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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9)-제1차 반‘토벌’투쟁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5-14 15:05:13 ] 클릭: [ ]

 일제는 가는 곳마다에서 모조리 죽이고 불 사르고 빼앗고

유격대는 군중과 함께 피어린 투쟁을 벌려 근거지 보위

연길현 해란구 12개 자연촌

200여호 주민들을 94차례 ‘토벌’

중공당원과 항일군중 1700여명 학살

일제의 야만적인 ‘삼광정책’

“항일유격근거지가 건립되고 유격대가 점점 장대해지는 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동북식민지통치에 거대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일제는 유격대와 유격근거지를 없애버리려고 련속 군사적 ‘대토벌’을 감행했는데 1932년 봄부터 1935년까지 세차례의 대규모적인 군사 ‘토벌’ 을 감행했습니다. 제1차 ‘토벌’은 1932년 봄부터 이듬해 3월까지 진행되였는데 유격구인민들과 유격대원들의 반 ‘토벌’ 투쟁은 참으로 간고했지만 끝내 일제의 ‘토벌’을 물리치고 승리를 쟁취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일본군의 제1차 군사 ‘토벌’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1932년 4월 동만에 침입한 일본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의 이께다대좌가 지휘하는 ‘간도파견대’ 는 서쪽의 장춘에서 출동한 관동군 제10사단의 히라가부대, 북쪽의 녕안에서 증원 온 쯔루미부대와 함께 주요한 주민지역들을 무장점령함과 동시에 간도일본총령사관소속 경찰 및 위만군까지 총동원하여 항일혁명력량에 대하여 제1차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4월 3일부터 7월 2일까지 일본군경들은 동만항일군민과 100여차의 전투를 진행하였고 비행기를 380차례나 출동시켰다. 년말까지 ‘토벌대’는 ‘검거소탕’을 진행하여 항일군민 1,200여명을 살해하고 1,500여명을 체포하였다. 이듬해 3월까지 모두 381차의 ‘토벌’ 작전을 감행했다. 일본총령사관 소속의 경찰들은 322차의 작전(그중 일본군과의 련합작전 196차, 경찰부대 단독작전 126차)을 진행하여 항일군민 2,766명을 살상하고 2485명을 체포하였다고 한다.

일본군경들은 항일혁명지역에 대한 ‘대토벌’에서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불 사르고 모조리 빼앗는 ‘삼광정책’을 실시하였다. 1932년 4월부터 5월까지 적들은 왕청현 덕원리, 동일촌일대를 ‘소탕’하였는데 토벌 가운데서 지하공작원 리재봉(김상화)과 한영호를 체포한 후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작두로 목을 자른 후 보안대문 앞의 높은 나무에 달아놓고효시했다. 일본군 ‘토벌’대는 화룡현 평강구, 개산툰구, 달라자구, 삼도구에서도 야만적인‘삼광정책’을 진행했다. 반년도 채 안되는 사이에 놈들은 개산툰의 자동을 47차나 토벌했으며 무고한 군중 43명을 살해했다.

4월 27일, 적들은 연길구 실현촌에서 중공동만특위 선전부장 조기석 등 28명의 항일지사들을 체포한 후 집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5월, 훈춘현 연통라즈에 대한 ‘토벌’에서 그 일대 20여개 부락, 천여 주택을 전부 소각하였으며 무고한 백성들을 수없이 학살했다. 해란구 화련리에서는 세인을 놀래운 ‘해란강대학살사건’을 빚어내기도 했다. 놈들은 연길현의 이란구, 팔도구, 봉림동, 화련리 일대의 마을을 재더미로 만들어놓았다.

해란강대학살사건

일제는 일찍부터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란유격구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있었다. 해란유격구인민들은 중공해란구위원회의 지도 밑에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벌렸으며 반동적인 지주, 매국적 주구를 처단하기도 했다.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해란강유격구에서 혁명의 불길이 세차게 타오르자 일본경찰과 헌병들은 “화련리의 하늘땅을 뒤엎겠다”고 고아대면서 해란구에 대한 ‘토벌’을 감행했다.

