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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련재]중국조선족력사(4)―벼꽃향기

편집/기자: [ 최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8-07-10 15:32:18 ] 클릭: [ ]

거치른 벌판에 벼꽃향기 싱그럽고

조선족 농민들‘어곡전’까지 다뤄

‘어곡전’천평 강덕황제에게 바쳐

첫 수리공사

“연변의 벼농사는 우리 조선족에 의해 시작되였습니다. 력사적으로 보면 고구려나 발해시기에 이곳의 벼농사는 이미 시작되였습니다. 〈로송의 벼가 좋다〉는 이야기는 발해시기의 이야기입니다. ‘로송’이란 지금의 개산툰진 광개 일대를 말합니다. 발해가 926년에 멸망한 후 동북의 벼농사는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연변대학 력사학 박창욱교수는 자그마한 연변지도를 펼쳐보이면서 두만강기슭을 가리킨다. 보풀이 일 정도로 낡은 지도는 1920년대초 일제가 만든 지도라고 한다.

<연변에서의 초기논개발>이라는 글에서도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밭을 돌보는 조선인 간민

“ 《만주경제 연구보》에 의하면 1868년 좌우 두만강연안에서 제일 처음 논농사를 지었다고 하였고 또 전하는 데 의하면 1895년 두만강연안의 종성위자에서 논농사가 시작되였다고도 한다.”

봉금제도가 엄했던 그 시기 범월잠입한 조선족농민들은 청나라 관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두만강 북안의 산골짜기의 자연수를 리용하여 처음에는 아마 뙈기논을 부쳤을 것이다. 그후 1900년 해란강연안의 세전벌인 동성용에서 논경작이 시작되였다. 1906년 룡정에서 회령으로 가는 연도인 대교동에서 논을 개발하였다. 이로부터 벼농사는 연변 각지에 파급되였다.

버드나무가 제법 파랗게 물이 오르고 종다리가 하늘 높이 떠서 지종대던 1906년 6월, 한무리의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곡괭이가 자갈에 부딪치면 불꽃이 튕기는 강바닥을 파헤치느라 비지땀을 쏟는다. 1,308메터의 물도랑을 빼느라고 떨쳐나선 대교동의 조선주민 14명이였다. 이들은 륙도하물을 끌어들여 33헥타르의 논을 풀었다. 이것은 연변에서의 최초의 수리공사이다.

박창욱선생은 낡은 지도 우에 확대경을 대고 끝내 대교동을 찾아낸 후 감개무량하게 말한다.

“그 뒤를 이어 룡정의 수남촌, 반석촌, 화룡현의 수신향(두도구일대), 평강 등지의 조선이주민들도 해란강물을 끌어들여 논농사를 짓기 시작했지요.”

강이 많은 연변은 논농사를 하기가 제격이다. 두만강 북쪽기슭과 해란강기슭의 평강벌, 서전벌 및 부르하통하, 가야하 하류의 넓은 들, 훈춘하 연안과 밀강류역이 바야흐로 논벌로 변했다. 조선족 개간민들이 무상기가 짧고 기온이 낮은 동북의 불리한 기후조건을 이겨내고 벼농사에 성공한 것은 연변농업에서의 일대 비약이였다. 이로부터 밭농사만 짓고 남방에서 입쌀을 날라다 먹던 력사를 종말짓게 되였던 것이다.

대지에 풍기는 벼꽃향기

쪽박 차고 괴나리보짐을 등에 지고 처음 왔을 때 조선족 농민들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치른 벌판 뿐이였다. 깊이 잠든 산기슭과 들판으로 야수들이 들락거렸으며 찢어진 옷자락으로는 살을 에이는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하얀 복장에 하얗게 회칠한 집에서 살면서 하얀 이밥을 먹는 민족이 조선족이다. 그래서 백의민족이라 했던가.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민족이라 했던가. 아무튼 벼지푸라기 하나 없던 이 땅에 논이 펼쳐졌고 밥상 우에 이밥그릇이 놓이게 되였다. 고난에 허덕이던 민족에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어데 있겠는가.

조선족 농민들의 벼농사에 대해 연변력사연구소 전임 소장 권립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1918년에 이르러 연변의 벼가 대외로 수출되게 되였지요. 이는 대단한 일입니다. 력사적으로 벼를 수입해오던 연변에서 벼를 수출하는 정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 변화가 관청을 놀래웠지요. 이리하여 1919년 4월에 연길현공서는 〈연길현벼농사잠행규정〉을 내놓았지요.”

벼농사를 하려면 수리건설을 해야 하고 수리건설을 하려면 밭을 점하는 문제가 존재했다. 그 밖에 땅세 등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행규정은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어떤 사람이든지 벼농사를 하는 농민의 정당한 리익을 침범하지 못한다. 그렇지 못할 경우 그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

규정은 당시 우리 조선족 농민들의 합법적리익을 보호하는 데 매우 유리했다.

1921년 12월 3일, 길림성 성장 홍렬신이 연길현공서에 〈논농사를 잘하여 농사를 진흥시키라〉 는 훈령을 내리기까지 했다. 20세기 20년대에 이르러 적지 않은 한족들도 벼농사대오에 가입하였다.

