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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35)-‘옹성라자사건’과 왕덕림의 구국군

편집/기자: [ 유경봉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4-18 15:30:00 ] 클릭: [ ]

애국사병 나라 주권 위하여 일본인 사살

왕덕림구국군 군사 일으켜 대일작전 펼쳐

애국사병의 정당행위

‘9.18’사변 후 동북 각지에서는 중국공산당의 전민항전의 호소와 전국인민들의 거세찬 항일물결의 추동 밑에 자발적인 항일무장투쟁이 일어났다.

1931년 12월 7일, 안도현 명월구에 주둔하고 있던 길림성방군 제677퇀 왕덕림3영의 애국사병들은 국가의 주권을 수호하기 위해 군사요충지인 포대산에 기여드는 만주철도주식회사의 사원 오또 오반지 등을 쏴죽였다. 이 사건을 ‘옹성라자사건’이라고 한다. ‘옹성라자사건’은 연변을 들썽해놓았다.

당시 명월구 복판에 있는 포대산 우에는 ‘로3영’이 주둔해있었고 포대산남쪽기슭에는 제9련의 병영이 있었다.

12월 7일, 일본 만주철도주식회사 돈화—도문선측량인원 7명이 9련 병사들이 거듭되는 경고도 아랑곳하지 않고 군사요충지인 포대산에 기여들어 정찰활동을 감행했다.

포대산을 지키고 있던 9련 2패의 서대성과 주덕재는 군사기지내에서 측량활동을 할 수 없으니 즉시 물러나가라고 거듭 경고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사병들의 경고를 듣는둥 마는둥 안하무인경으로 지형을 측량하기도 하고 이곳 저 곳 살피기도 하면서 제멋대로 놀았다. 일본인들의 무리한 태도에 격분한 애국사병들은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고 군사요충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하여 정당방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애국병사 서대성과 주덕재는 일본인들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되알진 총소리와 함께 일본인 2명이 당장에서 격사되였다. 나머지 일본인들은 겁을 먹고 부랴부랴 뺑소니쳤다.

애국사병들의 정당행위는 동만 각계 애국군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2월 18일, 중공동만특위에서는 〈민중에게 고하는 글〉과 〈사병에게 고하는 글〉을 련이어 발표하고 “중조 병사와 민중들은 일떠나 유격전을 벌리여 일본제국주의를 몰아내자”는 구호를 제기, 애국민중들은 시위투쟁과 파공, 동맹휴학을 단행하여 애국사병들을 성원할 것을 호소했다.

사건이 발생한 후 일본의 룡정주재 특무기관은 국자가에 사람을 파견하여 연길경비사령관에게 위협적인 공갈을 했다. 이미 룡정령사관에 ‘투항’을 표한바 있는 한간 길흥은 머리 숙여 사과함과 동시에 일본인들의 뜻에 쫓아 인차 사람을 명월구에 파견하여이른바 조사를 단행하게 했다. 아울러 한간 희흡과 비밀리에 상담한 후 죽은 두 일본인에게 무휼금 3천원씩 배상하기로 했다. 길흥의 매국적 행위는 애국관병의 분노를 자아냈다.

연변에 주재하고 있던 일본고문 등 사람들이 명월구에 와 ‘옹성라자사건’을 추궁하면서 주둔군을 향해 질문하자 3영 영장 왕덕림은 머리를 번쩍 추켜들고 호매롭게 대답했다.

“포대산은 아군의 군사요충지이기에 그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없다. 두 일본인들이 억지로 포대산에 기여오르다가 맞아죽었다. 이것은 우리의 정당한 임무집행이다.”

‘옹성라자사건’이 발생한 후 동북군 길림부사령관 공서 참모장 희흡은 일본침략자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범을 산에서 떠나게 하는 수를 써서 명월구의 주둔군 ‘로3영’을 바꿔치우려 했다. 희흡은 새로 임명된 제27려 려장 왕수당을 보내여 이 일을 처리하게 했다.

왕덕림 구국군 일으켜

돈화에 도착한 왕수당은 즉각 명령을 내려 왕덕림의 ‘로3영’을 명월구에서 철수시킨 후 돈화에 집합하게 하고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 왕덕림을 퇀장으로 승급시키며 계속하여 ‘로3영’을 이끌고 흑룡강성에 가 항일하고 있는 마점산부대를 진압하라는 희흡의 명령을 전달했다. 산에서 범을 끌어내리려는 희흡의 음모를 간파한 왕덕림은 단연히 명령을 거부했다. 왕덕림은 대기하고 있는 기차에 오르지 않고 부대를 이끌어 액목에 간 후 항일에 나섰다.

왕덕림이 항일에 떨쳐나섰다는 소식이 삽시에 동만에 쫙 펴졌다. 왕덕림의 수하에서 련장으로 있던 오의성은 소식을 접한 후 즉시에 식당경영을 팽개치고 부대를 찾아와 함께 항일할 것을 결의하였다. 화룡현 이도구에서 경찰들을 이끌고 기의한 순관 시세영을 비롯한 원 동북군의 애국적인 장병들과 애국인사 및 청년학생들도 분분히 이 항일대오를 찾아왔다. 사하연의 대부호 대홍창은 일가로소 50여명과 함께 몇만관 되는 재산을 들고 와 왕덕림부대에 가입했다. 왕덕림부대가 북으로 전이하여 소성자에 이르렀을 때에는 벌써 1500여명으로 늘어났다.

