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닫기

[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11)-룡정 ‘3.13’ 반일운동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8-30 10:55:17 ] 클릭: [ ]

노호하는 3만 조선인 부패군벌과 맞서고

한족 반일군중들도 조선인들과 어깨 겯고 싸워

‘3.13’ 반일의사릉

반형이 소나무로 둘러싸여있는 ‘3.13’반일의사릉은 멀리에서도 유표하게 안겨온다. 하얀 비석이며 잘 정리되여 있는 묘소들을 가쯘하게 가공된 석재로 둘레를 쌓아올려 보기에도 정연했다. 앞줄에 모셔진 묘소가 9자리이고 뒤줄에 모셔진 묘소가 4자리였다.

기념석비 정면에는 한자로 ‘3.13반일의사릉’이라고 새겨져있고 뒤면에는 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1919년 3월 13일에 일어난 반일시위는 연변지구의 조선족인민군중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과 중국침략정책에 저항하여 일떠나 민족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벌린 군중성 혁명투쟁이다. 같은 달 17일, 룡정합성리공동묘지에서 순난렬사들을 안장하는 의식을 성대히 거행하였다. 그들로는 채창현(蔡昌铉 충렬대 지휘자), 공덕흡(孔德洽 출렬대 기수), 박문호(朴文镐), 김흥식(金兴植), 정시익(郑时益), 현봉률(玄凤律), 김승록(金承禄), 김태균(金泰均), 장학관(张学观), 김종묵(金钟默), 허준언(许俊彦), 김병영(金炳荣), 박상진(朴尚镇), 최익선(崔益善), 현상로(玄相鲁), 리유주(李裕周), 차정룡(车正龙), 원인선(元仁先), 리균섭(李均燮) 등이다.

 
1907년 이후의 반일의병들

룡정 ‘3.13’ 반일운동기념사업회 회장이며 룡정항일력사연구회 회장인 최근갑선생은 화강암으로 다듬어 만든 석비를 어루쓸면서 입을 열었다.

“수십차의 답사를 거쳐 합성리의 방청화(당시 81세)로인에게서 우연히 ‘만세묘지’가 있었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사람들을 묻은 묘소라는 것이였습니다.”

그 로인을 앞세우고 고증한 결과 바로 최근갑선생이 애써 찾던 묘소였다. 하여1990년 4월 10일에 확정하고 5월 19일에 연변 각지의 유지인사들이 모여 추모회를 열었다.

“당시 주당위 장진발 부서기가 힘 있는 말씀을 한마디 하셨는데 잊어지지 않습니다. 장진발 부서기는 ‘항일하다 사망된 사람은 민족을 불문하고 다 기념할 수 있다. 이는 력사유물주의에 부합된다.’고 지시했지요.”

이 자리에 안치된 렬사들은 모두 14명이였는데 후에 한분은 친척들의 요구에 따라 딴 곳으로 이장되고 지금은 13명, 5명은 그 때 당시 저마끔 안치했다고 한다. 3월 17일까지 5일장을 보았는데 4000여명 군중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였다고 한다.

“길손들이 다니면서 추모하라고 이곳에 모신 것 같습니다. 후에 추모하러 다니는 사람이 많았으나 일제가 공공연히 간섭하고 제지시키는 바람에 오는 사람이 뜸해졌지요. 렬사들은 70여년간 이 황페한 곳에서 쓸쓸히 지냈지요.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들이 묘소를 파헤쳐보니 관에다 안장한 것이 아니라 봇나무껍질에 감아서 모셨더군요.”

최근갑선생은 ‘3.13’ 반일운동은 물론 조선의 ‘3.13’ 반일봉기를 지지 성원하는 연변인민들의 대규모적 군중운동이였다고 지적하면서 당시의 정황을 떠올리였다.

제1차세계대전중인 1918년, 미국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각주의(民族自觉主义)에 자극받아 1919년, 손병희 등 33인이 민족자각주의의 사조에 따라 일본의 쇠사슬에서 벗어나고저 그해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시위운동을 일으켜 온 겨레가 민족해방을 위해서 일본관헌과 싸웠다. 물론 일본군대의 출동으로 탄압받게 된다. 그러나 이 운동에서 210개 지방의 1500여개 단체들이 일떠났는데 동원된 인원은 200여만명이였다. 사망자는 7500여명, 부상자는 만 6천여명, 체포된 사람은 4만 7천여명이였다.

