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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7)-동만항일유격대(2)

편집/기자: [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5-05 12:41:33 ] 클릭: [ ]

반일군중 간고한 환경서 항일유격대 지원

장대해진 유격대 유격근거지 건설에 박차를

훈춘현유격대

1932년 1월, 중공훈춘현위 군사부의 김한구(김혁), 방철산, 리국진 등 15명의 반일 청년들은 대황구 서대마구 두도령 심산 속에 밀영을 세우고 별동대를 건립하였다. 대장은 강석환이 맡았다.

1932년 2월에는 연통라즈 서구에서 10여명의 대원으로 돌격대를 건립, 강일무를 대장으로 추대했다. 돌격대는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빼앗은 외에도 과거 반일민족주의무장단체에서 파묻어두었던 총 20여자루와 많은 탄약을 파내여 대오를 무장하였다.

유격대의 녀성대원들

별동대와 돌격대는 영용하고도 기민하게 적들의 손에서 무장을 빼앗아 자신을 무장하였다. 1932년 봄 연구의 돌격대원 오일파, 리해봉 등은 연구 뚱아라경찰분대의 집수리에 동원된 당지 농민들 속에 섞여 경찰분대 뜨락에 들어갔다. 그들은 일하면서 동태를 살펴보다가 물 마시러 들어가는 척하고 집안에 들어가 총을 닦고 있는 경찰들을 때려엎었다. 리해봉은 손에 닿는 대로 삽 한자루를 들고 대문으로 달려가 보초놈을 찍어넘겼다. 그들은 보총 두자루를 빼앗아들고 대문을 빠져나와 그 길로 산길을 질러 연통라즈에 돌아왔다. 이 때부터 리해봉은 ‘삽자루’ 란 별호를 가지게 되였다.

1932년 6월초, 중공훈춘현위서기 서광은 10여명 연구돌격대를 령솔하여 하남 남진맹동척회사무장자위대를 야습하여 보총 10자루를 탈취했다. 그리고 별동대원 3명은 경신향 회룡봉해관장의 숙사를 야습하여 권총 1자루를 얻었다.

여러 차례 전투에서 무기를 마련한 그들은 훈춘현유격대를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1932년 6월 중공훈춘현위는 중공동만특위의 지시에 근거하여 대흥구 청수동에서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훈춘현유격대의 건립을 결정하고 연통라즈 서구에 연구유격대(령남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일무가 대장으로, 리청(중국인)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처음에는 1개 중대 밖에 없었는데 김태준이 중대장을 맡았다. 7월에는 대오가 2개 중대로 늘어나자 구선일이 제2중대 중대장을 맡았다. 겨울에 이르러 대원이 130여명으로 늘어나고 총 100자루가 되자 유격대는 3개 중대로 편성되였다.

중공훈춘현위에서는 구국군 왕옥진부대에 공산당원과 공청단원들을 파견하여 통일전선사업을 강화하게 하였다. 그 결과 구국군 13퇀에서는 보총 14자루를 지원했다. 이 무장을 토대로 대황구에서 황구유격대(령북유격대라고도 함)를 건립하였다. 강석혼이 대장으로, 박두남(후에 변절함)이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 후 구국군 왕옥명을 데리고 유격대에 넘어오자 그를 대장으로, 윤석원을 정위로 임명했다.

