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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90]“열심히 일했더니 인정해주더라구요”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2-11 14:27:03 ] 클릭: [ ]

—한국 세창유리공업 대표 안창걸씨의 이야기

 
세창유리공업 안창걸대표.

“연길시3중에서 초고중을 마치고 대학시험을 쳤는데 합격되지 못했지요. 6년이나 반장을 했다는 놈이 대학에 못 가니 어찌나 부끄럽던지…” 너부죽한 얼굴에 항상 넉살 좋은 웃음을 담고 다니는 안창걸씨가 하는 말이다.

선생님들도 복습반을 일년 더 다녀 대학에 꼭 입학하라고 권고했지만 집안 사정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그는 연길시 공신촌 공청단 서기직을 시작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개혁개방초기 그는 자그마한 음식점을 경영하면서 창업의 길에 나선다. 결혼하고 일정한 자금이 마련되자 택시업에 뛰여든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소비수준이 높지 않은 연길에서 안정적인 높은 수입을 보장하기란 그리 쉽지않았다. 그쯤해서 한국바람이 연길에 불어치기 시작했다. 불법체류라는 말은 없이 그냥 7만원이면 한국에 가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브로커들의 말만 믿고 무작정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것이 1999년 4월이였다. 아글타글 모은 돈에 여기저기서 꾼 돈까지 십몇만원을 팔고 안해와 같이 즈려밟은 한국땅은 브로커들이 말하는 천당만은 아니였다. 일단 한국에 나와 있던 친구들의 소개로 오산의 현대차 납품업체와 엘지전자제품 납품업체 등지를 돌면서 일해보기도 하고 식당가든에 가서 닭도 잡고 오리도 잡아 보았다. 이렇게 몇달 일해보았지만 불법체류 신세라 급여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집세와 전기세를 내고 나면 집에 보낼 돈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돈이 된다는 광고를 보고 서독도부근의 가두리 양식장에도 가서 일한 적도 있다. 망망대해의 흔들리는 배머리를 잡고 참을 수 없는 멀미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는 오직 어서 빨리 빚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 뿐이였다. 그러나 한달에 한두번씩 륙지를 밟아보는 힘든 일이였지만 그것도 3개월 일하니 고기가 출하되면서 일감이 끊기였다. 그 당시 불법체류자를 단속하는 바람이 세차게 불어쳤고 일부 량심없는 업주들은 조선족들을 불러다 일을 시키고 불법체류자 고발을 일삼으며 급여를 주지 않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안창걸씨도 그런 일을 당했고 그럴 때마다 꿀먹은 벙어리신세로 참고 또 참았다.

일감이 끊기니 또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번에는 전주의 대형세탁업소에 취직했는데 함께 일하는 한국아저씨가 중국사람이라고 어찌나 까다롭게 구는지 도저히 함께 일할 수가 없었다.

불쾌한 기분으로 서울에 있는 세집에 돌아오니 안해의 어두워진 얼굴이 맞아주었다. 서너달에 한번씩 직장을 바꾸어야 하는 한국생활이 싫어나기도 하였지만 부부가 한국에 오면서 꾼 돈을 빨리 갚아야 하는데다 연길에 두고온 딸애가 소학교에 입학한다는 기별이 오는 바람에 안창걸씨는 반드시 안정한 직장을 찾아야겠다고 작심했다.

“그 시절 재한조선족의 90%이상은 모두 불법체류자였어요. 지금처럼 좋은 정책도 없이 그냥 친척이 없으면 불법체류를 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였으니…후-” 안창걸씨는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이튿날 그가 광고지를 들고 찾아간 곳은 경기도 포천의 특수유리공장이였다. 기술도 배우고 급여도 받을 수 있는 그곳에 연수생으로 들어간 안창걸씨는 본격적으로 특수유리 재단과 포장 등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원래 자상하고 무슨 일이나 하면 열심히 하고 모르는 것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끝을 보는 성미인 안창걸씨였기에 그는 기술을 배운지 4개월만에 파격적으로 기술자격증을 획득하고 한국페아유리(双层玻璃)공장의 부름을 받고 그 곳에 자리를 옮겼다.