연변에서도 ‘3.13’운동전부터 울라지보스또크와 니꼴리스크 등지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와 련계하여 운동준비를 공동으로 추진하고 있었다. 하여 김약연과 정재면을 연해주에 파견하고 강봉우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연해주에 파견된 김약연 등은 국내외 각지에서 파견된 민족운동자와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였다. 2월 18일과 20일에는 연길 장하리의 박동원의 집에서 구춘선, 김영학, 고평 등 연변의 주요한 반일지사 33인이 비밀리에 회합하여 반일운동방략을 결의하였다. 이와 같이 조직적인 준비를 하던중 3월 7일, 조선에서 ‘3.13’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연변에 전해졌다. 하여 반일운동자들은 다시 협의를 내오고 3월 13일, 룡정촌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조선독립선언서발표축하회’를 거행하기로 결정, 대회장에 김명학, 부회장에 배형식을 선출하고 준비에 서둘렀다.

“‘3.13’운동은 사실상 1905년부터 준비되였는데 특히 1909년 간도협약이 체결된 후 그 정서가 앙양되였지요. 각 학교에서는 반일교육과 민족교육을 진행하면서 인재를 양성했고 국민의회의 독립선언서가 나오는 즉시로 조선, 로씨야, 연변에서 함께 반일운동을 일으키기로 작심하고 있었는데 조선에서 먼저 터졌지요. 이에 연변의 학생들은 궐기해 일어나 동맹휴학을 하면서 싸움에 나서자고 웨쳤습니다. 10여년간 준비해온 화산이 단꺼번에 터진 것이지요.” 연변대학 박창욱교수의 말이다.

불필요한 희생을 줄이기 위하여 의사부에서는 3월 11일, 일본총령사관에 통지를 내여 일본령사관이나 일본인들을 해치지 않고 우리 끼리 시위를 한다는 내용을 전달하였으며 12일에는 길림성 성장과 북경 외교부에 전보로 소식을 알렸다. 또 연길도윤공서나 맹부덕퇀에서도 성에 “조선인들이 반일집회를 가지려고 하는데 어떻게 대처할 것이가?”하는 청시를 올렸다. 당시 길림성 성장의 태도는 이러했다. “좋은 말로 권해서 시위를 하지 말도록 하게 하라” 이 밖에 연길도윤서와 맹부덕부대는 각지에 명령을 내려 “상부지외에서 벌리는 조선인의 모든 반일활동에 대해서 우리는 방관한다. 상부지내로 들어오는 것을 견결히 막아야 한다”는 방침을 제정했다.

1920년대 룡정시 거리와 시장 

3월 13일의 폭풍

기원 1919년 3월 13일이 밝아왔다. 어제까지 만해도 아무 일 없던 하늘이 갑작스레 흐려지면서 모진 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굵은 모래알까지 날려보내는 광란의 궂은 날씨는 대체 무엇을 예고하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침부터 룡정으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흰 두루마기며 치마저고리를 입은 남정네들과 녀인들 지어 로인들과 삼척동자들도 합세하여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개산툰지방의 민중들은 자동의 정동학교 교원, 학생들과 함께 3월 12일 밤부터 주먹밥을 싸가지고 80여리 밤길을 걸어 명동학교에 도착하였으며 달라자의 민중들은 새벽에 떠나 명동학교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명동학교 학생들과 함께 나팔과 북을 울리면서 룡정을 향해 떠났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로투구, 명월구, 장인강, 투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민중들도 대렬을 지어 룡정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곳이 1919년 3월 13일, 반일집회가 열렸던 곳입니다.”

최근갑선생은 룡정시중심유치원마당에 들어서면서 한구석에 세워져있는 기념석비를 가리켰다. 커다란 자연석으로 된 석비 정면에는 한자로 ‘서전대야(瑞甸大野)’라고 새겨져있었다. 석비 뒤면에는 “1919년 3월 13일, 연변인민 3만여명이 이곳에서 회집(会集)하여 반일대회를 거행하였다. 1995년 4월 15일, 룡정 3.13기념사업회”라는 비문이 새겨져있었다.

“저기가 천주교회당이 있던 자리인데 교회당 종소리가 울리면 대회를 거행하기로 했지요. 룡정빈관으로부터 룡정중학교(대성중학교)까지 가로 뻗은 길, 길 남쪽은 치외법권내에 들어있는 상부지이고 치외법권내에 들지 않은 북쪽은 상부지외여서 대회를 상부지외에서 하기로 했지요.”

