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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54)―장백으로의 진격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8-08 10:39:53 ] 클릭: [ ]

무송에서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해 적을 호되게 타격

대덕수 소덕수 반절구 전투에서 항일련군 위망 떨쳐

무송현소재지전투

1936년 8월, 쟝쟈탕즈밀영에서 제2군 제4, 제6사, 제1군 제2사의 주요 간부들과 장백산 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용군 인솔자들이 참석한 련석회의가 열렸다. 회의 참가자들은 병력을 집중, 련합작전하여 무송의 중요한 진들을 습격하기로 작전방침을 정했다.

8월 중순, 제2군의 1,500여명 주력부대와 항일구국군 리홍빈부대, 항일의용군 구참, 만순, 만군 부대의 600여명은 쟝쟈탕즈회의 부서에 좇아 무송현 서북부에 집결하였다. 군중을 발동, 단결하고 항일련군의 영향면을 확대하기 위해 제2군 군부는 기타 항일부대와 련합하여 무송현 소재지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무송은 통화지구 일만군의 큰 거점이였다. 일제는 무송을 ‘동변도 치안숙정’의 중점 거점으로 삼고 실전능력이 있다고 자부하는 다까하시 한개 중대의 일본군 정예부대와 위만군 한개 영, 위만경찰 한개 대대 도합 1,000여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무기장비가 좋고 탄알도 충족했으며 견고한 토성과 포대로 둘러싸여있어 일제는 무송을 난공불락의 군사요충지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무송을 군사적으로 제압하는 것은 장백산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데 있어서 아주 의의가 컸다. 무송현소재지 공격은 장백산 서북부 일대를 장악하는데 있어서 결정적 국면을 열어놓는 전투로 될 것이였다.

 
무송현성전투 때의 소남문포대.

제2군 6사 사장 김일성은 한때 무송에서 지낸 적이 있기에 시가지를 손금 보듯 알고 있었고 항일부대의 영향하에 있는 위만군 한개 중대가 서문 보초를 서고 있어서 작전에 퍽 유리했다. 위만군 왕부중 대장은 아군이 성시를 공격하기로 되여있는 시간에 성문을 일시에 열어주기로 약속했다.

8월 16일, 6사의 한갈래 부대가 돌연히 무송현소재지 부근의 송수진을 습격하여 적들의 주의력을 분산시켰다. 다른 한갈래 부대는 김일성의 포치에 따라 안도, 몽강, 림강 방면으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했다.

전투 개시 시간을 17일 새벽 1시로 정하고 부대가 급보로 행군하여 성문 앞에 다달았으나 위만군 반일 병사들이 성문을 열어준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교대시간이 되여 다른 병사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기 때문이였다. 위만군 반일병사들은 기관총의 기관실에 모래를 쓸어넣고 초소에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하여 성문을 은밀히 열고 성안에 돌입하여 적들을 일격에 섬멸하려던 작전계획은 일단 뒤틀려졌다. 그렇다고 하여 전투를 정지할 수는 없었다.

8월 17일 새벽 3시, 드디여 무송현소재지를 공격하는 아군의 총소리가 울리였다. 주공임무를 맡은 6사는 김일성의 지휘하에 동산포대를 점령하고 대남문, 소남문 방향으로 공격하여 성안의 적을 소멸하기로 되여있었다. 반일부대는 동문과 북문 방향을 담당하기로 했다.

공격명령을 내리기 바쁘게 동산포대를 점령한 김일성부대는 소남문 방향을 향해 돌진해갔다. 반일부대 병사들도 북문과 동문 쪽으로 진공하였다. 소남문 앞거리에서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성문으로 육박하는 아군을 향해 포대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적들이 짖어대는 기관총소리가 귀청을 찢었다. 그러나 아군은 기관총중대의 엄호를 받으면서 성문을 까부시고 시내로 돌입해 들어갔다.

