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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이야기87]“일이 즐거우면 인생은 천국”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25 15:29:46 ] 클릭: [ ]

—83세 로화가 조금석이 말하는 삶

화가 조금석옹

화가 조금석옹(翁)은 올해 83세이다. 그러나 지금도 손이 놀새 없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해…” 선생은 늘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에도 연길시 여러 양로원만 11번이나 찾아갔다. 양로원로인들을 모델로 스케치작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반나래품을 들여서 대여섯장의 속사나 소묘작품들을 초고로 그린다.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와 수개하면서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계속한다. 조금석옹의 말에 의하면 이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란다. 좋아하는 일에 빠져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의 락과 행복을 공감할 것이다.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다보니 세월가는 줄도 모르고 살았다”고 로인은 말했다. 80대의 언덕에도 언제 올라 섰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선생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 세월의 무정함과 쏜살같이 흐르는 세월을 개탄했다. 그는 화가로서 속사는 물론 소묘, 유화, 선전화까지 다양하게 창작하고 있었다.

중공당원인 조금석옹은 1991년도에 연변일보사에서 미술편집으로 있다가 퇴직했다. 50년대 말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조금석”이라는 서명은 허다한 조선문 신문잡지들에서 심심찮게 보인다. 신문의 속사나 스케치는 물론 《연변문예》, 《연변녀성》같은 잡지들의 표지나 문장속 삽화도 많이 그렸다.

전망좋은 연길 대천성 17층의 자택에서 조금석옹은 두툼하고 오래된 스크랩 한권을 꺼내 보였다. 지난 세기 50년대의 처녀작 그림을 시작으로 재직시절은 물론 퇴직후에 도 선생이 창작한 허다한 미술작품들이 넘쳐나게 스크랩되여 있었다.

처녀작 “완공되여가는 연길시문화궁”

속사 “건설중의 훈춘발전소”

선생의 처녀작은 연길시문화궁(로동자문화궁)건설현장 속사였다. 1958년 8월 28일, 연변일보에 실린 작품이였다. 22살에 그린 작품이라고 스크랩에는 기록되여 있었다. 아직 애된 나이에 창작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별로 흠잡을데가 없이 완벽했다. 선생의 천부적인 미술적재능을 보여주는 속사였다.

실지 조금석옹이 처음 그린 연길시문화궁 건물은 원래 이것이 아니였다. 건물이 너무 커서 처음에 그릴 때는 채 못그려 넣었다. 그런데 작품을 투고할 때 당시 연변일보사의 미술조 남수길선생이 속사지에 종이를 덧붙이는 방법까지 알려주면서 그리지 않은 건물까지 더 그려오라고 했다. 결국 그는 다시 건설현장에 가서 그림을 보충했다. 완수된 그림은 신문에 6단이나 차지하면서 크게 발표됐다.

“원고료가 7원이나 나왔더군” 그때 세월에 7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였다. 첫 작품을 발표해서 받은 원고료로 커다란 거울 하나를 사서 집에 걸었고 나머지 돈은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단다. 선생은 60여년이 지난 과거를 어제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연길시문화궁 건물은 이젠 사라져 흔적조차 없지만 완정한 건물그리기를 요구했던 신문사의 의도는 어쩌면 영원한 기록을 위한 신문의 사명때문이 아니였을지 모르겠다.

탈곡(1961년 창작)

산열매 익을때(1982년)

인물, 풍속, 풍경속사가 대부분인 조금석의 작품은 생활미와 민족적특색이 짙고 형상성이 강하며 선과 흑백처리가 합리하며 화면이 산뜻하고 깨끗한 특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화가가 생활속에 깊이 들어가 쾌속사생의 수단으로 운동하는 대상을 놓치지 않고 짧은 시간에 안정한 대상으로 그리고 특징적인 부분을 도드라지게 개괄하여 간결하고도 세련되게 형태와 정신을 겸비시켜 그린데 있다. 또 선을 쓰는 기법에서 관통성과 류창성, 절주감을 확보하면서 강한 것, 섬세한 것 등 각종 선을 변화시켜가면서 교묘하게 결합한데 있다.

1937년도에 연길시 동광촌에서 태여난 조금석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유독 천부적인 재능을 보였다. 아직 어린 소학교시절에도 흑판보에 사람을 그릴 때 코를 유난히 크게 그려 우스꽝스러운 개성을 표현할줄 알았다. 비오는 날 마대 쓰고 학교가기 힘들어서 집에 남겨진채 책장에 트럼프장 크기의 칸막이를 그려놓고 거기에 코끼리같은 동물들을 그려보면서 화가로 되는 걸음마를 익혔다.

