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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시리즈15]‘백화제방 추진출신'을 지도사상으로

편집/기자: [ 김청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14 15:36:13 ] 클릭: [ ]

중화인민공화국 창립 70돐 기념 특별기획-[문화를 말하다-15](동희철 편-3)

그때 가무단이나 문예계통에서 입당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였소. 나는 1948년도 스무살에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50년도 스물두살 나는 해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소.

연변토닭'이 된 유감'을 이야기 하는 동희철옹.

문예전선에서 당의 방침정책을 받들고

1948년에 중국인민해방군 길동군구 부대문공단이 지방문공단으로 넘으면서 지금의 연변가무단으로 되였소. 가무단 김태희 단장이 우리를 데리고 기층으로 자주 내려가군 하였지. 화룡현 룡수촌에 내려가 구락부도 세우고 문화지식도 보급하고 가무단의 문예종목이며 농민들의 종목도 만들고 했지.

이때 최채동지도 늘 우리와 같이 하향을 하면서 주로 모주석의 《연안문예좌담회석상에서의 강화》 내용을 우리한테 많이 전수했소. 젊은시절 처음 그런 방침정책들을 들으니 상당히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딴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당의 문예방침을 일종 신념으로 받들게 되였소 .

공농병을 위해 복무해야 하며 로동자 농민 병사 지식인 상인 이런 순서로 제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지. 모주석께서 직접 제기한 《백화제방 추진출신》(百花齐放 推陈出新), 백가지 꽃을 피우되 낡은 것, 쓸데 없는 것은 버리고 좋은 것, 새로운 것을 견지하라는 정책을 머리가운데 세우게 되였던 것이요. 하다 보니 학교사업을 하나 사회공작을 하나 작품분석을 하나 편집사업을 하나 언제나 당의 방침정책과 모주석의 지시를 관철하기에 노력하였소.

1987년 연변인민방송국청사 앞에서 음악편집부 일군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긴 동희철선생(오른쪽 첫사람).

1956년부터 연변인민방송국에서 음악편집사업을 하게 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던 허세록 선생님이 연변예술학교 부교장으로 전근해 가고 내가 조장, 주임을 담당하게 되였지. 그때 옛것이 오늘을 위해 복무하고 외국의 것이 중국의 것을 위해 복무하고 다른 민족 음악이 우리 민족음악을 발전시키는데 복무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세운 것이요.

그리고 일정한 분량으로 방송비례를 잘 조절해야 한다는 각오를 가지게 되였지. 외국음악을 하나 하면 중국음악은 2개, 옛날의 것을 하나 하면 현재생활을 반영하는 것을 2개 하면서 비례관계를 잘 조절해 나갔소. 그렇지 않으면 방송이 기울게 된다는 각성을 하게 된 것이요.

방송음악사업의 ‘비례원칙’

최근 연변방송국간부들이 나를 방문하러 왔더구만. 나의 후임으로 방송국 주임사업을 하던 한병락선생이 사망해서 그를 조문하러 갔던 걸음에 나한테로 온 것이이였소. 글쎄 빈손으로 오면 몰라도 전기로 듣는 반도체를 큰걸 선물로 갖고 왔더구만.

《빈손으로 올 것이지 산 사람 놓고 제사 지내러 왔냐?》고 했더니 모두 한바탕 크게 웃었소.

항상 인민군중들 속에 들어가 문예보급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동희철선생.

원래는 전지를 바꿔쓰는 반도체를 쓰면서 많이 불편했는데 지금은 온 하루 동안 방송을 들어도 전지를 바꿀 념려를 안 해도 되고 돈도 덜 들이게 됐소. 그들이 내가 조선말방송애청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나보지.

그들이 찾아오니 연변방송에 관한 견해를 말했소. 첫째는 매주일가를 지금까지 견지한다는 것이 대단히 잘하는 일이라고. 매주일가는 1956년 7월 1일부터 내가 직접 설정하여 시작한 방송프로였소. 조선말 방송에서는 우리 방송이 제일 먼저 시작하였지. 지금은 연변텔레비죤방송에서도 매주일가를 하고 중앙방송, 국제방송에서도 매주일가를 하고 있는데 그 영향력이 대단하다고 긍정했지.

그리고 최근 4월 7일부터 교향음악을 또 계통적으로 소개하기 시작하더구만. 바하, 멘데르션, 모짜르트, 베토벤 등 명인들의 명곡들을 하나 하나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참 잘하는 것이였소. 단순히 가곡만 잘 부른다고 그것만 소개해서도 안되는 것이고 지식인들이 좋아하는 교향악에만 편향해도 안되는 것이요.

력사적인 것과 외국 명곡들도 하나하나 계획있게 질서있게 소개를 하면서 비례적인 조절을 잘해야 전반 음악문화수준이 제고되는 것이 아니겠소.

들놀이 마당에서도 손풍금은 동희철선생(뒤줄 왼쪽)의 몫. 

《그때 그 시절 그 노래》프로 역시 지나온 력사시기 군중들 속에 널리 보급된 노래를 계통적으로 소개하고 있었는데 작곡가, 가수 등 인물소개를 포함하여 참 조직을 잘하더구만. 제목도 잘 달았소. 옛날의 노래를 위주로 한다는 측면도 확실하지. 개시곡도 그 시절의 명곡들을 짧게 짧게 정채롭게 이어가고, 해설도 잘하고 있었소. 마치 그 시절의 생활을 알고 하는 것처럼 내용 소개도 잘 조직하더구만.

