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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6]연변축구의 발전력사와 함께 숨쉬여온 45년세월

편집/기자: [ 김룡 안상근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24 11:29:38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돐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16)
 
-연변축구팀 전임 감독 리호은을 만나
 
 
 
연변축구력사에 대해 말할때 리호은감독을 빼놓을수없다. 리호은은 연변축구가 직업화의 길로 들어선후 연변팀의 감독을 가장 오랜 시간동안 맡았던 감독이다. 특히 리호은 감독은 지난 1993년도 전국제7기운동회때부터 길림팀을 이끌고 전면공격, 전면방어의 《전공전수》(全攻全守)축구의 새로운 바람을 중국축구무대에 불러일으켜 크게 소문났다.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지난 7월22일, 연길시의 한 다방에서 리호은감독을 만나 인터뷰했다. 리호은감독은 올해 60세, 돌이켜보면 15살나던해인 1970년도에 연길현소년축구팀에 뽑힌후로 지금까지 장장 40여년을 축구 외길인생만을 고집스레 달려온 열혈 축구인이였다.
 
연길현 조양천철로소학교때부터 축구에 남다른 자질을 보인 리호은은 당시 축구교원이였던 김동혁선생님으로부터 판단력이 좋고 반응이 빠르며 점프력이 좋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1970년 15살나던해에 연길현소년축구팀에 뽑히게 된다. 연길현소년축구팀에가입한 당해부터 리호은은 팀의 주력키퍼로 맹활약을 펼치게 되는데 그해 전주소년축구대회에서 연길현소년축구팀이 우승을 따내는데 든든한 수문장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1992년 연변삼성팀 리호은감독(뒤줄 오른쪽 첫번째).
 
그무렵 길림성3팀의 코치로 있던 박만복, 동경춘 등이 룡정에 와서 선수를 물색하던차  리호은의 경기모습을 지켜보고 맘에 들어 리호은을 길림성3팀에 데려갔다. 이렇게 되여 리호은은 1972년 5월부터 길림성3팀의 축구선수로 활약하게 되였다.
1973년도부터 전국청년련맹경기가 펼쳐지게 되였는데 리호은이 속한 길림성3팀은 대외적으로는 길림성청년2팀으로 경기에 참가하였다. 전국청년련맹경기는 전국각지에 시합구역을 나누어 진행했는데 전국 각 성시 수십개 팀들이 참가한 경기에서 2위권에 들어야 결승단계 시합에 참가할수있었다. 당해 길림성청년2팀은 전국청년련맹경기에서 전국 7등을 따냈고 이듬해인 1974년도에는 5등을 따냈다.
 
리호은이 한창 축구인생에서의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있을때 뜻하지않던 사건이 발생했다. 1975년도에 북경팀과의 경기중 머리를 다쳐 휴양치료하느라고 잠시 팀을 떠났는데 설상가상으로 1976년 국경절에 있은 룡정공업기업축구시합에서 또다시 상해 더는 축구를 할수없게 된것이다. 룡정간부료양원에서 료양하면서 치료를 받고있는 와중에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1987년 김지양, 은철생 등 감독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리호은감독.(오른쪽)
 
1977년도에 대학입학시험제도가 회복되여 배움의 활무대가 펼쳐진것이였다. 대학시험이 있은후 동북사범대학과 연변대학 두곳에서 입학통지서가 왔다. 다년간 축구에만 전념해온 리호은은 망설임없이 연변대학 축구전업을 선택했다.  1982년도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을 졸업한 리호은은 도문시 4중에 축구교원으로 배치되였다. 도문시4중학교에서 리호은은 학생축구팀을 무어 당지 학교팀들과 경기를 조직하면서 학생축구발전에 대해 부단히 탐색하였다. 1983년도에 리호은은 사업의 수요로 룡정체육학교에 전근, 소학교축구팀을 만들었다. 연변팀에서 소문났던 김영수, 황용 등 축구선수들이 바로 그때 리호은감독이 가르치던 학생들이였다. 룡정시체육학교 소학교축구팀은 1984년도에 전주 소학교축구경기에서 전주 2등의 영예를 따냈다. 1984년도 년말에는 룡정체육학교팀을 만들었는데 1985년도에 전주 체육학교축구시합에서 우승을 했다. 우승한 룡정체육학교팀을 바탕으로 1985년도에는 전주 소년축구팀을 무어 전국 《희망컵》축구시합에 참가했는데 그해 8월 《희망컵》우승을 따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길림성 축구무대에서 감독재능이 점차 널리 소문나면서 리호은은 1985년도에는 길림성무장경찰축구팀 창단에 초빙되여 군 축구팀을 만들기도 했다. 1986년도에 리호은이 창단을 맡은 길림성무장경찰축구팀은 당해 1월 전국 제1차농민축구대회에서 2등을 했으며 7월에 있은 전국공안계통축구시합에서 5등을 했다.
 
