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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지금21]고향땅에서 살고 있는 지금이 좋아요

편집/기자: [ 차영국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8-29 13:01:48 ] 클릭: [ ]

개혁개방 40주년 기념 특별기획―‘ 고향은 지금[구태편홍광촌 

-그제날의 '어미지향','대학생촌' 홍광촌에 가보니 220호 주민 고층아빠트단지로 입주

얼마전에 기자는 장춘시 구태구 룡가가두 홍광촌(이전 주소: 구태시 음마하진 홍광촌) 당지부 서기 조운희로부터 홍광촌 주민 220여호가 고층아빠트단지로 이주했다는 희소식을 접했다.  

원 음마하진에 있던 구태 제14중학교 옛터를 중심으로 해 지은 주민 고층아빠트단지,  그 옛날 아빠트생활을 그토록 부러워하고 바라던 홍광촌 사람들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유난히 더위로 몸살을 앓던 여름의 끝자락인 87, 이날은 립추였다.

이날 기자는 설레이는 마음을 안고 아침부터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장춘 조선족 단체의 부분적 방문객들과 함께 홍광촌을 찾았다.

우리동네가 근년간에는 외부와 너무 단절되였던 것 같습니다. 길림신문 기자들을 초청해 우리 동네 홍보도 할겸 장춘 조선족사회와의 우호래왕을 강화하고저 여러분들을 자리에 모시게 되였습니다. 향후 홍광촌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시고 자주 행차해주십시요.” 

마을의 발전을 념두에 두고 하는 조운희의인사말이였다.

이날 조운희 서기와 로인협회 차영갑 회장은 래빈들에게 촌사무실 건물과 로인협회 활동실, 양로원을 참관시키고 음마하 홍광촌의 력사와 현황에 대해 소개했.

옛날엔 논판에도 고기떼가 득실거렸어요. 붕어며 메기며를 손으로 휘여잡는데 잠간새에 세수대야에 차고 그릇이 모자라 바게쯔까지 가져다 댔지요.

음마하에 가면밥을 배불리 먹을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대약진 때 기아에 허덕이던 우리집 일가족은 심양 소가툰에서 음마하로 이사왔지요.”

음마하 홍광촌 조선족로인협회 차영갑 회장의 구수한 추억담이다.

하천에는 물고기떼가 득실거리고, 벼농사는 흉년을 몰랐던 음마하벌,‘어미지향'이라는 호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

음마하는 대학생들이 많이 나오는 조선족마을로 린근에 소문이 자자했었다.

여름방학마다 륙속 날아드는 대학입학통지서들이 풍경을 이루었죠., 뉘집 학생이 어느 대학에 붙었다는둥 삽시간에 마을로 퍼지는 희소식과일처럼 기뻐하는 동네사람들이였지요. 북경대학, 청화대학생도 여럿이 나왔으니 개천에 룡났지말입니다.”

원 음마하조선족학교 교장 리수남이 미소를 지으면서 추억거리를 한가득 들추어낸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음마하에 조선족들이 거주했는고 알아보니, 조선족들이 정착한 시기는 해방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49 3월, 조선 평안남도 출신 농민 리영조의 인솔하에 60 조선족들이 철남 허허벌펀에 논을 개간할 타산으로 음마하로 이주했다.

한족주민들의 우사간, 석마간, 사랑방에 가마를 걸고 곁방살이로 발을 붙이고 개간과 집터 닦기 흑벽돌 만들기 집재목 다듬기를 병행하며 피땀을 흘렸다.

결과 당해 6, 90헥타르의 논개간을 마치고 벼농사까지 차질없이 지었으며 60채의 민가도 전부 짓고  60호 주민들이 전부 새집들이를 하게 되였다. 마을이름은홍광촌'이라 지었으며 리영조를 1 촌장으로 추대했다.

홍광촌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변하기도 했다. 1954년에 홍광촌은음마하집체농장'이란 이름을 내걸었다가 1956년에 정세에 맞추어 음마하고급농업생산합작사'로 바꾸기도 했다.

리영조의 인솔하에 음마하벌에서는 과학영농으로 높은 수확고를 따내 길림성 나아가서 전국, 국외에까지 소문이 났다. 구쏘련, 일본, 조선, 볼가리아 여러 나라의 농업고찰단이 음마하로 고찰방문을 다녀갔었다.