음악부 주임은 이런 비례조절을 잘 해야 전반을 대상하게 되는 것이요. 중앙의 《백화제방 추진출신》 정책을 잘 실시하여 외국의 유익한 것을 채용하고 예날의 좋은 걸 받아들여 지금의 생활을 풍부하게 하고 지금 사람들의 감정정서를 흥분시키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하는 것이요.

후회 없는 ‘연변토닭’

음악창작을 할 때에도 현실생활에서 로동자, 농민 인민대중들이 좋아하는 민요라든가 류행가라든가 흘러내려온 기초를 떠나지 않으면서 외국의 좋은 것, 옛것의 좋은 것을 받아들여 내용을 풍부히 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요. 그래서 나는 작곡을 할 때 우리 민족 5음계를 위주로 하면서 외국의 7음계를 경과음로 연구를 많이 해왔지.

그리고 인민대중이 좋아하는 음악을 창작하자면 인민군중들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고 인민군중들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요. 그래야 그들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지.

 

1965년 10월, 교하현 오림향 오의촌 농토 개량 일터에서 농민들과 함께(왼쪽세번째 동희철)

《고향산기슭에서》를 창작하여 광범한 대중들의 환영을 받게 된 뒤 1958년에 주에서 왕청현의 서위자마을에 가서 음악창작회의를 조직하게 되였소. 그곳은 연변에서 처음으로 발전소를 세운 마을의 하나였지. 가야하강반에 자리잡은 이 마을에서 생활체험을 하면서 산간마을의 정취를 느끼고 촌민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게 되였지.

그때 임효원 시인이 《내 고향 좋구 좋다》는 가사를 써 기계화를 실현해가는 사회주의새농촌정경을 표현하였소.

가야하 푸른물이 논판을 적시고

갈모자 산기슭에 소나무 무성한

에-헤 요 흥 흥 데-헤요 흥 흥

내고향 좋구 좋다

앞남산 깎아내여 발전소 세우고

공장의 기계소리 마을에 드높은

1963년 4월,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위원회에서 발급받은 주덕해 주장상.

역시 《내 고향 좋구 좋다》는 광범한 대중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고 1963년  《고향산기슭에서》와 함께 연변조선족자치주인민위원회에서 발급하는 주덕해 상을 타게 되였지.

그뒤로 또 ‘손풍금 타는 총각’이며 ‘벼꽃타령’과 같은 감미롭고 애틋하며 부드러우면서도 분방한 선률의 음악을 계속적으로 창작하였소. 이리하여 ‘당과 조국, 인민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일관된 작품’, ‘조선민족음악의 풍격적 미를 보여주는 전형’, ‘신민요적인 가요창작의 대표작’이라는 등의 평가를 받기도 했지.

이렇게 우리 민족 음악특색을 핵으로 시대적 맥박을 구현하면서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풍부히 해주는 예술적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야 말로 창작가치가 있는 작품이 아니겠는가 생각되는구만.

기실 나는 음악리론공부를 체계적으로 하지 못한 유감을 평생 지니고 살아 왔소. 사람들은 나를 《연변 토닭》이라고 한단 말이요.

음악교원을 하면서도 편집사업을 하면서도 음악학원에 보내든지 연수라도 좀 보내달라고 사정을 했지. 그래도 지도층에서는 《당신이 가면 학생들은 어떻게 하고 하던 일은 또 어떻게 하겠냐》 하면서 놓아주지를 않는단 말이요.

갔다 오면 ‘양닭’이 된다는지 양닭이 되면 알도 질이 없다는지 토닭이라야 질 좋은 알을 낳는다는지 하하, 이런 ‘리론’으로 나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지.

2016년 7월 1일 연변인민방송국 개국 70주년 기념 촬영.

화성악이요 대위법이요 하는 음악리론을 단 1년이라도 체계있게 배웠으면 얼마나 좋았겠소. 그렇게는 안 되였지만 우리 민족 민요를 비롯한 많은 명곡들을 깊이 있게 연구하면서 우리 민족 인민대중들의 심미수요에 맞는 음악을 창작하기에 왼심을 써온 것이였소.

나는 평생 음악편집사업과 대중문예조직사업, 과외창작사업을 결합하면서 쉼 없이 분투했왔지. 이것이 '연변토닭'의 분복인가. 하하!

하지만 후회는 없소. 이런 토배기 문예사업일군이 1983년 중앙선전부와 중앙인민방송국에서 소집한 제1차전국애국주의선전교양공작회의에서 혁명전통교양 모범선진인물에 당선되였던 것이였소.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 및 력사발전에 특출한 기여가 있는 여러 민족 인물들중 조선족으로 중공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 양림이며 동북항일련군 명장 리홍광, 죽을지언정 굴하지 않는 녀유격대원 최희숙, 중공왕청현위 서기 김상화, 중공연변주위 서기 주덕해 등 13명 항일장령들과 혁명가들이 선정된 속에 조선족작곡가 동희철도 들어 있더구만.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 같은 사람이야 내놓을 만한 것이라고는 음악작품 외에 뭐가 있겠소. 해당 문건을 보니 과연 동희철이 애국주의교양 모범선진인물에 들어있었소. 회의에 참가했던 리창원 부국장이 돌아와서 나의 손을 굳게 잡아주며 생존인물은 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소.

참, 그러니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시 상기하면서 책임과 사명만 더 굳게 다지였을 뿐이지. 

                                          글/ 김청수  영상사진/ 김성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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