3월 13일의 반일집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일본총령사는 연길도윤에게 “만일 중국측에서 탄압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기의 군경을 동원하여 탄압하겠다.”고 통첩을 전했다. 이것을 알게 된 장작림은 일본의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발생될가봐 루차 길림독군과 성장에게 조선사람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강경한 조치를 취할 것을 지시하였다. 연길도윤은 맹부덕군에 지시하여 령사관을 보호하고 조선인들의 거사를 저지시키라고 하였다. 맹부덕은 13일 새벽부터 룡정거리에 보초를 세우고 순라대를 출동시켜 행인을 수색하였으며 룡정으로 들어가는 네갈래 통로를 전부 차단했다. 그러나 반일의 노한 물길을 막아낼 수 없었다. 군중들은 총칼의 협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룡정으로 모여들었다. 정오가 가까와오자 2만여명의 군중들이 집결했다. 그중에서 명동학교, 정동학교 교원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하는 320명의 ‘충렬대’가 조직되였다. 또 국자가 도립중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자위단원 1000여명, 훈춘과 안도지방에서 하루 앞당겨온 용사들도 있었다.

독립선언축하회는 원래 정오 12시에 룡정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시작하기로 되였으나 지방군경들이 교회당의 대문을 닫고 종을 치지 말라고 명령하였다. 그런데 당시 15살에 나는 림민호동지가 면바로 시위대오를 구경하느라고 교회당 꼭대기에 올라가 있었다. 림민호는 종옆에서 구경하고 있었다. 대회측에서 대회를 선포하자 밑에 있던 사람이 “얘, 빨리 그 종을 쳐라”고 웨쳐서 얼결에 종을 힘차게 쳤는데 그것이 바로 대회선포를 알리는 종소리로 되였다.

종소리와 함께 사방에서 온 민중들이 대회장에 모여들었는데 그 광경은 거세찬 폭풍우와도 같았다. 광야에서 열리는 집회였기에 군중들은 륜형을 짓고 그 중앙에 ‘정의인도’와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커다란 오장기를 세웠다. 대회 회장인 김영학이 대회를 사회했다. 그는 우선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으로 된 <독립선언포고문>과 <고약 3장>을 선독했다.

아(我)조선민족은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노라, 민족의 정의를 선언하노라. 민족의 인도를 선언하노라.

우리는 4천년 력사의 방국(邦国)이요 우리는 2천만 신성한 민족이였노라. 그런데 아 력사를 시멸(示灭)하고 아 민족을 타파하여 기반하에 신음케 하며 롱락중에 고통케 함이 어언 십개 성상을 개력(开力)하였도다.

자(兹)에 아의 수부되는 경서에서 독립기를 선거(先举)함이 사방이 파동하여 반도강산은 초목금수가 모두 향응하여 굉명(轰鸣)함일세. 우리 간도거류 80만 민족도 혈맥을 련속하며 성기(声气)를 상토하여 황천의 명소(明召)에 감열하여 인류의 계급에 동등하는 바이다.

1919년 3월 13일 간도거류민일동

<독립선언포고문>랑독이 끝나자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이어 류례균, 배형식, 황지영 3인의 독립주창연설이 계속되였다. 이에 군중들은 흐느껴 울면서 환성을 올렸다. 천지를 진감하는 만세소리에 일본령사관에서 관리하는 간도보통학교의 학생들까지 뛰쳐나와 시위행진에 합류하였다.

대회가 끝나자 군중들은 일본총령사관을 향해 시위행진을 벌리였다. 철혈광복단 성원들이 맨 앞장에 섰다. 기수 공덕흡이 ‘정의인도’라는 글자가 씌여진 오장기발을 높이 추켜들고 씨엉씨엉 걸었다. 그 뒤로 명동중학교의 대오가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기세 드높이 전진하였다. 군중들도 자발적으로 대오를 무어가지고 뒤를 따랐다.

이때 맹부덕은 일본총령사의 사촉하에 졸개들을 거느리고 시위대오가 경과할 상부지계선거리에 총칼을 꼬나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밀물처럼 밀려오는 군중시위대오를 막아선 맹부덕군대는 시위대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공덕흡의 기발을 빼앗았다. 이에격노한 공덕흡은 수차 격투 끝에 기발을 탈환하여 정성스레 두손으로 받쳐들고 무정한 탄환에 선혈이 랑자했지만 계속 전진했다. 격분한 군중들이 군경들을 향해 돌을 던지면서 방선을 돌파하려 할 때 반동군경들은 적수공권의 군중들을 향해 사격을 퍼부었다. 순식간에 수십명 군중들이 쓰러졌는데 공덕흡을 비롯한 10명이 당장에서 희생하고 40여명이 부상당했다. 제창병원에 호송되여 치료받던 도중 4명이 죽고(5명은 그 후에 사망) 300여명이 체포되였다.

