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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가계송3]백원으로 시작한 타향살이 하늘이 높은 줄 몰랐다

편집/기자: [ 김태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12-12 11:48:12 ] 클릭: [ ]

--할머니의 돈 1500원 꿔가지고 장가계로 향한 김학, 그후로부터 장가계에 정착하기까지

장가계시 영등구 남장평 리수하반에 가면 장가계시민들이 즐겨 찾는 먹자골목이 있는데 투쟈족전통음식점들이 줄지어선 가운데 <김가양구이관>이란 간판이 눈앞에 안겨온다. 이 가게 주인은 룡정태생의 김학(37)씨인데 그가 장가계에 오게 된 사연은 무척 재미났다.

“어려서부터 공부하기 싫어했고 대신 친구들을 많이 사귀였어요. 부모님 손에 이끌려 새벽농업대학에 입학하였지만 결국 군입대를 결심했지요.” 그렇게 2년간 군복무를 마치고 룡정시공안국에 배치받았는데 외지에 나갔던 친구가 설쇠러 와서 연길에서 밥을 먹자고 련락이 왔단다.

당시 로임 520원을 받던 김학이는 하루저녁에 3천원도 넘어 쓰는 친구의 호방함에 놀라 도대체 무슨 일을 하는가고 캐여물었다. “그냥 작은 기발 하나 들고 밖에서 한고패 돌면 5천원씩은 번다.”라는 친구의 말에 “그럼 나도 끼워달라.”고 말한게 그가 장가계로 오게 된 계기다.

양념물에 절인 양다리를 꼬챙이에 꿰고 있는 김학씨.

김학이는 할머니의 돈 1500원을 꿔가지고 친구와 함께 장가계를 향해 떠났다.

“직업이고 뭐고 그냥 때려치웠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연길에서 장가계로 가는 비행기가 없었고 다른 곳을 거쳐 가려고 해도 항공권이 엄청 비싸던 때라 기차를 타고 장춘까지, 다시 북경을 거쳐 장가계로 왔는데 친구와 함께 기차표를 끊고 기차와 려관에서 3일 자면서 목적지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호주머니에 100원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김학이는 백원외엔 다 번 것이라고 익살스레 말하는 것이다.  

“장가계역에 도착하여서 많이 실망했어요.대도시인 줄 알고 따라왔는데 농촌이라도 형편이 없는 농촌마을이였으니 말입니다.”

아스팔트길도 없었고 고층건물도 없었다. 산간지대라 하루에 세번 지나가는 렬차외엔 별다른 교통수단이 없었다. 돌아갈 생각이 굴뚝 같았으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이드란 말도 처음 들었지요. 가이드증이라는 게 다 뭡니까? 그때에는 그냥 기발 하나면 되였지요.”

하냥 친구들에게 얹혀살 수만은 없었고 또 기왕 나왔던 김에 부딪쳐 보기로 했다. 형님벌 되는 분의 뒤를 따라 다니면서 어떻게 손님을 받고 어떻게 풍경지로 이동하며 무슨 말을 하는가를 하나하나 배웠다.

연변텔레비죤방송국기자의 인터뷰를 받고 있는 김학씨.

“그것이 시작이였지요. 첫날 함께 일한 형님으로 부터 돈 5천원을 받았어요.”

그때에는 교통수단이 락후한데다가 울퉁불퉁한 산길을 두발로 톺아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그해가 바로 술덤벙물덤벙 하늘이 높은 줄 모르던 21살의 김학이 보낸 2002년이였다.

“제가 여기에 자리를 잡은 후, 2010년도에 한국에서 돌아온 부친으로부터 위해에서 양고기구이가 잘 되는데 장가계에 양구이집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이 왔지요.”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말이라면 거역 한번 해보지 못한 김학은 위해에 가서 양구이장사환경을 고찰하고 그길로 내몽골에 가서 양구이기술을 새로 배워왔다. 조미료는 연변과 내몽골의 방법을 절충하여 만들었다. 구이메뉴도 통양, 양다리, 양갈비, 장어 등으로 많이 넓혔다.

부모님과 위해에 있던 동생과 함께 월량만에 <김가양구이관>을 개업한 것은 그해 가을이였다.

“처음에는 마당이 널직한 낡은 집을 세맡았지요. 밖에 구이가마 18개를 놓고 매캐한 연기를 피우면서 저녁부터 새벽까지 일했어요.”

생각밖으로 대성공이였다. 조선족은 물론 연변사람과 비슷한 구미를 가진 당지인들도 하나둘 오기 시작하더니 절반이상의 구이상은 당지인들이 차지하게 되였다.

단골이 된 당지인들이 구운 양다리를 먹고 있다.

통이 큰 친구들이 손님들을 모시고 와서는 몇백원, 몇천원씩 소비해주었다. 그들은 이튿날에 일이 없으면 아예 새벽까지 먹군 하였는데 그때 하루 평균 수입이 만원이상에 달했다. 그러다가 환경오염과 낡은 건물을 근거로 공상국으로부터 영업정지처분을 받게 되자 그들은 북산 렬사릉원 아래쪽에 새 건물을 세맡고 영업장소를 옮겼다.

“지난해까지 거기서 영업했는데 조선족들이 점차 남장평쪽으로 이사오면서 조선족생활반경이 리수이남으로 집중되더군요.” 그래서 그분들을 위해 남장평으로 영업장소를 옮기게 되였다고 한다.

새로 장식한 <김가양구이관>은 투쟈족풍의 건물에 자리잡았는데 1, 2층구조로 구이상 12개를 놓았다.

“저는 장사를 비교적 쉬운 방식으로 합니다. 처가집 식구들과 함께 저녁에만 영업합니다.” 알고 보니 김학씨는 당지의 아릿다운 묘족처녀를 안해로 맞아들였다. 류방(刘芳)이라는 처녀를 사귀면서 부모님의 동의여부를 물었더니 “너와 살건데 왜 묻냐?”고 대답하더란다. 부지런한 안해는 낮에는 꽃가게를 경영하고 저녁에는 남편을 도와 양구이관에 나온다고 한다. 김학씨도 밤에는 양구이가게를 하고 낮에는 해남도 모 려행사의 장가계판사처를 경영한다. 팽이처럼 돌 것 같지만 그는 항상 쉽다고 말한다.  

“남편이 듬직해보이고 그 어떤 곤난도 이겨낼 것 같은 강직함이 마음에 들었어요.군대기질이랄가요?” 기실 류방은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김학씨가 다니던 려행사 한국부를 책임졌던 김학씨의 상사였다.

현재 10살에 나는 아들은 한족소학교를 다니면서 우리말과 글은 모르지만 자기는 조선족이라고 떳떳이 말한단다. 류방은 앞으로 기회가 되면 아들을 연변에 데리고 가서 조선어를 익히고싶다고 말했다.

“영업액을 보면 이전처럼 몇만원씩 올라가지 않지만 장사가 안정되여서 좋습니다. 개업 8년이 되니 단골도 많이 생기고 조미료도 당지 입맛에 맞아 갑니다.월량만으로부터 여기까지 따라온 당지 단골도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김학씨는 이때까지 장가계조선족사회의 일원으로 여러가지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힘자라는 대로 조선족사회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한다.

장가계조선족부모회의 벽에 적혀있는 <장가계송>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글을 마무리한다. “장가계가 살아나고/ 돈주머니 불룩불룩/ 우리 남녀 흘린 피땀/ 모든 사람 행복하고/ 눈물겹게 가난하던/ 이 고장이 이팔청춘/ 미소녀로 변신했네.”

글 사진 길림신문 김태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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