그런데 6사 전사들이 육탄으로 돌파구를 열어놓은 그 시각에 북문을 공격하던 만순부대가 적의 포성에 질겁하여 퇴각한다는 련락이 날아왔다. 조금 후 동문을 담당했던 리홍빈의 부하들이 반격해오는 적을 막지 못하고 뒤로 밀리기 시작한 탓으로 동문을 나선 적들이 모조리 소남문 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전광이 책임진 소부대가 만량하습격전투를 포기하고 돌아왔다는 보고까지 날아들었다. 만순부대의 공격서렬이 수라장으로 되자 그 여파가 익측에까지 미쳐 리홍빈부대도 풍지박산이 되였다. 전국을 미처 수습하지도 못하였는데 벌써 날이 푸름푸름 밝아오고 있었다. 정황은 아군에게 시시각각으로 불리해지고 있었다. 아군은 예상외로 적의 병력이 증가된 상황에서 적을 밖으로 끌어내다 족치려 했다.

그 때를 김일성회억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 앞에는 날이 완전히 밝기전에 전장에서 철수하든가, 아니면 정면돌격의 방법으로 결사전을 벌리든가 하는 두갈래의 길이 놓여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유인전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품은 다음에도 인명피해가 두려워 퇴각명령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일 때 하늘이 우리를 돕는 기적이 생기였다. 현성과 그 주변에 갑자기 짙은 안개가 서리면서 한치 앞도 가려볼수 없는 천지조화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각 부대들에 흩어진 병사들을 이끌고 동산과 소마록구 릉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하였다.

적들은 퇴각하는 아군을 미친듯이 따라왔다.

…7련대 주력은 자욱한 안개를 리용하여 동산 남쪽고지에 긴 매복진을 쳤다. 반일부대들도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맞은켠 릉선을 차지하였다. 그때에야 주력의 철수를 엄호하던 중대는 적들을 유인하면서 안개 낀 골짜기로 깊숙이 철수하였다. 그들도 나중에는 골짜기 막바지에 있는 산등성이에 올라 감쪽같이 매복하였다.

시참으로 악명을 떨친 다까하시부대는 일단 발을 들여놓으면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는 죽음의 함정 속으로 모조리 끌려들어왔다. 승패는 이미 결정된 셈이였다.

우리는 산에서 내리쏘고 적들은 골짜기에서 올리쏘는 화력전이 얼마 동안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다까하시부대는 여러 차례 파장식 돌격을 들이댔으나 매번 주검만 남기고 물러서군 하였다. 돌격이 은을 내지 못하게 되자 그들은 총질을 멈추고 산기슭에 붙어 증원부대가 오기를 기다렸다.

나는 반돌격 명령을 내리였다.

류창한 나팔소리와 함께 매복진에서 뛰쳐일어난 아군 용사들은 적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눕히였다. 백병전의 선두에는 ‘연길감옥’이란 별명을 가진 7련대의 분대장 김명주가 서있었다.

…김명주가 연길감옥에서 탈옥투쟁을 할 때 그를 희생적으로 도와준 8련대의 중대장 려영준도 이 전투에서 ‘칠성자’ 못지 않게 잘 싸웠다…

유격대의 ‘녀장군’ 김확실은 시종 두눈을 부릅뜨고 기관총을 쏘았다.

…김정숙이 량손에 싸창 한자루씩 거머잡고 기관총으로 련발사격을 하듯이 불질을 하여 10여명의 적을 쓸어눕혔다는 일화도 무송현소재지전투가 빚어낸 것이였다.

…다까하시의 ‘정예부대’는 동산 골짜기에서 전멸을 면할 수 없었다. 이 비극적인 사태는 그날 오전중으로 관동군사령부에 보고되였다. 후날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보고 알게 된 데 의하면 그 때 신경비행장에서는 무송주둔군을 지원하려고 폭탄과 탄알을 만재한 군용기들이 떠올랐고 통화, 환인, 사평가 등지에서는 증원부대가 긴급히 출동하였다. 중강진수부대도 무송으로 급파되였다…

다까하시를 구원하기 위한 적의 병력은 림강, 장백, 몽강을 비롯한 린근 현들에서도 홍수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비상한 속도로 추진된 이 발광적인 수습책도 다까하시를 함정에서 건져내지는 못하였다. 8월 17일 오후 일부 증원부대들이 무송에 들이닥쳤을 때는 벌써 승패가 결정된 뒤였다.

아군이 진지수색을 끝마치고 깊은 수림 속으로 승리적으로 철수해가고 있을 때에야 신경에서 날아온 적기들이 공중에서 우르렁대기 시작했다. 적기들은 아군에 의해 파괴된 동산포대와 현소재지 부근의 주민가옥들에 눈먼 폭탄들을 마구 내리던지였다.