대회조직자들은 즉시 시위대오를 해산시키고 구춘선 등 5명 대표를 연길도윤공서에 파견하여 중국군대가 시위군중을 사격한 사건에 대하여 엄정히 항의하면서 수난가족들을 무휼하며 일체 손실을 배상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그 후 3월 17일, 연변 각 계층 인사들은 ‘의사회’를 조직하고 4천명이 룡정에 모였다. 그들은 ‘조선독립순직자’라고 쓴 만장을 들고 희생된 14명의 령구를 메고 룡정 동남교외의 합성리 공동묘지에 가서 렬사들을 안장하고 ‘충렬자제공지묘’라고 새긴 비석을 세웠다.

 
1919년 3월 17일, 1500여명이 ‘3.13’반일시위에서 순직한 렬사 14명을 합성리묘지에 안장하고 추도식을 거행하는 장면

‘3.13’ 반일운동에 참가한 한족들

“한족들도 ‘3.13’반일운동에 참가했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말하면서 1919년 3월 13일의 정경을 설명했다.

앞장에 선 충혈대에는 동산소학교(한족학교)의 조선인 학생과 한족 학생들이 끼여들어 용감하게 전진했다. 조선인 학생과 한족 학생들은 어깨 겯고 구령을 부르면서 나가는데 그 기세가 당당하고 름름했다. 군경들이 막아서자 한족 학생들이 새된 한족말로 질책했다.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 나라를 침략한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편에 서는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량심이 있는가!”

“우리와 한편이 되여 나쁜 일본놈을 쳐야지 않는가. 총부리를 돌려라!”

한족학생들의 박력 있는 질책에 군경들은 학생들의 가슴을 겨누었던 총을 내리면서 기를 죽이였다.

길회철도부설반대운동을 선도했던 관준언도 ‘3.13’반일운동을 지지했댔는데 그는 연길 북산학교에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보호하기도 했다.

화룡현 소동구에 사는 안시영은 조선인 뿐만 아니라 한족 군중들과도 단결하고 그들에게 반일사상을 선전하여 그들을 반일운동에 궐기시켰다. 평시에 일제와 경찰들의 피해를 많이 받아온 마을의 한족 조옥재, 조옥귀, 조옥부 등 3형제는 일제와 경찰들을 극도로 미워하고 민중들을 동정한 정의감이 넘치는 지주였다. 그들은 안시영의 반일사상을 받아들인 후 그의 령솔하에 반일활동에 적극 참가했다.

‘3.13’의 연장으로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련달아 일어났다. 1919년 3월 16일, 투도구에서 1000명 반일집회가 있었고 이튿날인 17일에 이도구에서 4000명 집회가 있었댔는데 조옥재는 소동구부근의 한족들을 이끌어 이 집회에 참가하게 했는데 무려 한족 100여명이 반일집회에 참가했다. 3월 20일, 안시영 등의 주도하에 전개된 룡두산 500명 반일집회에도 조옥재를 위수로 한 한족 민중들이 조선인 민중들과 함께 적극 참가했다.

조옥재 등은 반일무장단체를 성원하여 군수물자를 운송해주었고 또 반일무장집단을 위하여 주동적으로 군수물과 군자금을 헌납하기도 했다. 1920년9월, 국민회군이 이도구일대로 전이하여왔을 때 조옥재를 비롯한 한족들은 옥수수가루 200여근, 울로초신 100컬레, 무우 두마대, 조옥재네 집에서 자래운 200여근짜리 돼지 한마리, 현금 75원을 안시영이 준비해놓은 군수물자와 함께 마차로 국민회군에 수송해주었다.

청산리전투 때에도 조옥재는 마차로 부상자를 양개골에 세운 병원에 실어오기도 했다. 1924년 11월, 국민회군이 북만으로 철회하기 위하여 과동준비가 한창일 때 소동구의 조옥재 등은 또 군수품을 직접 자기 마차에 실어 이도구에 운송하였는데 운송한 물품으로는 겨울복 240벌, 버선 150컬레, 토시 100개, 피나무초신 250컬레, 초신 250컬레, 현금 250원이였다. 국민회군의 안무장군이 일본경찰에게 참살된 후 유해를 룡정 동산에 안치하였다. 수많은 반일청년들이 안무장군의 묘소에 와서 참배하자 일본경찰들은일이 뒤틀릴 것 같아 묘소를 옮기려고 했다. 이 때 조옥재가 나서서 집접 마차로 유해를 소동구의 내풍동에 실어왔다.

‘3.13’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3.13’은 조선인들의 반일투쟁을 힘 있게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족들을 반일에로 궐기시켰다.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려면 여러 민족이 통일전선을 이루어야 하며 반드시 무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경험과 교훈을 얻게 되였다. ‘3.13’반일운동은 연변의 반일운동을 반일무장투쟁으로 전환시켰다.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0

관련기사 :
 
연변부동산
21세기중국정보사이트-백두넷
한길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