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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27)-중공연변특별지부의 탄생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9-01-07 10:28:04 ] 클릭: [ ]

조선공산주의자들 집단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

중국공산당의 령도 아래 반제반봉건투쟁 궐기

연변에서의 중국공산당 초기 활동

1921년 7월, 중국공산당이 상해에서 탄생하였다. 중국공산당은 선후로 당원간부를 동북에 파견하여 혁명활동에 종사하게 하였는데 그중에는 조선인의 첫 중국공산당원 한락연도 있었다. 한락연은 1924년 봄에 동북에 파견되여 봉천, 할빈 등지에서 사업하면서 청년운동을 지도하였다.

1927년 10월 24일, 할빈 도리구에서 동북 제1차 중국공산당대표대회가 열렸으며 중공만주성위가 탄생, 성당위기관을 봉천에 두었다. 이로부터 동북지구에 통일적인 공산당기관이 있게 되였다. 1928년초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민중토대와 혁명운동의 토대가 좋은 연변에 중공당원인 주동교를 파견하여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게 하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울 수 없게 되자 1928년 여름에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 기회에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파견해줄 것을 요구,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여서《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진지로 되였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 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 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 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당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들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 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1928년 7월에 각지에는 기층 단지부가 세워지게 되였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는데 류건장과 조지강은 다 향산자유원의 졸업생이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1928년10월 중공동만구위가 재조직되였는데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리별천,선전위원을 손좌민이 맡았다.

중공동만구위와 그 산하의 당조직에서는 학교를 기본진지로 청년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선전하고 애국주의를 선양하면서 적극적인 활동을 벌렸다. 그러나 당시의 공산당사업은 단지 지식계층에만 국한되고 광범한 로농대중 속에 심입하지 못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룡정에서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 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 말았다.

국제공산당 ‘12월테제’

1928년 12월,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에서는 조선공산당 각파가 신청한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를 승인하지 않고 ‘12월테제’를 내려보냈다. 테제의 주요내용은 조선공산주의자들은 반드시 ‘파쟁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의 울타리를 벗어나 로농민중을 튼튼한 기반으로 한 볼쉐비크화한 당을 재건설’하라고 촉구하는 것이였다.

‘12월테제’의 정신을 접수한 조선공산당 각파는 파쟁을 극복하고 볼쉐비크화한 당을 재건한다는 명의하에 각기 재건설위원회를 내왔다.

각파 재건위원회는 중국공산당조직과 접촉하면서 동북조선인들의 실제에 근거하여 혁명사업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광범한 조선인들의 력차의 투쟁은 모험주의 경향과 각파 사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엄중한 손실을 보았다. 이러한 결점들을 보아낸 조선인들은 각파 재건위원회에 점차 실망을 느끼기 시작하였으며 능히 통일단결되여 민중운동을 정확하게 령도할 수 있는 령도력량을 찾기에 고심했다.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국제공산당의 ‘일국일당’의 원칙에 의하여 동북에 있는 조선공산주의단체들을 쟁취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시키는 사업을 전개했다. 조선인들은 중국관내에서부터 중국공산당에 먼저 가입하기 시작했다. 1927년 9월, 상해의 조선공산당 국제련락부는 ‘일국일당’의 원칙에 근거하여 집체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공강소성위원회의 소속인 ‘법남(法南)구한인직부’를 조직하였으며 이어서 북경의 조선공산주의자들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북경지부를 설립하였다.

1930년 1월과 3월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에서는 2차에 걸쳐 조선공산당 각파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중국공산당가입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고 리춘산, 한빈 등을 상해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가입문제를 토의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 3월, 할빈에서 각파 대표들의 협의회가 있었는데 화요파의 김찬 등 소수인들이 중국공산당 가입을 동의하지 않고 조선공산당 재건을 주장한외에 대부분 대표는 중국공산당 가입을 찬성하였다. 회의 후 엠엘파는 ‘선언’을 발표하여 엠엘파만주총국의 해산을 선포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할 것을 표시했다. 화요파의 동만도간부들은 총국의 의도여하를 불문하고 먼저 해산선언을 발표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기 시작했다. 서상파는 ‘재만조선인공산주의자동맹’을 설립하였으나 공산주의자동맹은 결국 ‘조선혁명연장론’이며 ‘일국일당’ 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동년 8월에 해산되고 말았다. 하여 동북에서의 조선공산당은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 중공만주성위에서는 리원, 리춘산, 한빈, 장시우, 김재춘, 김기철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중국공산당가입을 선전하고 그들의 입당수속을 도와주고 각지에 중공만주성위의 소속으로 지방당지부를 내오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만주총국은 해산되였지만 력사적 의의는 위대합니다. 10년동안 비록 조선연장론, 파벌싸움, 맹동주의의 착오를 범하기는 하였지만 금후 중국공산당의 활동에 상당한 리익을 주기도 했습니다. 맑스-레닌주의와 사회혁명사상을 광범위하게 전파했으며 많은 혁명군중단체를 건립하였습니다. 이것은 중국공산당이 도시사업으로부터 농촌사업에 들어갈 수 있는 튼튼한 기초를 닦아놓은 것이였습니다. 1931년전에는 동북에 공산당원이 186명 뿐이였으나 1931년에는 1700여명으로 되였습니다. 연변에만 636명 공산당원이 있게 되였으며 조선인 중국공산당 당원은 전체 당원의 90%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공산주의인재들이 양성되였는데 녕안, 밀산, 몽릉, 탄원, 반석, 청원, 류하 등지의 제1대의 현위서기는 다 조선인당원간부들이였습니다. 10년 동안 수천명의 우수한 공산당원들이 양성되였는데 리철부(조선공산당 중앙위원)는 중공하북성위 서기로 사업하기까지 했습니다. ‘9.18’사변 후 우선 조선인지구에서 유격근거지가 창설된 것도 조선공산당의 기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활동은 중국공산당의 동북에서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의 역할에 대한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의 평가이다.

