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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상기15]일본인들이 보내준 믿음을 두고

편집/기자: [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7-12-18 09:44:45 ] 클릭: [ ]
남편류학시절의 경제담보인이였던 노토 아키히로(能登昭博)씨는 대학교 졸업론문을 <진영귀와 대채정신>이라는 테마로 썼을 정도로 중국에 관심이 많은 분이다.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치바(千葉)동부지역의 판촉업무를 총괄하는 회사경영인이였던 그는 내가 일본에 온 이듬해에 새로운 사업으로 지역신문인 《호오지로》(ほおじろ)를 창간하게 되였다.

일본에 온 지 1년이 좀 넘어서부터 재택근무형식으로 코리안번역을 했던 나는 일본어로 된 여러가지 자료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거나 기계로 번역된 한국어자료를 정확하게 수정하는 등 작업을 하면서 점차 문자를 다루는 일을 해보고 싶은 욕망을 갖게 되였다.

《호오지로》 창간 2주년을 맞는 해에 나는 리력서와 함께 중국에서 썼던 기자증을 가지고 노토 사장을 찾아갔다. 편집부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어이 없는 청을 들 줄을 몰랐던 노토 사장은 놀라운 기색을 지으면서도 내가 내놓은 기자증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한번 부딪쳐 보려는 생각 뿐이였지만 가능한 정도의 자기 어필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디서 생긴 자신감이였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부끄러울 정도의 오만이였던 것 같다.

3일 후 편집부의 에이코(栄子) 부장이 전화로 결과를 알려주었다. 앞으로 중국, 한국에 관한 코너가 필요하다는 미약한 비중의 리유, 그리고 중국기자의 감각을 믿어보자는 사장의 제의로 채용이 결정되였다는 것이였다.

‘일본인들은 의외로 너무 단순하구나. 기자증 하나로 나를 믿다니…그것도 연변에서 온 나를…’

당시의 솔직한 내 심정이였다.

중국에서 발급된 기자증이 그렇게 나에게 행운을 갖다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10여년을 편집부에서 일하면서 내가 해놓은 일중에 제일 큰 일이 《호오지로》 창간 10주년맞이 이벤트 행사였다.

10주년을 이색적인 이벤트로 기념하고자 하는 회사 방침하에 여러가지 방안이 나왔다. 그중에서 “오페라와 첼로의 아름다운 만남”이라는 나의 제안이 채택되였고 일본의 첼로연주단과 중국오페라가수와의 만남을 만들기로 결정되였다.

오페라가수 최선자씨의 공연무대

우선 전문가들의 엄격한 심사를 거쳐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오페라성악전공 예술전문사 과정을 마친 중국서남민족대학 예술학원 최선자교수가 선정되였다. 이왕이면 고향출신의 가수를 모시고 싶었던 나의 바람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두달 후 콘서트 일정이 결정되고 프로그람이 결정되였다. 남은 시간은 8개월 뿐이였다.

일을 추진하는중에 나는 홀시해 버린 중요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였다. 최선자씨의 비자문제였다. 요즘과는 달리 그 당시는 일본행 비자수속이 너무 엄격했다.

일본인들은 비자에 대한 감각이 희미하다. 대부분 국가와 지역에 무비자출입국이 가능하기 때문에 거기에 대한 상식이 결핍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긴급회의가 열렸고 내가 비자신청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했다. “비자가 나올 지는 그때 가봐야만 압니다. 불안한 점이 많습니다.”

8개월 동안 준비하고 추진하는 일이 마지막에 가수의 비자문제 때문에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비교적 엄중하게 설명을 했던 기억이 난다. 솔직히 그런 큰 일을 벌린 것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

역시 감각상의 다른 점이라 할가 “정당한 리유가 있다면 비자가 내려 오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라는 결론이 나왔고 비자문제는 무조건 나에게 맡긴다는 아무 근거없는 믿음이 나의 어깨를 짓눌렀다.

결국 신문에 광고까지 나가게 되였고 3개월전부터 콘서트 입장권판매가 시작되였다.

지금도 그 때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극장에 손님들이 가득 찼는데 가수가 등장하지 않는 해프닝을 몇번이고 꿈 속에서 겪었다. 두번 다시 이런 “도깨비짓”을 벌이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던 기억도 난다.

작년에 두번째로 만난 앞줄 왼쪽으로부터 에이코부장, 최선자, 노토사장 및 뒤줄 왼쪽으로부터 다카기 프로듀서와 필자 

모든 가능성을 동원하고 세심한 준비를 서둘렀다. 서남민족대학 여러 교수들의 노력과 회사의 적극적인 배합, 무엇보다도 나에 대한 믿음이 큰 힘이 되였던것 같다.

콘서트를 앞둔 일주일전에 비자가 무사히 나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했던 최선자씨가 콘서트를 사흘 앞두고 일본에 도착했고 그동안 전화로, SNS로 교류를 해왔던 예술가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였다. 예술에 국경과 언어가 필요 없다는 점을 확인하는 며칠간이였다.

2007년 8월 26일, “오페라와 첼로의 아름다운 만남”이 성공리에 막을 올렸고 클래식음악에 대한 일본인들의 수준 높은 감상력에 만족을 주는 최선자씨의 아리아가 극장에 울려퍼졌다.

대성공이였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중의 <사랑의 신이여>, 푸치니의 <투란도트>중의 <시뇨레, 들어주오!>, 푸치니의 <나비부인>중의 <어느 개인 날> 등 십여곡을 부르는 최선자씨가 너무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순간이였다.

10년이 지난 오늘도 그날의 그 감격을 되새기면 또다시 온몸에 전률을 느끼게 된다. 근심과 걱정에 잠을 설쳤던 8개월간에 내가 받았던 무조건적인 믿음, 근거 없는 믿음, 위험했던 믿음, 비중이 컸던 믿음에 보답을 하는 눈물겨운 순간이기도 했다. 일본에서 살면서 때로는 사람들 사이의 진지한 믿음이 운을 불러온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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