1993년 1월 동계훈련에서.(뒤줄 네번째 리호은)
 
리호은이 한창 군부대에서 축구감독의 재기를 펴보이려할때 부득이한 사정으로 무장경찰축구팀이 무산되면서 리호은은 배운 전업과는 십만 팔천리나 차이있는 연변변방지대 정치처에 배치받아야 했다. 본인의 전업외에는 문외한인 리호은은 1987년도에 길림성2팀에 코치로 차용되여 계속 축구관련사업을 할수있게 되였다.  1988년도에 리호은은 연변주체육학교의 축구팀 창단 요청을 받고 축구팀을 만들었다. 1990년도에는 전업팀인 연변체육공작대2팀을 만들어 전국 청년련합경기에서 3등을 따냈다.  1991년도에는 전국 을급련맹경기에 2팀을 이끌고 참가했으며 련맹경기가 끝난후 길림성팀을 맡게 되였다.
 
길림성팀은 갑급리그 2부에 있는 팀이였는데 성1팀과 2팀을 합쳐서 만들었다. 길림성팀을 맡은후 리호은은 팀을 새롭게 정비하고 훈련을 강화했다. 훈련방법과 관리방법에서 모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것이다. 전면공격 전면방어의 《전공전수》의 축구 새바람을 몰고 온것이다.
 
리호은은 90년대초에 《전공전수》의 새로운 축구바람을 일으킨데 대한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1993년 4월 고종훈, 김광주 등 제자들과 함께.
 
다년간 유소년 축구팀으로부터 시작해 청소년 축구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축구팀을 창단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세계선진축구자료와 축구동향에 대해서도 예의깊게 중시하고 연구했으며 또 대학교 공부를 통한 리론면의 학습연구에서 리호은은 중국축구가 세계선진축구와의 거리감을 느꼈다. 특히 여러가지 축구객관규률을 떠난 훈련방법과 관리방식이 존재하고있다고 느꼈다. 축구는 구상해서 만드는것이 아니라 현유의 상황에 맞게 선수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시키고 이끌어내는것이 중요하다. 리호은감독이 주장하는 《전공전수》의 축구 역시 선수자질과 체력, 정신, 기술 등 모든 것이 구비되여야 실현되는것이라고 리호은 감독은 인정했다.
 
당시 로장선수들인 고종훈, 최광일, 방근섭, 김광주 등이  상당한 축구자질을 갖추고있었고 신진들인 리시봉, 김영수, 황용 등 젊은 선수들도 자질이 뛰여났다. 여기에 《전공전수》축구의 새로운 관리방법을 도입하니 금방 효과가 나타날수있었다.
 
1999년 1월 조선 방문시 문호일, 한송봉과 함께.
 
《전공전수》의 축구를 처음 시작했을때는 적응이 어렵기도 했다. 그러나 선수들이 적응이 힘들고 어렵다면서 두려워 주저앉는다면 새로운 축구가 탄생될수 없는 일이였다.
 
리호은감독이 주장하는 전면공격 전명방어의 축구는 선수들이 체력과 의식이 따라가야 하는 축구이다. 공격수는 공격만 하고 수비수는 수비만하던 과거의 축구형태로부터 공격과 중앙선, 수비 등 3선이 동심일체로 되여 전반 경기의 11명 선수가 한사람처럼 움직이는것이다. 공수전환속도가 빨라야 하고 상대에 공을 빼앗겼을때 모든 선수가 동일체가 되여 수비하고 공을 주도할때면 모든 선수가 공격에 가담하는것이 바로 리호은감독의 주장하는 《전공전수》축구의 리념이였다.
 
