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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70돐 특별기획]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

편집/기자: [ 리철수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3-08 14:15:30 ] 클릭: [ ]

머리글

장춘제1자동차공장은 1953년 7월에 고고성을 울린 ‘공화국 장자'다. 공장이 건립된 초창기부터 생산직장과 연구실험실 그리고 행정부서에 이르기까지 로일대 조선족건설자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가 있다. 특수한 년대에 특수한 공장에서 여러가지 난관을 극복하면서 이룩해낸 이들의 괄목할만한 사적은 아직까지 집중적으로 기록한 적이 없다. 그들가운데 허다한 분들은 이미 저세상으로 갔고 생존해있는 분들은 90세좌우이다.때문에 자동차공장 제1대 조선족건설자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자못 필요하며 시간적으로 보아도 아주 시급하다.

십년, 이십년전의 일도 아닌 무려 60여년전의 일을 회억한다는 것은 건강상황으로 기억력이 몹시 쇠퇴해진 이들에게 있어서 큰 무리가 아닐 수 없다. 제1자동차공장의 초창기 건설과 함께 한 이들의 사적은 조선족사회에서 사료적 가치로도 그 의의가 깊어 단 한 쪼각의 이야기라도 엮어서 문자기재로 남겨 놓으려는 생각을 갖고 본 기획을 시도했다.

이 기회에 우리의 취재에 여러모로 도움을 준 제1자동차공장조선족로인협회 전임 회장 김수금녀사(80세)에게 감사를 드린다.

공화국 창건 70주년을 맞으며 장춘제1자동차공장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불타는 청춘을 바친 로일대 조선족건설자들에게 삼가 이 글을 올린다.

--편집자

제1자동차공장과 조선족건설자들(1)

자동차공업 령역 국가급 표준을 제정하다

 
리석규와 부인 방혜숙
 
장춘제1자동차공장 야금처 중앙시험실, 방열기공장 검사과 리화실험실에서 1956년부터 1990년까지 장장 34년간 중국의 자동차건설을 위해 불타는 인생을 바친 리석규 고급공정사는 장춘제1자동차공장의 1대 건설자이자 공신이다. 재직기간인 1983년 7월 제1자동차공장에서는 공장 건립 30주년을 성대히 기념하는 자리에서 리석규 고급공정사에게 영예증서를 발급, 거기에는 "우리 공장 창건과 발전의 30년 과정에 당신의 신근한 로동과 지혜가 응결되여 있습니다. 귀하에게 제1자동차공장 건설 공신 칭호를 특별히 수여하여 이를 고무하는 바입니다."라고 적었다.

공장야학교에서 중학교 수리화부터 배우던 나날들

겨울이 다 가는 2월 21일, 장춘제1자동차공장의 상징적 건물ㅡ1950년대에 지은 ‘붉은 벽돌 로동자주택'에 살고 있는 올해 90세에 나는 리석규 고급공정사를 찾았다. 자동차공장 건설에 대한 말이 나오자 로인은 한참 빛바랜 회억을 더듬더니 “돌이켜보니 나절로도 참 일생동안 배우기를 열심히 해온 것 같아요.”라고 같은 말을 몇번이고 되풀이한다. 고향이 화룡시 팔가자인 리석규는 19살에 나던 해인 1948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여 길림과 장춘 전역, 북경 평화 해방, 강서 남창에 진출했다가 조선전쟁까지 참가한 로군인이다. 싸움터에서 중상을 입고 1952년 9월 고향에 돌아와 수술치료 후 고향건설에 참가하다가 1954년에 연변한어사범학교 영예군인반에 들어가 1년간 학습을 하였다.

그가 장춘제1자동차공장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56년 8월, “당시 연변에서 21명의 우수한 젊은이들을 뽑아 자동차공장으로 보낸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중 저를 포함해 세사람이 야금처 중앙실험실에 들어갔는데 얼마 후 한사람은 연변으로 되돌아가고 다른 한사람은 조선에 나갔습니다. 저 혼자 남았지요.” 이렇게 회억한다. 모든 것이 생소하다보니 처음부터 배워야 했다. 구지욕이 강한 리석규는 빠른 시일내에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기 위해 공장에서 꾸리는 야학교에 다니며 중학교 수리화와 한어, 일어 등 기초지식부터 학습했다. 그후 자동차고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2년간 공장실험실을 떠나 전문지식을 밤늦게까지 탐독하면서 열심히 배워나갔다. 우수한 성적으로 학업을 마친후 리석규는 자동차공장 공예연구소에 전근되여 금속실험실 금속조직실험조의 업무조장으로 발탁, 동사자들을 이끌고 몸을 내번지고 일했다.