1933년 1월, 유격대에 대한 령도를 강화하기 위하여 중공훈춘현위에서는 연구유격대와 황구유격대를 합병하여 훈춘현유격총대를 편성, 공헌신을 총대장으로, 박태익을 정위로 임명하였다. 총대 밑에 2개 대대를 두고 제1대대장에 공헌신, 정위에 박태익, 제2대대장에 심랑동, 정위에 박두남을 임명하였다. 유격총대는 130여명으로 늘어나 훈춘현 대황구, 연통라즈, 왕청현 라자구일대의 밀림 속에서 활약하면서 일본침략자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유격대가 건립된 지 얼마 안되여 일제군은 연통라즈 ‘토벌’ 을 감행하였다. 1932년 7월 소선대 대장 황정해가 연구에서 비밀련락을 가다가 야침봉부근에서 100여명의 ‘토벌대’를 발견하고 즉시 연구에 되돌아가 알렸다. 유격대는 연구에서 3리 가량 떨어진 곳에서 매복전을 벌려 적 10여명을 격사, 경상하고 ‘토벌대’ 를 격퇴시켰다. 같은 시기에 연구유격대의 몇몇 대원들은 반석향 장류구에 있는 일인축산회사의 목장을 습격하여 소 160여마리를 빼앗아 연구유격구로 몰고 왔다.

1933년 초봄, 훈춘의 토호들과 악질지주 및 친일상인들은 동흥진의 상인들과 자금을 합쳐 동흥진에 군수품상점을 세우기로 하고 25대의 마차에 상품들을 가득 싣고 훈춘을 떠났다. 이 소식을 입수한 중공연구당위에서는 장수림더러 20여명의 유격대원과 적위대원을 거느리고 매복습격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들은 로룡구의 뒤산에 매복하여있다가 친일상인들의 짐실은 마차가 매복권 안으로 들어오자 맹사격을 퍼부었다. 호송대로 따라온 왜군병사 대여섯놈과 위만군 몇놈이 격사되자 그외의 놈들은 뿔뿔이 도망쳤다. 유격대는 마차 25대에 실은 피복, 신, 밀가루, 소금 등 많은 물자를 탈취했다.

1933년 5월, 훈춘유격대 소대장 최진과 박창준은 대원들을 거느리고 소륙도구 다리목에서 일본군들이 호송하는 20여대의 마차를 습격하여 일본군 9명을 격사하고 총 9자루, 밀가루 40여마대를 빼앗았다.

1934년 4월 6일, 40여명의 유격대원들은 탑자구집단부락의 자위단을 야습하여 부단장 신연택을 격사하고 12자루의 보총과 천여발의 탄약을 얻었다. 유격대원들은 당장에서 자위단의 소굴을 불살라버리고 축산조합의 소 3마리를 빼앗았다. 그 해 5월 12일 유격대원들은 반일병사들과 손 잡고 오도구집단부락을 습격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괴뢰군 4명을 격사하고 2명을 격상시켰으며 13명을 생포하고 총 17자루와 많은 군수품들을 로획하였다.

훈춘현의 유격근거지인민들은 간고한 환경 속에서 항일유격대의 항일투쟁을 열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유격대는 가는 곳마다에서 인민들의 지성어린 위문을 받았다. 인민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유격대에 식량을 날라다주었으며 생활용품을 공급해주었다. 연구의 녀성들이 조선에 건너가 피륙, 신, 양말 등을 사 경신구에 가지고 오면 그 곳 청장년들은 물품을 지고 산을 넘어 유격구에 날라갔다. 유격대의 물자구입과 수송을 위하여 경신구 회령봉의 지하공작원 김규성 등 몇몇 동지들은 헌식적으로 사업하였다. 녀성들은 유격대에 옷을 만들어 보냈다. 연구의 7명의 녀성은 왜군들의 ‘토벌’이 우심했으나 4개의 재봉침으로 밤낮 악전고투하여 유격대원들의 옷을 지어 제때에 공급하였다. 녀성들은 일본놈들이 쳐들어오면 재봉기, 옷감 등을 산속과 땅속에 감추어두었다가 적들이 돌아가면 다시 파내여 옷을 만들었다.

대황구의 ‘3.1’ 학교에서는 아동들을 조직하여 보초, 련락, 정보수집 등과 같은 아동들의 힘에 알맞은 일을 하였다. 학교에서는 항일혁명가곡을 불렀고 매주 토요일이면 강연대회를 열었고 선전대를 조직하여 유격대의 전사들과 병원의 부상병들에게 위문공연을 하였다.

