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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 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6)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5-06 09:30:36 ] 클릭: [ ]

[국경70돐 특별기획]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6)

제1자동차공장 초창기 건설과정에는 적잖은 조선족녀성들의 모습도 찾아볼 수 있다. 그녀들은 가정에서는 훌륭한 안해와 어머니, 며느리로 직장에서는 누구 못지않게 맡은바 과업을 충실히 완성하는 모범일군으로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제1자동차공장이 서서 4년 후인 1957년에 공장에 들어온 방혜숙녀사가 그중의 한사람이다.

ㅡ임신한 몸으로 야학을 다니던 시절

 
제1자동차공장에서 근무하던 시절을 회억하는 방혜숙녀사.

올해 83세에 나는 방혜숙녀사는 1957년 봄에 결혼한지 얼마 안돼 제1자동차공장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장춘으로 왔다. 방혜숙의 고향은 화룡시 팔가자진 중남촌이다. 7형제중의 맏이로 태여난 그는 어려운 가정형편때문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그렇게 다니고 싶었던 중학교를 접고 농촌에 나와 가족들을 먹여 살리는데 힘을 보태야 했다.

처녀시절 총명하고 부지런한 방혜숙은 마을의 부녀대장으로 열심히 뛰였으며 얼마 후에는 또 본인이 직접 마을 청년돌격대를 조직하고 돌격대장을 맡았다. “먹을 것이 귀하던 그 시절 저는 생각하던 끝에 청년돌격대를 이끌고 산으로 들어가서 황무지를 일궜지요. 마을 농사는 농사대로 하면서 농한기를 타서 산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감자며 보리, 메밀을 심어 마을 사람들의 기근을 해결하려고 주야장천 일만 했어요.” 당시 그녀가 이끈 중남촌의 청년돌격대는 한때 팔가자와 화룡에서 소문났다.

처음으로 제1자동차공장에 들어와서 단원으로 활약하던 시절 (뒤줄 중간).

“남편을 따라 자동차공장에 와서 처음에 기전기공장의 견습공으로 들어 갔어요. 그런데 언어가 통하지 않아 큰 문제였어요.” 방혜숙은 처음 공장에 들어갔을 때의 애로사항은 무엇보다도 한어 말과 글을 모르는 것이였다고 회억했다. 곤난 앞에서 물러설 줄 모르는 성격인 그는 야학교를 다니기로 맘먹었다. 임신한 몸으로 야학을 다니겠다고 하자 남편은 밤길에 위험하다고 하면서 극구 만류했다.

허나 방혜숙은 농촌에서 ‘청년돌격대장'으로 있으면서 곤난이란 모르고 살아왔는데 지금 와서 남의 뒤에 떨어지는 락오자가 될 수 없다며 기어코 나섰다. 이렇게 임신한 몸으로 야학을 다니면서 글과 말을 배우게 되니 눈앞이 훤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창 젊었던 그는 직장에서 일이면 일, 그리고 단조직 활동에도 적극 참가하면서 ‘모범생'으로 솔선수범하였다.

ㅡ자동차운수대의 녀성 살림꾼

 

공장의 동료들과 함께 로동복 차림새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는 방혜숙(앞줄 오른쪽 세 번째).

동료들과 함께 있는 방혜숙(앞줄 왼쪽 첫 번째).

1962년 방혜숙은 완충기공장의 자동차운수대에 들어가 사무원 겸 배차원(调度) 일을 맡았으며 후에는 또 운수대 통계일도 겸해서 했다. 자동차운수대에는 화물차를 비롯한 각종 차량이 12대 있었는데 ‘큰가마밥'을 먹던 세월에 어떤 운전수들은 밖에 나가서 사사로이 다른 일을 했는데 이로 인해 휘발유 랑비가 심했다.

“이 무렵 공장 운수대에서는 많이 일하면 그만큼 보수를 지급하고 휘발유 랑비를 막는 조치를 출범했지요.” 운수대의 유일한 조선족녀성인 방혜숙은 이전에도 그러했듯이 이번에도 드높은 책임감으로 온갖 번거로움을 마다하면서 맡은바 일을 빈틈없이 까근하게 해나갔다.

아침에 출근해서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차량마다 돌아가면서 계량봉으로 자동차 연료탱크의 휘발유가 얼마 있는지 검사하고 높다란 화물차 운전석에 올라서 계기판의 리정을 체크한다. 그리고 일하러 나가는 차량의 적재화물 무게, 주행거리, 기름소모량 등을 매일 체크하고 통계해서 달마다 운수대의 게시판에 공개했다. 단 한번의 오차라도 생기면 운전수들로부터 방치 같은 의견이 날아올 수 있으므로 조금만 소홀했다가는 욕먹기 십상이였다.

방혜숙은 세심하면서도 공정하고 공평하게 일을 해나갔는바 운전수들은 그의 똑 부러진 일본새에 누구하나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방혜숙이 있는 운수대에서 성공하자 다른 공장의 자동차운수대에서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경험을 학습하고 한번 실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동안 시험적으로 해보다가 일이 너무나 번거롭다면서 다 팽개쳐 버리고 말았다. 결국 마지막까지 견지한 것은 방혜숙뿐이였다.

“자동차공장에 와서 처음에 15평방메터도 안되는 단칸방에서 시부모를 모시면서 일곱식구가 살던 때를 생각하면 꿈만 같지요. 하도 방법이 없어서 시아버지는 복도에서 간이침대를 놓고 주무셨답니다. 세 아이를 키우느라, 일 하느라, 병든 시부모를 돌보느라... 장춘에 와서 꼬박 8년동안이나 화룡 팔가자에 있는 본가집으로 못 찾아갔지요. 정말로 눈물겨운 나날들이였습니다.”

방혜숙은 제1자동차공장에서 32년동안 근무하면서 여러차례나 단위의 선진사업자로 당선되였으며 그의 가정은 주변에서 공인하는 화목한 ‘5호가정'으로 뽑혔다. 1989년에 퇴직한 방혜숙녀사는 지금 제1자동차공장의 상징적 건물인 1950년대에 지은 ‘붉은 벽돌 로동자주택'에서 만년을 행복하게 보내고 있다.

/리철수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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