<연변에서의 초기논개발> 일문에서 20세기초 연변 조선족 농민들이 온갖 곤난을 극복하면서 논을 개발한 면적을 년대별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1906년 12.6정보

1912년 185.0정보

1917년 764.0정보

1918년 1,458,0정보

1919년 3,608.7정보

1922년 6,605.8정보

그 후 논농사는 멀리 길림, 장춘에까지 파급되였고 나아가서 흑룡강성의 동경성, 목릉, 밀산, 녕안, 해림 지어 동부 몽골지구에까지 파급되였다.

논농사를 하고 있는 1920년대 북간도 조선인

<내몽골의 논개발(리성도 손만수)> 일문에서 내몽골에서의 조선족농민들의 논개발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1917년 람루한 홑저고리를 걸친 한패거리의 조선족 농민들이 백설로 뒤덮인 저리무맹대초원의 바얀탈르에 왔다. 이들 15호 74명은 김일선의 인솔하에 매서운 찬바람 속에서 물길을 째고 천년 묵은 초원을 논으로 개간하였다. 수개월동안 악전고투하여 이듬해 봄에 50여헥타르의 논을 개발하고 ‘공제호농장’을 설립하였다. 같은 해에 여태규가 거느린 16호의 69명 조선족 농민들이 락봉보에서 50여헥타르의 논을 개발하고 ‘대전농장’을 설립하였다. 이듬해 4월, 김지휘 등 2호의 14명이 청하 하류에서 동서 150리, 남북 30여리의 평탄하고 비옥한 땅을 발견하고 논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조선족 농민들은 동북의 논농사를 위해 마멸할 수 없는 공헌을 했다.

‘어곡전’

화룡현 동성향 비암촌과 룡정시 개산툰진 광종촌 하천평에 위만주국괴뢰황제 강덕의 ‘어곡전’이 있었다. 이 글에서는 광종촌의 ‘어곡전’을 말하려 한다.

1917년 2월 18일, 조선 충청북도 청주군에서 태여난 최학출이 광종촌의 ‘어곡전’ 을 다루었다.

원 룡정시문련 주석이였던 저명한 민간문학가 김재권선생은 최학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최학출은 1935년에 하천평에 이사 와서 지주의 땅을 부치였는데 1941년 봄에 소출을 높이려고 간이창문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해빛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었습니다. 하여 남들보다 한절기 앞서 벼모를 한데서 소출도 많이 났거니와 입쌀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아 천하진미로 평가되였지요.”

그 후 최학출의 온상육모법이 광범하게 보급되였다. 하여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장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고 강덕황제의 ‘어곡전’을 다룰 사명까지 지니게 되였다. 최학출은 1943년 봄에는 ‘농업사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에 가서 온상육모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 해부터 ‘어곡전’을 다루게 되였다.

1920년대 벼가을하고 있는 조선인 이주민

농민시인 심정호선생은 <강덕황제의 어곡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일매지게 자라서 일매지게 머리를 수그리고 일매지게 설레이며 사근대는 이삭들의 소리가 마음에 감미롭다. 논두렁을 밟으며 벼들의 속삭임을 듣노라니 ‘어곡전’을 다루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른다.

‘어곡전’ 으로 짐승들이 나들지 말라고 뼁끼칠을 한 울바자를 둘렀다. 모철이면 하얀 버선을 신은 꽃 같은 처녀들이 유리판처럼 써레질을 해놓은 논판에 들어서서 물차는 제비처럼 찰랑찰랑 모를 심는다. 가을도 가관이다. 새하얀 수갑을 낀 손들이 사락사락 한포기 한포기씩 벼를 베여 정성 들여 묶은 다음 마당에 곱게곱게 낟가리를 앉힌다. 탈곡하면 앞목으로 마대에 넣었다가 쌀을 찧어낸다. 쌀은 마을의 고운 아가씨들이 모여들어 뉘와 귀떨어진 쌀알들을 골라내고 눈귀도 상하지 않은 통통한 쌀만 모아서 눈덩이같이 하얀 옥약목주머니에 넣어 절복한다. 그것도 검사에 통과되여야 강덕황제의 어곡합격증을 받는다.”

최학출이 다룬 ‘어곡전’ 면적은 천평이였는데 봄에 논갈이 할 때만 소의 힘을 빌고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고 한다. 논에 일하러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고 버선을 신어야 했으며 거름은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벼가을과 탈곡을 할 때면 해당 관원들의 감시하에 했고 정미한 입쌀을 처녀들이 유리판 우에 올려놓고 한알씩 골랐다고 한다. 색갈과 빛이 다르거나 쌀알의 귀가 떨어져도 안되였다고 한다.

어곡을 생산할 정도로 조선족 농민들의 벼농사가 소문이 났으니 실로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쌀을 짓는 농민도 허리띠를 졸여야 하는 세월에 어곡을 다듬어 강덕황제에게 바친다는 것은 농민들로 놓고 말하면 참으로 억울하기 그지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 연변일보 김철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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