였다.

공장예술단에 조선족 독창가수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다른 조선족들도 자호감을 안고 성락문의 노래를 들으러 공연장에 찾아가군 했다. 1965년 중국대지에서 사회주의 교육운동인 ‘4청운동'이 한창 들끓을 때 성락문은 노래를 잘한다고 소문나 장춘시조선족군중예술관에서 조직한 조선족농촌선전대에 파견되여 구태, 유수 등 지구의 조선족마을을 돌아다니면서 공연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공장예술단에서 생산일선의 로동자로 일하면서 가수로 뛴 사람은 아마도 저 혼자뿐인 것 같았어요. 일터에서 빠질 때마다 다른 사람이 와서 저의 일을 대신해야 했지요.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의견도 많았고 모름지기 눈치가 보였지요." 다른 로동자들은 작업대 앞에서 기름진 로동복을 입고 일하는데 밖에 나가서 딴따라를 하니 실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산천경개나 구경하러 다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성락문의 이런 고충을 헤아린 공회조직에서는 시간이 썩 흐른 후인 1980년대 초에 출면해 그를 생산일선에서 물러나도록 도와 나섰다.

1965년 장춘시조선족농촌선전대로 활동하던 시절(뒤줄 왼쪽 두번째)

성락문은 독창가수로 자동차공장 ‘예술외교'에 참가한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줬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호북에 있는 제2자동차공장에서 새로운 '동풍'패 트럭이 나온 후 제1자동차공장에서 생산하던 낡은 '해방'패 트럭이 시장에서 외면당하고 많은 재고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런 위기를 타파하기 위하여 1983년부터 시작하여 공장에서는 신형의 CA141 '해방'패 트럭을 연구제조하기로 결심하고 총력을 집중했다. 신제품이 나와 시장에서 잘 팔리자 만부하로 생산을 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자동차 생산에 제일 필요한 철강제품이 제대로 공급이 돼야 했다. 당시는 여전히 계획경제시대였던지라 철강제품이 많이 딸릴 때였다.

"그래서 공장에서는 예술단을 강철공장에 파견하여 위문공연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지요. 역시 문화생활에 목이 마르던 세월이라 '예술외교'가 역할을 크게 놀았지요." 공장에서는 이렇게 치치할, 안산, 본계, 무순 등 8개 강철공장을 순회하면서 '예술외교'를 통해 관계를 돈독히 하고 공급이 딸리던 철강제품을 원만히 해결해 자동차생산에 영향이 없도록 보장하였다.

열처리과정에 없어서는 안되는 프로판(丙烷) 공급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성락문은 공장예술단 대원들과 함께 '예술외교'에 나섰다. 북경에 있는 공장에서 공급을 중단하고 대경에 있는 공장에서 프로판을 공급했는데 얼마 후 무슨 연고인지 잘 모르나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자동차공장은 당장 생산을 중지해야 할 위급한 상황에 직면했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급히 꺼야 할 상황이라 공장지도부에서는 고도의 중시를 돌리고 이번에도 ‘비장의 카드'인 예술단을 대경에 있는 공급 공장에 파견, 성락문은 이때에도 독창으로 자동차공장 ‘예술외교'에 한몫을 놀았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성락문

"대경에서 공연을 마치고 120명 대원들이 장춘기차역에 내리니 글쎄 공장 당위서기가 직접 마중을 나온게 아니겠어요. 일이 잘 풀려 한량 없이 기쁘다면서 그 자리로 우리를 안내하여 식당으로 갔지요. 단단히 축하파티를 열었지말이예요. 예술단대원들은 공장을 위해 자신들이 한몫 했다는 자호감으로 기뻐들 난리였구요. 나도 내심으로 기뻤지요. 더 말할게 있겠어요. 대경에는 공장예술단에서 공연하러 두번이나 갔지요. 대련에도 갔댔구요." 성락문은 공장예술단 시절에 찍었던 흑백사진들을 꺼내서 한장한장 펼쳐보며 감개가 무량해한다.

1990년 성락문은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조직한 ‘라지오 신곡ㅡ매주일가' 응모에 참가해  노래를 불러 금상을 수상했으며 그가 부른 노래는 중앙인민방송국의 전파를 타고 전국에 방송됐다.

2006년 성락문은 퇴직하기 바쁘게 제1자동차공장조선족로인협회에 달려와 입학, 그 후 그는 오늘까지 협회의 조선족로인들을 가르치며 그리고 또 시간이 나면 사회구역에도 내려가 노래를 가르치면서 만년을 즐겁게 보내고 있다.

/길림신문 리철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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