일본 ‘토벌’ 대는 연길현 소영자자위단 단장 최남수, 리철우, 하동자위단 고문 박희선, 박명호, 박승준, 허남철, 자위단 참모 김동후, 형사고문 황병연, 보안대원 서봉묵, 자위단 후보대원 윤승화, 박병승 등을 앞세우고 해란강반의 마반산, 하동, 화련리, 소영자, 화첨자 등지를 끊임없이 포위토벌하였다. 일제는 공산당 1명을 죽이면 15원 장려하며 산 사람을 잡으면 총 한자루를 장려한다고 하면서 한간, 주구들을 부추겼다.

1932년 음력 3월 28일, 일본수비대 50여명은 괴뢰만주국자위단과 함께 남화련리 중지방, 류정촌, 석건평 등지의 무고한 인민들을 마구 체포하여 학살했다. 놈들은 남화련리에서 청년 김룡수를, 중지방에서 의사 김도제를, 류정촌에서 리동근을, 학교촌에서 리씨 등을 체포하였으며 석건평으로 가는 길목에서18명의 무고한 백성을 체포하자 학살하였다.

일제와 자위단놈들의 탄압에 해란구인민들은 중공해란구위의 령도 밑에서 대담하고도 지혜롭게 일본군과 악질지주, 철도경비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기를 무장하는 한편 류정촌동골, 중지방, 상지방 등 세곳에 철공장을 세우고 비밀리에 무기를 제작하였다. 그 해 7월 항일유격소대를 건립하고 벽수, 화첨자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무장을 탈취하였고 집사대로 위장한 다음 화첨자경찰분주소를 습격하여 경찰들의 무기와 의복을 탈취하기도 했다. 이에 악에 받친 일제는 “조선사람 100명을 죽이면 1명의 공산당원이나 공청단원을 잡을 수 있다.”고 하면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놈들은 또 항일혁명대오내에 변절자를 박아넣어 내부로부터 와해시키려고 하였다. 1932년 음력 8월초 해란구 등 3개 구의 항일유격소대는 중공연길현위의 지시에 좇아 류정촌에 거주하는 해란구 서기 리상근의 집에 모여 계림촌에 주둔하고 있는 40여명의 철도경비군의 무기를 탈취하려는 전투계획을 토론하였으나 현위에서 파견한 백창헌은 일부러 습격날자를 질질 끌었다. 백창헌은 혁명을 배반하고 연길일본령사분관의 끄나불이 된 놈이였다. 이 자는 이번의 무장탈취계획을 처삼촌 리성포에게 알려주었고 리성포는 주구 조혜천을 시켜 일본령사분관에 밀고하게 하였다. 밀고를 받은 일본령사분관에서는 주구 리진우가 인솔하는 ‘토벌대’와 벽수자위단 도합 70여명을 출동시켜 음력 8월 7일 이른새벽에 기관총 3정과 대포까지 걸어놓고 불의에 류정촌을 습격하였다.

하여 세집에 나누어 류숙하고 있던 항일유격대원 60여명은 불의의 습격을 받게 되였다. 그들은 5, 6시간이나 반격을 견지하였다. 놈들은 마을에 기여들어 민가에 불을 질렀다. 놈들은 불속에서 기여나오는 2살 난 어린이와 72살의 할머니를 날창으로 찔러 불속에 집어넣었다. 이번 불의의 습격에서 중공해란구위의 리상근, 장상순, 김정길, 오용묵 등 22명의 유격대원이 희생되고30여명의 군중이 학살되였다. 이것이 전 동만을 진동시킨 ‘8.7’참안이다.

1932년 음력 12월 12일, 일제는 연길일본수비대, 경찰, 하동자위단으로 ‘토벌대’ 를 무어가지고 다시 해란구에 쳐들어갔다. 대부분 군중들은 피신했으나 미처 피신하지 못한 군중들은 참혹하게 학살당했다. 김학선은 북화련리의 허궁다리에서 자위단과 격전하다가 희생되였고 그의 식구 일곱명 가운데서 며느리와 딸이 겨우 사경에서 벗어났을 뿐 나머지 다섯식구는 불잡혀 화형을 당했다. 태명금은 소영자자위단에 체포되였다가 소영촌 구하동 우물에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놈들은 토굴 속에서 장질부사로 앓고 있는 5명의 혁명자를 체포하여 나무가리 우에 올려놓고 불을 질러 태워죽였다. ‘토벌대’ 놈들은 김귀송을 붙잡아 칼탕을 쳐죽인 후 불에 태워버렸으며 박원섭을 체포하여 그의 사지를 각을 떼서 끓는 가마에 삶았으며 21살나는 유일남을 석마에 갈아죽였고 김고농을 석마에 달아매놓고 피를 받아죽였으며 김규식은 눈알을 뺀 후 몽둥이로 때려죽였다.