1932년 2월, 왕덕림은 소성자에서 ‘만구위망, 수복동북’을 종지로 하는 항일구국군의설립을 정식으로 선고, 왕덕림이 총지휘를 맡고 공헌영이 부지휘, 오의성이 전적사령을 맡았다.

구국군이 설립되자 국민당투항파의 3인대표단 및 길동3현사신대표단이 련이어 찾아와 관직을 주고 요구를 들어주겠다는 등으로 왕덕림의 항일의지를 개변시키려 들었다. 이에 왕덕림은 단호하게 응대했다.

“공산당이건 국민당이건 난 관계치 않는다. 그저 항일하기만 하면 장한 것이다!”

당파거나 민족을 가리지 않고 힘을 합쳐 공동 항일하여 구국의 대업을 이루려는 왕덕림의 소박한 항일주장은 공산당과 동만의 광범한 민중의 크나큰 지지와 옹호를 받게 되였다.

공산당원 구국군서 활약

‘9.18’사변 후 중공만주성위와 각지 공산당조직에서는 련합하여 공동항일하기 위해 간부와 공산당원, 공청단원을 항일의용군 및 농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항일대오 속으로 적극 파견하여 사업하게 하였다.

중공연화중심현위에서는 공산당원 리연록을 비밀리에 구국군내부에 파견하여 항일사업을 하게 하였다. 리연록은 왕덕림의 존중과 신임을 받고 구국군의 전적사령부 참모장 겸 제1보충퇀 퇀장을 담임했다. 리연록은 비밀리에 지하당지부를 건립한 후 통일전선사업을 했다.

중공왕청현위에서도 리광을 오의성부대에 파견하였다. 공산당원 호택민도 오의성부대에 파견되여가 참모장사업을 하였다. 리연록의 추천에 의해 지식분자출신의 공산당원 맹경청, 류정안이 구국군 총정부의장으로, 김대륜, 하검평이 총부선전부 정, 부 부장으로 초빙되기도 했다.

구국군은 항일구국의 기치를 추켜들고 연동 각지를 누비면서 일본침략군과 영용하게 접전하여 혁혁한 전과를 따냈다.

1932년 2월, 구국군은 돈화현성을 공격할 것을 결정한 후 부대를 움직였다. 2월 20일 새벽녘, 리연록이 이끄는 보충퇀과 오의성이 인솔하는 ‘로3영’ 선봉부대를 주력으로 한 구국군은 돈화를 향해 진격, 순식간에 돈화현성을 점령했다. 일본군과 괴뢰군은 400여명의 사망자를 냈다.

구국군은 이어 액목현성을 함락했다. 28일에는 또 교하현성을 공략했다. 구국군은 5개의 현성을 점령하면서 대량의 무기를 로획했는데 기관총 28정과 기타 여러 종류의총 1600자루를 로획하는 휘황한 전과를 올렸다. 구국군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동만 각지에 전해지면서 광범한 대중을 크게 고무해주었다. 항일열정으로 끓어번진 광범한 군중들은 구국군의 승리를 환호하면서 열렬히 구국군에 입대하였다. 구국군의 대오는 어느새 4600여명으로 불었다.

왕덕림은 항일전쟁을 장기적으로 펼치기 위하여 녕안지구로 전략적인 대전이를 할 것을 결정, 부대를 이끌고 녕안을 향해 진군하려고 할 때 일본관동군 아마노려 단장이 인솔하는 일본군이 구국군을 추격해왔다. 이에 구국군은 인차 군사회의를 소집하고 경박호련환전역을 펼쳐 추격해오는 적을 소멸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3월 13일부터 27일까지 2주일동안 여러 차례의 전투를 벌려 적들에게 엄중한 타격을 주었다. 장봉매복전에서만도 일본군 100여명을 섬멸했을 뿐만 아니라 려단장 아마노 소장까지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구국군의 성세가 높아가자 참군참전하는 사람들도 늘어나 이 때에는 만5천여명 대군으로 부대가 확대되기도 했다.

‘경박호련환전역’의 중대한 승리는 동만과 길동의 항일형세에 거대한 추동력이 되였다. ‘경박호련환적역’은 또 각지 괴로군들을 동요시키기도 했다. 많은 괴뢰군장병들은 주동적으로 구국군과 련계를 맺으면서 기의 혹은 구국군에 참가하려고 하였다. 당시 훈춘현내에는 길림성방군 제27려 678퇀 3개 영이 있었다.