어찌보면 조금석옹은 전문적인 미술교육보다는 자수성가한 타입이다. 그림공부라고 했던 것은 일생에서 단 한번뿐이다. 1957년도쯤 연길시문화관에서 꾸린 미술연구소에서 석고상 그리기를 배운게 다였다. 석고상은 비록 겉으로 보기엔 흰색채뿐이지만 어둡고 밝고 중간색으로 구성된 석고상의 색채연구는 미술창작에서 매우 중요하다.

조금석옹은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12살 나던해 동광촌 농촌으로부터 어머니를 따라 연길시 태평가로 이사해왔다. 자식의 장래를 위한 막부득이한 이사였다. 어머니가 재봉일과 쌀장사를 했지만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운 구차한 생활을 하였다. 미술연구소에서 공부하는 2년간 거의 매일마다 10전어치밖에 안되는 과자로 끼니를 에워야만 했다. 생활형편이 어렵다보니 더욱 큰 배움의 기회를 바라볼 수 없었다.

그때 당시 쏘련의 유명한 미술속사작품들을 보면 평범한 일상생활을 반영한 작품들이 많았다. 여기서 계발을 받은 조금석옹은 속사책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생활속에 들어가 틈만 있으면 그리고 또 그렸다. 꾸준히 그림을 그렸더니 그림수준도 날이 갈수록 높아갔다. 그때 그는 생활없는 창작이란 생동하지 못하다는 도리도 깨쳤다. 이러한 습관과 깨우침들이 후날 조금석옹의 미술창작에 거대한 동력과 힘의 원천이 되였다.  

사과배 풍년(2016년)

백도라지(2016년)

“1976년도에 공작대로 농촌에 1년간 내려 갔는데 그때도 항상 속사책을 몸에 지니고 다녔지요…” 밭머리 담배쉼이 반시간가량 있었는데 담배를 안피우는 조금석옹은 그대신 필과 종이를 꺼내들고 사람들을 스케치했다. 1년사이에 두터운 책 2권 묶을 분량을 스케치했다.

공장이나 농촌, 부대와 학교, 또는 시장과 거리바닥, 심지어는 마을 운동회, 무대생활에 이르기까지 그가 지내온 모든 생활이 스케치작품으로 기록되였다.

“남들은 한가하게 차를 마실 때 나는 책을 보았다”는 로신의 말이 마치 화가 조금석옹의 말처럼 느껴진다. 조금석옹의 미술작품들을 보면 항상 들끓는 로동의 현장에서 생생한 생활과 사업을 기록한 것이 핍진하게 안겨온다.

“경험해본 생활이 많다보니 창작량이 많을 수밖에 없었지요.” 조금석옹의 실토정이다. 이 같은 생활습관들은 선생의 재직시절은 물론 퇴직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지금까지 조금석옹은 수만점이 넘는 각종 그림들을 창작하였는데 그중 만여점은 각종 신문, 잡지, 단행본 등을 통해 이미 발표되였다. 그동안 선생이 국가와 성, 주 각종 미술전에서 받은 영예도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퇴직 후에도 조금석옹은 《연변조선족생활소묘》단행본 6권을 한국에서 출판하였으며 국내는 물론 한국, 일본, 필리핀 등 해외에서 여러 차례 개인미술작품전시회를 가지였다.

조금석옹은 “자기일을 가지고 열심히 일할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말했다

“조금석선생의 그림은 우리의 전통을 일깨워주는 듯하다. 인물 풍경을 중심으로 옛스러운 전통을 소묘속에 담아 오래도록 간직하게 한다.” 조금석옹의 작품에 대한 해외 언론의 평가다.

연변예술가협회 전임 부주석 김문무는 “근면이 인간에게서 가장 중요한 미덕이라더니 화가 조금석이 소지한 가장 소중한 미덕이 바로 근면”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선생은 “건강과 몸이 따라주는 한 그림을 계속 그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림 그리는 일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하기때문이다. 바로 “일이 의무이면 인생이 지옥같지만 일이 즐거우면 인생이 천국”이기때문이다.

지금도 조금석옹은 매우 정정하고 건강한 모습이다. 장수비결을 물었더니 조금석옹은 “늙었어도 일을 가지고 몸을 계속 움직이기때문이 아닐가”고 반문했다.

선생은 특히 “젊어서 많이 뛰여 다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월은 영원할 것 같지만 눈깜박할새에 지나가고 사라져 버린다는것, 시간을 아끼고 하루하루 허송세월하지 말아야 가치있는 삶의 보람을 느낄수 있을것”이라고 말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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