1992년도 갑급리그 2부련맹경기에서 리호은감독이 이끄는 길림성팀은 2등으로 갑급리그 1부에 올라왔다. 그해 있은 전국제7차운동회에서 리호은감독이 이끄는 길림팀은 전면공격 전면방어의 진수를 전국에 보여주어 크게 소문났다. 그번 운동경기에서는 전국의 축구 4강팀들인 북경, 천진, 대련, 길림 등 팀들을 요청하여 경기를 펼쳤는데 길림성팀은 《전공전수》의 새로운 축구를 선보이면서 북경팀을 5:1로, 천진팀을 4:0으로, 대련팀을 3:1로 제압하면서 모든 적수들을 통쾌하게 꺽어버리는 기염을 토했다.
 
중국국가축구팀 전임 척무생감독과 함께.
 
예선전에서는 당시 전국적으로도 막강한 실력을 가자고있는 상대였던 8.1팀과 맞붙어 4:0으로 이겨버렸다. 경기에 대한 책임으로 양립민 8.1팀감독은 경기후 곧바로 사직하기까지 했다. 양립민감독과는 그것이 인연이 되여 지금 절친한 사이가 되였다고 한다.
 
연변팀이 옛날의 연변팀이 아니라는 소문이 크게 나면서 인민일보 등 주류매체들에서도 축구는 바로 이렇게 차야 하는것이라고 격찬하기도 했다.
 
1994년도에 중국축구프로리그가 시작되면서 리호은은 국가축구공작회의에 참가하여 길림성축구가 전국축구무대의 《흑마》로 되여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경험을 소개하기도 했다. 중국축구협회에서도 리호은감독에게 큰 중시를 돌리고 통역까지 딸려서 독일에 류학보내기도 했다. 리호은감독의 독일류학은 중국축구사상 지방팀의 감독을 해외로 류학보낸 전일무이한 첫 사례이다. 독일류학을 하면서 리호은감독이 받은 유럽축구련맹의 교련원자격증은 지금까지도 전국적으로 2명밖에 없을 정도로 아세아인감독들은 타기 힘든 자격증이기도 하다.
 
2004년 12월 북경에서 중국축구협회프로급교련원강습반에서의 리호은(뒤줄 오른쪽 첫번째).
 
독일류학을 마치고 돌아온후 리호은감독은 계속 길림삼성축구팀의 감독으로 있었는데 1994년도의 길림삼성축구팀의 경기성적이 리상적인 되지 못하였다.
 
그 원인에 대해 리호은감독은 축구선수 류실과 고갈로 선수래원이 끊어졌고 중국축구가 직업화의 길을 걷게 되면서 경제적인 원인으로 우수한 외래선수영입이 힘들었던 점 등을 꼽았다. 특히 리호은감독이 축구팀의 사령탑을 잡고있던 1995년도부터 96년도사이 연변팀은 직업련맹경기에서 경제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기성적이 부진했다.
 
1997년 감독직을 사퇴한 리호은은 2년동안 한국에 나가있으면서 한국의 프로팀과 실업팀은 물론 각지 대학교팀과 고등학교축구팀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고찰을 진행했다. 한국축구팀의 이차만감독과 장외룡감독들과도 교분을 쌓으면서 한국의 선진적인 축구를 많이 공부했다.
 
1998년 리호은감독은 연변축구구락부로부터 귀국하여 새로운 청소년축구팀 창단 경선에 참가하라는 통지를 받게 되였다. 한국에서 배움에 목말라있긴했지만 연변축구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간다는 축구에 대한 사랑과 사명감으로 리호은감독은 당해 12월 한국에서 귀국하였다.
 
그해 겨울 낯선 60여명 선수들의 명단만을 받아든채 엄동설한에 2개 팀을 만들어 경기를 시켜보았고 해당 교련원들을 찾아다니면서 선수들의 정황을 료해하고 27명의 선수들을 선정해 팀을 무었다.
 
1993년 4월 고중훈선수와 기념사진을.
 