무송공격전에서 아군은 비록 현소재지를 점령하지는 못했지만 일제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으며 항일련군의 위망과 정치적 영향력을 크게 과시했다.

장백에서 벌린 전투

무송현소재지공격전을 끝낸 항일련군 제2군 제6사는 되골령을 넘어 장백현으로 진출한 후 대덕수전투, 소덕수전투, 발전구전투, 이도구전투 등 비교적 규모가 큰 치렬한 전투를 벌리였다.

1936년 9월 1일, 김일성의 령솔하에 이도강 서남의 대덕수촌에 이르러 항일선전을 위한 연극공연을 펼쳐보이려고 금방 무대 가설을 끝냈는데200여명 일본군 ‘토벌’대가 밀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부딪친 6사 전사들은 사장 김일성의 지휘하에 군중들의 지지성원을 받으면서 교묘한 매복전을 벌리였다. 부대는 누렇게 익어가는 보리밭을 사이에 두고 싸움을 벌리게 되였다. 적들이 보리밭 맞은편에서 고랑을 따라 접근해왔다. 적들이 보리밭을 거의다 벗어져나오기를 기다려 아군의 사격신호가 울리였다. 항일련군이 매복해있을 줄을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적들은 어쩔 새 없이 호되게 얻어맞았다. 대패한 적들은 이동강 쪽으로 도망쳤다. 그 날 아군은 적 40여명을 소멸하고 기관총 1정, 보총 40여자루를 로획했다. 전투의 승리를 경축해 대덕수마을 군중들은 감자떡을 치고 농마국수를 눌러 전사들을 위로했다. 전사들은 간단한 공연과 항일선전으로 답례한 후 마을에서 철퇴했다.

대덕수를 떠난 부대는 소덕수 등판에서 숙영한 후 마등창 수림 속에 이동하여 휴식했다. 어떤 전사들은 한창 굳잠에 빠져있기도 했다. 그런데 난데없는 적들의 총소리가 울렸다. 15도구 방향과 이도구 방향에서 밀려온 적들이 남북 량쪽에서 거의 동시에 달려들고 있었던 것이다. 무성한 숲은 적아를 구분하기 어렵게 했다. 아군이 감쪽같이 빠져나가면 적들은 저들 끼리 맞붙을 가능성이 충분한 기회였다. 이에 사장 김일성은 마등창수림에서 슬쩍 빠져서 15도구 등판으로 철수하라고 부대에 명령을 내렸다. 아닌게 아니라 아군이 철수하자 마자 맞다들어 쏘아대는 총소리가 자지러지게 울렸다. 아군은 등판에서 저들 끼리 싸우는 꼴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적들은 좋이 서너시간을 싸웠는데 이동강 쪽 패가 정 못견디겠던지 먼저 퇴각나팔을 불었다. 그 나팔소리를 듣고서야 15도구 패들도 제편 끼리 싸운줄 알았는지 사격을 중지했다. 그 날 전투에서 일본군 수비대 70여명을 포함하여 적 150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그 날 적들은 담가가 모자라 신창동의 집집마다에서 문짝이라는 문짝은 다 뜯어다가 저들의 시체를 거두어가지고 황황히 꽁무니를 뺐다.

대덕수, 소덕수 전투의 승리는 광범한 인민대중을 크게 고무했는바 젊은이들은 용약 항일부대를 찾아와 참군할 것을 지원했다.

9월 12일, 6사는 다시 주동적으로 출격하여 반절구에 대한 야간습격전을 벌리였다. 반절구는 장백현에서는 비교적 큰 촌락이였고 적들의 군사요충지였다. 적들은 부락에다 적지 않은 일본경찰과 위만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6사는 3시간여의 치렬한 전투를 벌려 반절구를 점령, 경찰서를 까부시고 위만군 거점을 까부셨다. 10월 19일부터 24일까지 6사는 련속하여 이도강, 이십도구에서 많은 일만군 유생력량을 소멸했다.

하리회의 후 장백현 일대로 진격한 항일련군 제1로군 제6사는 일만군을 호되게 타격해 항일련군의 성망을 높였으며 남만인민들의 반일정신을 크게 고무격려했다. 또 항일련군 부대가 장백현에다 항일유격근거지를 건립하는 데 훌륭한 기초를 닦아놓았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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