‘문화대혁명' 박해속에서도 당에 대한 일편단심 변함없어

제1자동차공장 실험실에서 한창 젊은 시절의 리석규

‘문화대혁명’시기 리석규는 특무로 몰려 물매를 맞고 죽을 시련을 겪으면서도 당에 한점 부끄럼 없이 충성하였다. 만천하가 어지럽던 ‘문화대혁명'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 때 제1자동차공장도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정상적인 생산과 건설이 엉망진창이 돼버렸으며 많은 이들이 하루아침 사이에 투쟁의 대상으로 되여버렸다. 1968년 여름, 자동차공장에 온 후로 말없이 묵묵히 연구와 실험에만 전념해오던 리석규에게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라고 ‘조선특무'라는 억울한 ‘모자'가 씌워졌다. 품성이 강직하고 전쟁터에서 목숨까지 선뜻이 바칠 각오를 하면서 의지를 련마해온 그가 터무니없는 죄장을 승인할리가 없었다.

“투쟁대회에서 반란분자들이 나서서 당신은 누군가라고 물으면 비판받는 사람들은 ‘죄장' 이름에 따라 ‘나는 무슨 누구다'라는 식으로 대답해야 하였지요.” 리석규 차례가 돌아왔다. “리석규, 너는 누구냐?” 반란분자들의 질문에 성질이 대쪽같이 곧은 그는 “나는 조선특무가 아니다. 나는 중국공산당 당원이다!”라고 쩌렁쩌렁하게 대답했다. 악에 바친 반란분자들은 그를 지하실로 끌고 들어가 죽도록 때렸다. 다행히도 사태를 파악한 현장의 한 해방군이 들어와 제지했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더면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마지막까지 승인하지 않았습니다. 그자들한테 왜 굽어 들겠습니까." 8개월 후인 1969년 ‘5.1'절 을 앞두고 리석규는 드디여 억울한 루명을 벗고 풀려나왔다.

자동차공업 연구실험 전문가로 국가급 표준을 제정하다

영예증서

1969년 리석규는 제1자동차공장 방열기공장 기술과에 자리를 옮겨 재료공예기술과 리화실험실 책임사업을 맡고 새로운 일터에서 사업을 시작하여 1990년에 리직할 때까지 줄곧 한곳에서 연구실험사업을 견지했다. 30여년 동안 그는 가정의 일은 전부 안해 방혜숙에게 떠맡기고 오로지 자동차공장 건설을 위한 일에만 전념하여왔다.

방혜숙할머니는 그 때 시절을 떠올리면서 “정말 고생한 말을 하라면 언제 다 하겠어요. 저 분의 도움을 바란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지요. 글쎄 김치움도 이 여자의 몸으로 다 팠다니깐요. 지금 상상이나 하겠어요.”라고 말한다. 리석규는 안해의 말에 “그래요, 그 때는 정말 일밖에 모르고 살았수다. 당신이 아니였더면 이 집이 어떻게 됐겠어요. 정말 수고가 많았지요. 지금도 이 병든 몸이 당신에게 페를 끼치는구려.”라고 미안한 마음을 내비친다.

1980년대에 들어서 우리 나라의 자동차공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리석규는 실험실의 동료들을 이끌고 불량제품 원인 분석, 신소재, 새로운 시험방법 그리고 외국에서 수입해들이는 원자재 품질 검사에서 출중한 성적을 거두었다. 그가 책임지고 수년간에 거치는 시험과 연구과정을 거쳐 편찬한 《소결철 침투 혹은 탄소질소 공침 경화층 심도 측정》은 부급 표준으로 후에는 국가급 표준으로 제정되였다. 리석규의 연구성과는 제1자동차공장에서 선후로 9번이나 과학기술 발명과 혁신 1, 2 등상을 수상했으며 전부 생산에 응용되여 제1자동차공장건설을 위하여 괄목할만한 경제효익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보통 선진국에서 수입해들이는 원자재는 다 품질이 좋은가 하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자동차공장 원자재 수입 품질 검사를 책임진 리석규는 수입한 금속원자재의 외관으로부터 공예, 성분, 성능 등 각종 정밀분석을 거쳐 불합격품을 발견, 선후로 일본, 독일, 오스트랄리아 등 나라에서 수입해들이는 원자재에서 불량품과 문제를 발견했으며 경제배상을 받아냈다. 그가 쓴 론문은 전국전문학술회의에서 1등상을 받았으며 자동차강국 일본에서도 발표되였고 어떤 론문은 ‘함금량’이 높아 비밀로 취급돼 내부에서만 돌려보고 외부에는 한때 발표되지 않은적도 있었다.

1990년 12월 리석규 고급공정사는 34년간 몸을 담그며 일하던 장춘제1자동차공장에서 리직, 그후에도 그는 높은 기술을 인정받아 료녕과 광주의 공장에 초빙돼 리화실험실에서 전문가로 있으면서 5년간 중국의 자동차공업발전을 위하여 헌신했다.

/길림신문 리철수 정현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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