경제상황이 어려워 비행기도 못타고 조선 청진에서 기차로 평양까지 움직이면서 해외강훈련을 진행했다. 조선의 일류축구팀들과 교류하면서 팀수준과 경기력이 빠른 속도로 향상됐다. 조선에서 1년간의 봉페식훈련을 마치고 연변청소년축구팀은 1999년 10월말 돌아왔다. 그렇게 돌아온 구단은 2001년도부터 연변팀으로 명명되여 을급리그경기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창단과 함께 성장한 선수들이 바로 윤광, 문호일, 한청송, 한광화 등 선수들이였다.
 
리호은감독은 당시 연변체육계 지도부의 연변청소년축구팀 창단이 연변축구를 중국축구무대에 남아있게 한 력사적이고 의미있는 결책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팀이 바로 을급팀에서 갑급리그로 올라온 연변팀의 전신이기때문이다. 팀에는 2003년도까지 있었다.
 
2004년도에는 싱가포르에 가서 팀감독을 맡다가 당해 싱가포르 련맹경기가 끝나자 한국아세아축구련맹a급교련원학습반에 참가, 그해 11월부터 2006년 2월까지는 중국축구협회의 국제축구련맹 프로감독학습반도 수료했다. 척무생, 주광호, 지상빈 등 중국 국내의 거물급감독들과 함께 공부한 그번 학습반은 《황포1기》라고 불리울만큼 과정이 길고 힘들었으며 마지막까지 견지한 감독들이 16명밖에 안되였다.
 
선수 감독진과 함께 전술을 토론하고 있는 리호은감독.
 
2007년도에 리호은감독은 감독경선에 참가했으나 락방되고 연변축구구락부주임직을 맡게 된다. 당해 리호은은 한국 sk그룹과 500만원의 협찬계약을 완수하기도했다.  2009년도에 연변주당위와 주정부의 책임일군들이 연변축구구락부에 조사연구를 내려왔을때 리호은감독은 정부적 차원에서 연변축구에 대해 지원할데 대한 건의를 제기하여 긍정을 받았으며 그후로부터 정부적차원의 구단지원이 시작되였다.
 
2010년 10월에 연변축구구락부주임직에서 물러난후 리호은감독은 청도에 있는 장외룡감독한테 갔다가 2013년도에 다시 연변축구팀의 사령탑을 잡게 되였다. 사령탑잡기까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연변축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다시 돌아오게 된것이였다.
 
2014년 연변축구팀의 감독으로서 리호은감독은 감독이 경기성적에 책임지는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팀부진의 여러가지 개관적 원인을 꼭 잘 분석하고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바로 다른 감독이 팀을 맡았을때 더 잘할수있는 중요한 원인이 되기때문이다.
 
올해 연변팀의 축구경기성적이 매우 좋은데 대해 리호은감독 역시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 리감독은 축구성적이 좋으면 축구에 참여하려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축구꿈나무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도 불어일으킬수있다고 말했다. 그는 축구보급이 넓어질수록 연변축구의 발전에는 유리하다며 연변축구인재들이 줄어들고있는 현상황에서는 매우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1994년 국제축구련합 강습반에 참가차로 브라질 파라카나체육장에서 기념사진을(첫줄 오른쪽 첫번째 리호은).
 
리호은감독은 축구는 선수와 관리, 후근 등 다방면의 선진적인 결책과 수단들이 모여서 축구발전을 이끄는것인만큼 지금처럼 연변축구의 형세가 좋을때 정확한 결책이 이루어져 연변축구발전에 존재하는 문제점들은 찾고 보완하며 장원한 견지에서의 연변축구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리념과 조치들을 강구해야한다고 제언했다.
 
열다섯살 소년시절부터 시작한 축구인생이 어언 짧지않은 45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리호은감독이 연변축구의 발전에 바친 노력과 기여도 연변축구의 휘황한 성적속에 당당히 한몫 들어있다.
 
연변축구는 꼭 밝은 미래가 있을것이라고 리감독은 말했다. 연변축구는 과거에도 그러하지만 영원히 타지방 축구와는 전혀 다른 독특하고 매력적인 축구풍격이 있고 축구를 무한히 사랑하는 열광적이고 적극적인 연변축구팬들이 언제나 연변축구와 함께하고 있기 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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