1934년 3월말, 훈춘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4퇀으로 편입되여 새로운 전투임무를 수행하였다.

연길현유격대

1932년 봄, 중공연길현위는 공산당, 공청단 열성분자회의를 열고 상급의 지시정신에 따라 항일유격대를 건립하며 적의 무기를 탈취하여 자신을 무장하라고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의란구, 로투구, 팔도구, 해란구 등지에서 돌격대, 적위대를 조직하여 적들의 손에서 무기를 탈취하기 시작했다.

1932년 봄, 의란구소년선봉대 대장 박동무가 지주에게서 권총 두자루를 탈취하였다. 연길 북산촌 김홍규는 국자가 동쪽거리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괴뢰만주국경찰의 총 1자루를 빼앗았다. 대마록구에서는 공청단 단지부서기 림춘익 등 5명이 룡정, 조양천 부근에서 지주집을 습격하여 보총 2자루, 권총 2자루, 렵총 몇자루를 빼앗았다. 7월에 공청단원 김충진은 연집강 연성촌에서 괴뢰만주국경찰을 강물에 처박고 권총을 탈취하였다. 8월에 최현 등 3명은 소동구의 지주집을 습격하여 총 5자루를 탈취하였다.

연길현 개구소선대위원회가 찍어낸 항일삐라

이렇게 로획한 무기를 토대로 하여 1932년 초여름, 연길현 의란구와 로투구에서 유격대가 건립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대원 30여명이였으며 대장 박춘이였고 로투구유격대는 대원 20여명이였으며 대장은 박주철이였다. 유격대는1932년 여름부터 초겨울까지 무려 20여차의 전투를 하였다. 의란구유격대는 소연집강 보안퇀분주소를 습격하여 총 11자루를 탈취한 후 7월 어느 날에는 소배초구에서 일본군 토벌대를 저격하였으며 뒤이어 화전자공안분주소를 습격하여 총 몇자루를 로획하였다. 8월에는 팔도구경찰서를 습격하고 일본인광산자본가와 앞잡이들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9월에는 유란환, 김동규 등 유격대원들은 의란구 춘홍가부근에서 ‘연길폭탄’으로 일본군 군용트럭 3대를 습격하여 적 20여명을 살상하고 보총 20여자루를 로획하였다.

1932년 10월, 의란구유격대와 로투구유격대는 련합하여 연길현유격대를 건립하였다.

1932년 11월, 일본침략자들은 많은 군대를 집결하여 동만유격대에 대한 제1차 ‘대토벌’ 을 감행하였다. 연길현유격대와 적위대는 적들의 ‘토벌’에 맞서 영용히 싸웠다. 유격대는 삼도만 대동구에서 400여명의 ‘토벌대’와 이틀동안 싸워 적 90여명을 소멸하였으며 왕우구로 쳐들어온 일본군과 괴뢰군을 저격하여 많은 살상자를 냈다.

연길현유격대는 ‘자기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며 놈들을 소멸하고 몰아낼수 있는 전략적기지’를 창설하기 위하여 왕우구, 석인구, 삼도만을 중심으로 한 부르하통하 이북의 산간지대에 선후로 항일유격근거지를 개척하였다. 유격근거지를 창설한 유격대는 이곳 저 곳에서 신출귀몰하며 적들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점차 장대해진 연길현유격대는 유격대대로 확대되였다. 대대장에 박동근, 정치위원에 박길이 임명되였다. 대원은 130여명이였다. 그들은 보총 60여자루, 권총 15자루, 기타 원시적 무기와 ‘연길폭탄’ 으로 무장하였다. 대대 아래에 4개 중대를 두었는데 제1중대는 삼도만 능지영에, 제2중대는 부암에, 제3, 4중대는 왕우구, 북동에 주둔하였다. 유격대원들은 연집강, 팔도구, 의란구, 삼도만 등지를 넘나들면서 유격활동을 활발히 벌려 적들을 타격하였다.

1932년 3월말, 연길현유격대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 제1퇀으로 편성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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