이렇게 일본군경과 자위단은 연길현 해란구 화련일대의 12개 자연촌과 200여호의 주민들에 대하여 1932년부터 1934년까지 대소 94차례의 ‘토벌’을 진행하고 중공당원과 항일군중1700여명을 학살하였다.

근거지를 보위하기 위해

일제의 동만에 대한 제1차 ‘대토벌’에 대하여 중공동만특위와 각 현위에서는 유격대와 적위대, 항일혁명군중을 령도하여 적극적인 반 ‘토벌’ 전을 벌리였다.

1933년 2월 11일 밤, 중공화룡현위에서는 항일근거지 어랑촌에서 ‘군민련합경축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는 이틀전 화룡유격대가 일군으로 가장하고 지주 장보림의 무기를 빼앗은 전과를 경축하기 위해 펼친 대회였다. 대회 후 중공화룡현위서기 최상동은 김병수, 안학선, 김정한, 김동해, 문관우 등 구위 간부들과 함께 앞으로 할 일들을 토의하느라고 새벽 3시까지 회의를 했다.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긴 일본군은 정탐을 파견하여 어랑촌항일유격근거지와 유격대실정을 빤히 알게 되였다. 그러던차 자기들의 코밑에서 ‘황군’으로 가장한 화룡유격대가 장보림의 무기를 몽땅 털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펄펄 미쳐날뛰였다. 일제군은 투도구, 이도구, 삼도구와 룡정 등지로부터 일본경찰, 수비대, 무장자위단 등 도합 360여명을 긁어모아 ‘련합토벌대’를 무어가지고 사면팔방으로 어랑촌을 포위해왔다.

군민련합경축대회가 있은 이튿날 새벽에 적들은 어랑촌을 물샐틈없이 포위하였다. 총창을 꼬나든 ‘토벌대’놈들이 마을로 기여들 때 왕지평 쪽에서 총소리가 세방 울렸다. 그것은 임무를 맡고 나갔던 제2소대 대원들이 마을에 다가든 적들을 발견하고 적정을 알리는 신호였다. 마을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제1소대 유격대원 채동식은 총소리를 듣자 마자 즉시 유격대실로 달려가 중대장 김세에게 알리였다. 채동식에게서 보초를 교대받은 유격대원 천국선도 겹겹이 포위하고 다가드는 적들을 발견했다.

“적이다!”

천국선은 높이 웨치면서 총을 쏘았다.

총소리에 놀라 깨여난 마을사람들은 문을 차고 뛰여나왔다. 동녘이 희붐히 밝아왔다. 마을을 포위한 적들은 총을 쏘기 시작했다. 놈들은 기관총과 박격포사격을 들이댔다. 삽시에 마을은 포화에 잠겨버렸다.

사태는 몹시 위급하였다. 만약 조금이라도 더 지체한다면 어랑촌에 있는 모든 당정간부, 유격대, 적위대 그리고 군중들은 적들의 포위를 뚫고 나갈 수 없게 된다. 중대장 김세는 우선 현위기관과 군중들을 안전하게 전이시키기로 하고 중대를 세개 전투소조로 나눈 후 적들과 생사박투를 벌리였다. 적들은 우세한 병력을 믿고 미친듯이 달려들었다. 공산당원 리구희, 공청단원 류택규와 유격대원 유만길은 유격대실을 진지로 삼고 진군해오는 적들을 정면반격했다. 유격대원들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접근할 수 없게 되자 적들은 유격대실에 불을 질러놓았다. 불길이 타번지는 집 속에서 세 용사는 끄덕않고 적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불에 타던 집이 물앉는 순간 그들은 뛰쳐나와 포위를 돌파하다가 적탄에 맞아 장렬하게 희생되였다.