중공연변특별지부 탄생

중공동만구위가 파괴된 후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인 공산당원 왕경(王耿—원명 문갑송)을 연변에 파견하여 당조직을 재건하게 하였다.

왕경은 먼저 팔도하자(지금은 덕신향 숭민촌)에 와서 교편을 잡고 피신해있는 조지강을 찾아 성위의 지시를 전달하고 당조직재건사업을 연구하였다. 왕경은 처음에는 팔도하자, 달라자 일대에서 사업했다. 그러나 이 일대가 일제침략자들이 룡정으로부터 조선으로 통하는 교통요충지이기에 관방의 경계가 삼엄하므로 당사업을 전개하기 불편하여 이동이 필요했다. 조지강은 화룡현교육국 국장 관준언의 도움을 얻어 왕경을 화룡현제2소학교(지금은 룡정시 개산툰진 광소소학교) 교원에 취직시켰다. 왕경은 교원신분으로 공산당지하공작을 벌리였다. 당시 화룡현소재지였던 달라자에서 건립된 중공연변특별지부는 2월 20일(1930년) 왕경이 교편을 잡고 있는 상천편(개산툰)으로 옮겼다. 왕경이 서기를 맡고 조지강, 리복해, 요일평이 위원을 담임하였다. 왕경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특별지부는 15명 당원으로 발전되였으며 석건평, 남양평, 달라자, 동량사에 기층 당지부를 두게 되였다. 얼마 안되여 왕청현 대감자에도 지부를 건립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가 건립된 후 적극적으로 당조직을 회복하는 사업을 전개함과 동시에 연변의 실제와 결부하여 토지혁명을 진행하고 고리대를 반대하며 조세납부를 반대하고 국민당정부에서 교육권을 회수하는 것을 반대하는 등 구호를 제출했다.

1930년 4월,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조선인공산당원 박윤서, 마준을 연변에 파견하여 중공연변특별지부를 협조하여 ‘붉은 5월 투쟁’을 발동하게 하고 투쟁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을 고찰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게끔 하였다. ‘붉은 5월 투쟁’가운데서 원 조선공산당 당원들은 중공연변특별지부의 령도 밑에 적극적으로 투쟁에 참가하였으며 고찰을 거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하여 공산당의 조직건설이 비교적 빠른 진전을 가져왔다. 그러나 투쟁가운데서 일부 간부와 조직이 폭로되여 특별지부성원인 조지강 등이 부득불 연변을 떠나게 되여 특별지부에는 왕경 한사람만 남게 되였다. 5월 중순 왕경(이미 리왈룡으로 개명), 리창일, 주건, 리용 등은 연변특별지부를 재조직하였다. 서기는 그냥 왕경이 맡았는데 이들은 모두 조선인들이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에서는 대중을 령도하여 들끊는 ‘붉은 5월 투쟁’을 전개하여 일제의 기염을 여지없이 꺾어놓았다. 그러나 일제군경들의 잔혹한 탄압으로 하여 많은 당원간부들이 체포되고 희생되였다. 왕경도는 부득불 연변을 떠나 중공만주성위를 찾으러 봉천으로 갔다.

“중공연변특별지부는 조선인공산주의자들과 광범한 조선인대중들을 과거의 협애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여러 민족 인민들과 어깨 겯고 일본제국주의와 국민당반동통치를 반대하는 투쟁에로 이끌었으며 원 조선공산주의자들이 과거의 파벌관념을 버리고 중국공산당의 령도 밑에 중국혁명에 헌신하도록 이끌었습니다.” 박창욱교수의 견해이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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