1954년부터 리영조 본인은 길림성인대 대표, 길림성 당대표, 길림성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으로 당선되여 모택동, 주은래, 등소평 국가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음마하농업생산합작사가 설립된 이듬해에 조선족농민들의 수입도 크게 올라갔고 선후로 음마하조선족소학교, 유치원, 도서실이 들어섰으며 구락부까지 지어놓고 문예공연을 조직하였다.  민족교육, 문화생활의 기반이 잡이게 된 것이다.

그후 소문에 소문을 타고 음마하에 조선족들이 꾸역꾸역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홍광촌은 7 소대를 편성하면서 수백호 인가의 조선족마을로 자리잡게 되였다.

음마하조선족학교는 초중까지 있었는데 장춘시조선족중학교 상급학교로 진학한 학생들의 학업수준은 어디서나 인정을 받았다. 한편 전통항목인 축구, 배구에서 실력이 뛰여나 남자축구와 여자배구는 구태현과 장춘시, 전국시합에까지 출전했던 경력이 있으며 스포츠 장끼로 밥그릇을 챙긴이들도 꽤나 된다.

매년 지역의 민족운동회때마다 축구종목과 배구종목의 결승전은 음마하팀이 빠지면 서운할 정도로 체육경기에서도 최강을 다투며 자존심싸움을 했었다.

어미지향, 대학생동네, 축구, 배구로 유명세를 떨친 동네, 이젠 모두다 옛말이 되였음에도 음마하사람들의 추억속에는 이것이 영원한 화제거리, 자랑거리로 되였다.

홍광촌의 현황에 조운희서기는 비록 지금의 홍광촌도 여느 조선족마을과 마찬가지로약자만 남은 동네가 되였지만 홍광촌사람들은 전체 동네가 모두 아빠트에 입주해 농촌에서 아빠트생활을 누리게 되였다고 자랑스레 소개했다.

하는 없이 굳이 물가가 높은 장춘같은 대도시로 가서 필요가 없어요. 여기서도 아빠트생활을 하는데말입니다. 공기좋고 인심좋은 내 정든 고향땅에서 살고 있는 지금이 좋아요.” 이날 주방에서 일하던 동네아주머니가 여러 사람들의 말에 참견, 자기의 기쁜 심정을 털어놓았다.

/차영국 기자

 
강희황제가 타고가던 말에 물을 먹였다하여 지은 이름--음마하.
 
 
음마하 관개수로인 대간선의 원천은 석두구문(石头口门)저수지다.
 
 
8월의 음마하 벌판.
 
 
벌판너머 보이는 고층아빠트단지.
 
 
아빠트단지의 이름은 림강홍광신촌.
 
 
홍광촌 도로 표시판.
 
 
홍광촌 촌사무실 소재지.
 
 
홍광촌의 건신기재들과 문구장.
 
 
양로원이 촌사무실건물과 마주하고 있다.
 
 
홍광촌 당지부 서기 조운희.
 
 
로인협회 차영갑(중간)회장과 리수남(좌)교장.
 
 
조운희서기가 래빈들에게 양로원을 소개하는 장면.
 
 
촌민위원회 건물 2층 다공능실.
 
 
소박한 무공해밥상으로 손님대접.
 
 
복철 손님대접에 빠질수 없는 보신탕이 가마에서 끓고 있다.
 
 
일손이 바쁜 주방의 어머님들.
 
 
음마하기차역은 철거되여 물탑만 덩그러니 남아.
 
 
홍광촌구락부는 페건물로 처량하다.
 
 
철북 조선족동네 옛모습은 흔적없이 사라져.
 
 
학생 래원 고갈로 유치원은 금년에 페원되였다.
 
 
음마하학교 옛터엔 목업회사가 들어섰다.
 
 
음마하 맥주공장은 문공장으로 변하고.
 
 
룡가포로 합병되면서 음마하진은 음마하사구위원회로.
 
 
철남과 철북을 있는 통로.
 
 
원 공소합작사 옛건물.
 
 
음마하 중심거리.
 
 
원 우정국 건물.
 
 
음마하 병원.
 
 
농업은행은 수십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어.
 
 
음마하 장터.
 
 
 
음마하에서 잡은 조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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