현위서기 최상동은 군중을 엄호하며 전이시키다가 적탄에 복부를 맞고 쓰러졌다. 그는 총을 꼬나들고 달려드는 일본놈의 대갈통을 돌을 들어 까부신 후 장렬히 희생되였다. 중대장 김세, 정위 ‘김아주머니’(김병호) 등 대원들은 서쪽 주택과 담장에 가 음페하여 적들에게 사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진공해오는 적들을 한차례 또 한차례 격퇴시키면서 현위기관과 군중들의 안전한 전이를 위해 박투하다 장렬히 희생되였다.

전투는 여섯시간이나 지속되였다. 대부분 군중과 간부들은 산속에 옮겨갔다. ‘토벌대’는 세대의 자동차에 18구의 저들의 시체와 20여명의 부상자를 싣고 어랑촌에서 물러갔다. 그 속에는 ‘간도파견군’ 군관의 시체도 있었다. 어랑촌을 일거에 삼켜버리려던 일본군은 유격대의 영용한 반격을 받고 물러갔다.

이날 유격대에서는 현위서기 최상동, 중대장 김세, 정치위원 ‘김아주머니’(김병호), 1소대장 리구희, 유격대원들인 안흥원, 류택규, 유만길, 정두호, 김국진, 리길원, 적위대 대장 류억만, 적위대원 리명배, 소년선봉대 대장 차정숙 등이 희생되였다.

1933년초, 일본침략군은 3000여명의 병력에 비행기, 대포의 엄호와 배합하에 소왕청과 연길현 의란구, 석인구, 삼도만,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등 유격근거지를 향해 대규모적인 ‘토벌’을 감행했다.

1933년 3월, 적들은 소왕청유격근거지를 중점 ‘토벌’하기 위하여 2000여명 병력을 3개 갈래로 나누어 소왕청근거지를 행해 진군했다. 동만특위의 지휘하에 왕청유격대와 리광이 지휘하는 별동대는 항일구국군과 배합하여 유격근거지 주위의 산마루에 매복권을 펼쳐놓고 쳐들어오는 적들을 기다렸다.

3월 30일 이른아침, 대두천에서 쳐들어온 한갈래의 적들은 마촌에서 2키로메터 가량 떨어진 뾰족산일대의 포위권에 들게 되였다. 아군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적들을 행해 맹렬히 사격했다. 2시간 가량 격전을 통해 아군은 진공해오는 적들을 여러 차례 물리쳤다. 우세한 병력을 믿고 적들은 아군의 방선을 넘으려고 악을 썼지만 끝내 방선을 뚫지 못했다. 이 때 유격대는 주동적으로 철퇴하여 적들의 배후에 가 진공했다. 등뒤로 공격받게 된 적들은 어찌된 갈래판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황망히 도망쳤다. 도망치던 적들은 저쪽으로부터 밀려오는 병력을 발견하고 유격대인줄 알고 맹렬한 사격을 퍼부으면서 저들 끼리 죽일내기를 벌렸다. 이렇게 첫날 전투는 적들의 실패로 끝났다. 이튿날과 사흗날에도 적들은 각 방면으로부터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유격대와 항일구국군의 기동령활한 배합작전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소왕청 반‘토벌’전에서 유격대는 일본군 300여명을 소멸하고 총 259자루, 박격포 4문, 기타 군용품을 수두룩이 로획했다.

1933년 훈춘유격대는 공산당의 령도하에 각지에서 주동적으로 일본군의 ‘토벌’ 대를 습격하여 항일유격근거지를 승리적으로 보위했다.

9월, 훈춘유격대는 주동적으로 흑룡강성 동녕현에 진격하여 적들을 진공했다. 10월 7일 훈춘에 돌아온 후 대황구부근에서 ‘토벌’대와 만나게 되였다. 몇시간의 치렬한 전투를 거쳐 박진흥, 오빈 등 13명 전사가 장렬히 희생되였다.

연길현 삼도만항일유격근거지군민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일본군‘토벌’대를 습격하여 몇십명의 사상자를 냈다.

각급 공산당조직의 령도 아래 항일근거지군민들은 단결하여 적들과 용감히 싸워 알심 들여 획책한 적들의 제1차 ‘토벌’을 끝내 물리치고 금방 건립된 유격근거지를 보위해냈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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