1932년 4월, 중공 훈춘현위에서는 주운광, 백전태, 오빈, 윤석원, 향혜민 등을 이 부대에 파견하여 항일통일전선사업을 전개하게 하였다. 그들은 상층인물들과 병사들 사이에서 항일구국사상과 단결하여 공동의 원쑤를 쳐부셔야 한다는 혁명적 도리를 선전하였다. 그들의 열정적인 선전과 내심한 사상정치공작의 영향을 받은 적잖은 장병들이 공산유격대와 합작하여 공동항일할 것을 다짐했다. 이리하여 훈춘현성내의 제2영, 춘화진에 주둔하고 있던 제3영에 련이어 항일의 기치를 추켜들고 구국군대렬에 들어섰다.

그 해 9월, 항일유격대와 구국군은 훈춘현성, 류수하즈 등지에서 련합작전하여 일본침략자군을 습격,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구국군은 4월에는 녕안을 점령하여 각계 민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경박호련환전역’은 인민들에겐 지대한 고무였지만 일제에게는 침중한 타격이였다. 일제는 저들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하여 4월 3일, 회녕에 주둔하고 있는 보병 제75련대장 이께다대좌가 인솔하는 제19사단의 2개의 보기포공 혼성대대를 출동시켜 악명 높은 ‘간도대토벌’을 대규모적으로 감행했다.

구국군은 전략적인 대이동을 승리적으로 완성한 후 녕안에서 길림성 경내의 여러 항일부대의 련석회의를 소집했다.

회의에서는 동녕을 구국군의 후방근거지로 한다고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또 리두를 길림항일련합군 총사령 겸 자위군 총지휘로, 정초를 호로군 총지휘로, 왕덕림을 구국군 총지휘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장진방을 21려 려장 겸 항일련합군좌로군 총지휘로 접임(接任)시키기로 결정했다. 녕안회의 후 길림성 각 갈래 항일부대는 호상 배합하면서 작전을 진행했다.

구국군의 실패

7월, 길동 각 항일부대는 녕안현 하성자에서 다시 소베노련석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정식으로 길림항일련합군사령부를 설립, 각 군부 지휘를 총사령으로 결정했다. 왕덕림이 항일구국군 총사령으로 결정되였다.

1932년 9월, ‘9.18’사변이 1주년 되는 때 중공 훈춘현위에서는 마적달소학교에서 3000여명이 참가한 ‘병민련합대회’를 거행했다. 100여명의 구국군 장병이 대회에 참가했다. 이 때 구국군은 5~6만명으로 발전하였다. 구국군은 녕안을 중심으로 동만과 길동의 광활한 지역을 누비면서 일제침략군을 타격했다. 하여 일제의 가장 큰 우환으로 되였다. 일제는 대량의 병력을 집중하여 왕덕림부대를 향해 ‘토벌’ 을 감행했다. 1932년부터 연변, 왕청, 목단강, 할빈으로부터 출병한 일제군은 동녕일대를 향해 진공했다.

1933년 1월 1일, 일본군은 10사단 제8려단장 소베노 소장에게 지대를 편성하여 마도석을 진공할 것을 명령했다. 구국군 참모장 리련록은 보충1퇀, 2퇀 및 17퇀을 이끌고 마도석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일본군은 여러 차례 맹공격을 들이댔으나 어쩌지못했다. 오후, 구국군이 진지를 수리하고 있는데 적들이 장갑차와 중포로 맹공격해왔다. 전투는 긴장하고도 치렬하게 진행되였다. 아군이 차츰 적들이 공세에 눌리게 되자 리연록은 한갈래의 병력으로 하여금 엄호하게 하고호하림방향으로 철수했다. 결국 마도석은 적들의 손에 들어가게 되였다. 이리하여 전부의 중동로동선은 일본군의 통제에 들어가게 되였다. 적들은 병력을 집중하여 동녕의 구국군지휘부를 밀집 공격해 들어왔다. 1월 5일, 6,000여명의 일본군과 괴로군이 비행기의 배합하에 두갈래로 동녕현성에 박근해왔다. 구국군은 견뎌내지 못하고 철수하기만 했다. 동녕현성 바깥의 방선은 련속하여 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형세는 점점 준엄해졌다.

1월 6일, 일제군은 또다시 병력을 증가하여 동녕을 맹공격했다. 적들에게 포위된 구국군은 고립적인 전투를 벌려오다 탄약마저 떨어지게 되였다. 이에 각 려와 상의한 후 왕덕림, 공헌영은 1월 13일 쏘련변계로 피해 들어가기로 했다. 1월 14일, 동녕은 적들의 손에 들어갔다. 이에 왕옥진부대는 적들에게 반변해버리고 구국군 전방사령 오의성만이 길동지구에서 항일을 견지하다가 1933년 12월 부대를 이끌고 쏘련국경을 넘어서고 말았다. 이로써 동만과 길동지구에서 1년 남짓 항일의 기치를 들고 싸우던 구국군은 엄중한 좌절을 당하게 되였다. 구국군의 일부 부대가 공산당이 령도하는 항일유격대와 합작하여 전투를 견지한외에 대부분 부대는 기본상 와해되면서 구국군의 무장항일은 실패를 선고하게 되였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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