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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을 위해 혼신을 불태운 로동모범 박순남

편집/기자: [ 정현관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6-13 14:16:48 ] 클릭: [ ]

[공화국 창립 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9)

올해 80세에 나는 박순남은 1960년에 자동차공장에 입사하여 림시공으로부터 시작해서 자동차공장 종합리용분공장 목재리용직장의 공단장으로, 1994년에 퇴직하기까지 공장을 집으로 로동자들을 친형제처럼 대하면서 혼신을 새하얗게 불태운 제1자동차공장의 공신이며 로동모범이다.

“어머니는 중국에 형제도 없이 혼자예요. 자동차공장에 출근하던 아버지는 어머니가 35살에 나던 해인 1974년 6월에 공상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지요. 결혼해서 원앙처럼 아기자기하게 얼굴 한번 붉혀본 적이 없이 살아오던 한창 젊은 어머니에게 놓고 말하면 정말로 청천벽력보다 더한 타격이였지요. 홀로 남은 어머니는 가정에서는 저희 네 형제를 이끌고 직장에서는 200여명의 로동자들을 거느리면서 힘들다는 말 한마디 없이 그 모든 것을 버티면서 수많은 영예들을 따냈어요.” 박순남의 큰딸 장계화는 젊은 시절의 어머니를 이렇게 회억한다.

박순남 로인의 일가족

1960년 6월, 21살에 나는 박순남은 제1자동차공장 단조공장에 림시공으로 들어갔다. “얼마후에 공장에서는 림시공을 줄이게 되였는데 평상시 직장에서 몸을 내번지고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 지도부에서는 저를 포함해 세명을 남아서 계속 일을 하라고 하더군요.” 박순남은 자동차공장에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의 일을 이렇게 말했다.

1965년 박순남은 제1자동차공장 로동자가속사업부에서 일을 하다가 새로 세운 나무상자를 만드는 공장에 들어갔다. “공장이 설립된 지 얼마 안됐는데 공단장을 8번이나 바꿨지요. 골머리를 앓던 지도부에서는 저를 찾아 일을 책임질 수 없겠는가고 부탁했지요. 그래서 저는 못할 것도 없으니 한번 해보겠다고 말했어요.” 이렇게 박순남은 9번째로 되는 공단장에 임명, 한번 해보겠다고 지도부와 한 약속이 1994년 퇴직할 때까지 장장 30년을 지켜왔다. 남편이 공장에서 쓰러져 돌아간 후 공장지도부에서는 그녀더러 다른 공장으로 자리를 옮겨 편하게 일하라고 제안했으나 박순남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로동자들을 떠날 수 없다면서 일하던 공장에 그냥 남았다.

"1970년대 말 아니면 80년대초의 일이라 기억돼요. 그때 사회로부터 한번에 150명의 사람들이 저희 공장에 들어왔지요. 여러 부류의 젊은이들이 몰려서 들어오다 보니 많은 문제들이 발생했지요. ‘문제청년'들에 대한 저희 ‘사상사업'도 그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 같아요."

공장에 들어온 두 녀성청년은 사회의 어중이 떠중이들과 휩쓸면서 한때 말썽을 일으켰다. 박순남은 수차나 그녀들을 찾아 공단장의 신분이 아닌 언니로, 선배로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면서 인생의 도리를 차근차근 설명해줬다. “후에 저는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녀들을 직장의 책임자로 발탁했으며 그들은 누구보다 몸을 내번지고 일하는 '모범생'이 됐답니다.”

또 한번은 공장지도부에서 리씨성의 청년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부대에서 입당까지 하고 돌아온 젊은이였는데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고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는 말썽꾸러기였다. 공장에서는 몇번 담하를 시도하다가 효과가 없으니 아예 출당처분을 주려고 하였다. 이때 박순남은 “앞날이 창창한데 당적까지 제명하면 그 젊은이가 어떻게 되겠는가, 어떻게 하나 교육해서 참된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도부에서는 그럼 박공단장의 직장에 데려다가 한번 맡아서 교육을 해보겠는가고 묻더군요. 그래서 저는 이번에도 안될 것 없으니 내가 맡겠다고 말했지요.” 박순남이 책임진 공단에 출근한 첫날 리씨 청년은 그를 보고 “나는 공장에서 이름난 후진당원인데 당신이 있는 모범당지부에 먹칠하는 것이 걱정되지 않는가요?”라고 물었다. 박순남은 “걱정된다. 하지만 나는 네가 우리 작업장에 오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너를 교육해서 나의 영예를 빛내기 위한 마음은 꼬물만큼도 없단다. 난 너를 진심으로 믿겠으니 우리 한번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이 의심하는 눈길에 도전장을 던져보자.”라고 말했다. 그 후에도 박순남은 여러차례나 그를 찾아 속심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음은 마음으로 통한다고 그 청년은 후에 남 먼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는 선진 청년으로 몰라보게 변했지요. 소문이 났는지 후에는 또 감옥에서 출소한지 얼마 안되는 한 녀성청년을 파출소에서 데리고 와서 책임져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그녀도 후에 '모범생'으로 됐어요. 말하자면 옛말이 많지요. 자동차공장 본사에서도 내려와서 저한테 무슨 ‘후진생' 교육비결이 있는가 알아보지 않겠어요.”

박순남은 자기가 맡은 일에서는 더 말할 것 없었다. 그 일례로 1981년 제1자동차공장 로력모범대회 자료에는 기준병, 우수공산당원으로 뽑힌 박순남을 “그녀가 책임진 작업장은 지난해 년초 계획의 3배에 가까운 작업량을 완성하였다.”고 쓰고 있다. 박순남은 뛰여난 일본새로 제1자동차공장의 선진생산사업자, 기준병, 우수공산당원으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수차나 장춘시 로력모범, 장춘시 선진생산사업자로 되는 영예를 지녔다.

동료들과 담화를 나누는 박순남(오른쪽 첫 사람)

"당조직에서는 심혈을 들여 림시공이였던 저를 배양했어요. 네 아이들은 저의 정신적 기둥이였으며 로동자들은 친형제들이였지요. 저는 제가 몸을 담그고 일했던 직장으로 하여 지금도 자호감을 느껴요." 35살에 남편과 사별하고 네 아이의 엄마로 이 세상에 홀로 남아서 말썽 많던 직장의 공단장으로 일하면서 분명 슬프고 힘든 날들이 많았으련만 용케도 참고 견디여왔던 박순남이다. 85세의 박순남녀사는 불타는 정열을 로동자들과 함께 자동차공장건설에 바치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오래도록 회억에 젖어있었다. /리철수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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