한국사람, 중국사람을 가리지 않고 기술과 능력만을 인정하는 마음씨 좋은 사장님과 함께 일하면서 그는 한국도 마음껏 일할 수 있는 곳이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열심히 일한 보람으로 거기에서 2년간 공장장까지 지낸 그는 후날 공장을 매각하고 건축업에 뛰여드는 사장님의 권고로 건축분야 유리전문업체를 내오게 된다. 한국에 와서 첫 1년간은 힘든 나날이였지만 3년이 지난후에는 자기의 노력으로 건축회사의 계렬하청업체 사장이 된 것이다. 그때가 바로 2003년이였다.

유리를 하다보니 창호까지 겸해야 했는데 그 분야는 자격증이 필요했다. 안창걸씨는 일하면서 휴일을 리용하여 창호자격증까지 따냈다. “그때나 지금이나 열심히 일하였지요. 그랬더니 한국사람들도 인정을 해주더라구요.”

안창걸씨는 처음에는 같은 업체라도 중국인이 경영하는 업체는 경쟁력이 떨어지기에 항상 남들의 뒤에 처지게 되더라고 소개했다.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많은 것이지요. 기술력이 약하고 서툴다는 것이 그분들의 인식이였겠지요.”

하지만 일단 그의 업체를 한번 리용해본 회사들이나 고객은 아예 그들만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 기술력이나 서비스는 물론 가격이나 파손률 등 여러면에서 한국업체를 릉가하였기때문이다. 현재 한국에서 최고로 불리는 이건창호의 서울시 노원구 대리점인 함마금속의 유리나 창호는 거의 안창걸씨의 세창유리공업이 도맡다 싶이 한 상황이고 사무실도 바로 그곳에 잡았다.

현장에서의 안창걸대표.

안창걸씨는 현재 직원은 5명인데 일이 많을 때면 사람을 더 채용하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무엇무엇 해도 안전이 최고라고 강조한다. 일하기전에도 일하면서도 일이 끝난후에도 강조하는 것이 안전이란다. 유리일은 세심하면서도 위험한 일이다. 한번 다쳤다 하면 장애나 사망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층작업과 안전띠를 착용한 고공작업이 대부분이다보니 작업요령을 잘 장악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안전에 대한 점검도 필수란다.

“지금까지 우리 직원들은 한번도 다친 적이 없어요. 가장 큰 사고라야 손이 유리에 베인 정도지요.” 그러면서 안창걸씨는 직원들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했다.

책임성이 높고 열심히 일하는 동시에 건축회사의 하청업체, 계렬업체로 지정되였으니 신용도가 높아지기 시작하였고 거기에 동업체가 묵과하는 2~3%의 파손률을 그 절반대인 1.5%로 낮추어 많은 고객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리를 포장해서 작업장소에 가져왔는데 우리 직원이 아닌 다른 분들에 의해 파손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쉽게 파손되지 않도록 쌍겹포장을 하는 것입니다. 일은 힘들지만 고객들을 위해 손실을 줄이는 것이지요.”

유리종류가 많아 어떤 업체에서는 낮은 가격의 유리를 선호하지만 그는 최고의 질량의 유리를 찾는다. 유리에 따라 결로(바깥 공기와 집안 공기의 온도 차이로 생기는 수증기)방지, 강한 태양광선방지와 같은 성능이 다르기에 가격대가 좀 차이가 나더라도 고객들은 그에게 엄지를 내든다.

가족들은 위험한 일을 한다고 그에게 직업을 바꿀 것을 여러번 건의했다. 하지만 그는 직업이라는게 금전적 요소도 중요하지만 한번 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하면서 요령을 잘 장악하고 작업순서를 엄격히 지키면 위험한 상황은 없을 것이라고 가족을 안심시킨다.

“회사에 한국직원도 있고 조선족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적에 관계없이 내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분들이 평등하게 잘 살 수 있도록 하는게 사장인 나의 임무입니다.”

이는 학교시절에는 반장으로, 청년시절에는 촌의 단지부 서기로 사업하면서 집체주의와 평등주의에 푹 빠졌던 안창걸씨만이 표달할 수 있는 내심의 진실한 발로이다.

그는 “지난번에 고향에 다녀왔는데 그쪽 유리업체들의 작업질이 여기에 비해 허술한데가 많더라.”고 하면서 앞으로 회사를 그만두면 연변에 돌아가서 유리건축업체를 경영할 생각도 가지고 있다고 자기의 금후 타산을 살짝 내비쳤다.

/길림신문 김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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