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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강성 마지막 위안부 리수단(95세) 할머니 별세

편집/기자: [ 김영자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6-05-25 18:43:35 ] 클릭: [ ]

한국 박근혜 대통령 화환 보내와

20일 흑룡강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위안부 출신 조선족 리수단 할머니가 5월 17일 오후 3시께 흑룡강성 동녕현 양로원에서 95세를 일기로 지병으로 별세했다. 리수단 할머니는 흑룡강성에 남은 마지막 한명의 위안부였다.

2007년 할빈시 조선족 예술관으로부터 고운 한복 한 벌을 선물받고“죽을 때 이 한복을 입혀 보내달라”당부하던 리수단할머니.

리수단할머니의 별세 소식을 접한 한국 박근혜 대통령, 황교안 국무총리,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화환을 보내 조의를 표했고 주심양 한국 총영사관 관계자들과 부분 국회의원들이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한 위안부의 비참한 인생

할머니는 19세 때 고향인 평양 부근의 한 농촌에서 “중국 할빈에서 로동자를 모집한다”는 말을 믿고 만주로 왔다가 유괴됐다. 로씨야와 린접한 국경도시인 동녕으로 끌려와 악명이 자자한 동녕요새 부근 위안소에서 일본군의 성욕을 채우는 “성노예”로 혹사당하며 비참한 인생을 맞았다.

일제가 패망후, 할머니는 중국에 남아 중국 국적을 얻고 위안부의 굴레에서 벗어나 결혼했으나 자식을 얻지 못했다. 그 뒤 할머니는 동녕현도하진 경로원, 동녕현 사회경로원에서 로후를 보냈다.

평양부근의 농촌에서 살았던 할머니는  16세 때 결혼하여 딸 하나를 보았었다. 얼마 안돼  남편과 딸을 전후로 병으로 잃었다. 의지가지 할 곳이 없어 친정으로 갔지만 그때 아버지가 첩을 들였기에 리수단모녀는 찬밥신세가 되다나니 생활이 아주 어려웠다. 얼마 안가 어머니가 병에 걸렸는데 치료비가 필요했다. 바로 이때 녀종업원을 모집하는 사람이 찾아오자 리수단은 귀가 솔깃해 따라나섰다고 한다.

헌데 그녀가 간 곳이 할빈 아성구에 있는 일본군이 꾸리는 위안소였을 줄이야. 함께 끌려간 녀성은 7,8명 되였고 제일 어린 처녀는 13세밖에 안되는 애숭이였다. 대부분 시집도 안 간 숫처녀들인지라 함정임을 알고 순결을 지키느라 결사적으로 도망쳤다.하지만 모두 얼마 안돼 다시 잡혀와 죽도록 매를 맞았다. 놈들은 “누구든 도망칠 생각 아예 말라!”고 윽박질렀다. 리수단은 21세 때 다시 동녕 석문자의 위안소로 옮겨져갔다고 한다.

당시 동녕현에 13만명의 일본 관동군이 주둔하고 있어 동녕현이 위안부가 가장 많이 모인 지역중의 한 곳이였다.

리수단은  위안소에서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으면서 연명했고 또 함께 간 위안부들이 잇달아 병과 폭행에 시달려 죽는것을 보며 가슴을 뜯고 뜯었다.

평생 안고 살았던 무거운 멍에

일본이 패망할 당시 사변이 일어나면서 혼란한 틈을 타서 할머니는 다른 위안부들과 함께 도망을 쳤다. 이로써 할머니는 어두운 과거를 종말짓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을줄 알았다. 그러나 한번 짓밟힌 그녀에게 진정한 해방은 찾아오지 않았다.

할머니는 한족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으나 자식을 낳지 못했다. 남편은 그가 위안부 출신인 것이 마음에 꺼려 늘쌍 기시하고 모욕하고 때렸다. 할머니 또한 모든 것을 참고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안부 출신인 자신의 불결함에 대한 비관, 고통스러운 혼인생활... 할머니는 인생에 대한 환명을 느꼈다. 여러번 독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지만 끈질긴 목숨이 차마 떨어지지 않았다.

80년대 초, 현지 정부는 그녀를 가정폭력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양로원에 보냈다. 할머니는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할 때마다 강변으로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강을향해 중얼중얼 무엇이라 말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하면서 스트레스를 풀었다.

할머니는 말년에 인형아기를 끔찍히 좋아하셨는데 그중의 두 아기에게 '량량(亮亮)'과 '뉴뉴(妞妞)'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매일 안고 계셨다.

할머니의 양아들 고지상씨는 “어머니께서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을 큰 유감으로 생각했으며 년세가 많아질 수록 아이를 더 좋아하셨다.”고 밝혔다.

생전 유언: “한복 입혀 보내다오”

할머니는 생전에 조선말을 다 잊어버렸고 매운 음식도 드시지 못했다. 그러나 민족에 대한 정체성만은 확고했다.

지난 2007년 할빈시조선족예술관에서 할머니를 모셔와 고운 한복 한 벌을 선물하자 할머니는 그만 감격이 북받쳐 올라 눈문을 비오듯 흘렸다. 할머니는 “이것이 해방 후 처음으로 입어보는 한복”이라고 하시면서 “죽을 때 이 한복을 입혀 보내달라”고 신신 당부했다.

그리고 예술관의 민속박물관을 구경하면서 고향에 있을 때의 일부분 기억을 되찾고 얼굴에 미소를 짓기도 했었다. 할머니는 조선말을 잊어버린것이 너무 한스럽다고 얘기하셨고 뜻은 몰랐지만 간단한 조선말 글자를 뜯어읽을 수 있었다.

지난 세기 60년대에 평양에 있는 남동생이 편지를 보내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했고 그 후 한국의 여러 단체들도 한국으로 모셔가려 했지만 할머니는 거절했다.

“고향에 돌아가봐도 친인들은 별로 없고 이복 남동생이 있을뿐이다. 나 또한 깨끗하지 못한 몸이라 고향에 돌아갈 면목이 없다. 너무 오래동안 우리 민족과 래왕하지 않아서 조선말을 몽땅 잊어버렸기에 조선이나 한국에 가도 의사교류에 어려움이 많다. 여기 주위에서 모두 나를 좋은 사람이라고 잘 대해주니까 죽을 때까지 여기 있는것이 더 편할것 같다.”

이렇게 할머니는 동녕에서 현지 정부와 양아들 고지상씨의 보살핌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계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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