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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5]건국후의 우리 민족의 축구명장 장경천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22 15:44:46 ] 클릭: [ ]
연변팀 전국 우승 50돐 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을 찾아서 》(15)
 
 
지금 많은 축구 팬들과 선수들 가운데 우리 민족의 축구영웅 장경천선수에 대해 아는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후 50, 60년대 중반까지 우리 나라 축구선수들중의 최고 중간방어수가 바로 장경천선수였다. 그도 한때는 연변팀의 중간방어수로 팀에 공헌한 한  사람이다.

《중국조선족민족문화사대계》(체육사)는 장경천선수에 대해 《1950년대 중국의 드넓은 땅우의 모든 선수들중에서 제일 우수한 중간방어수를 고르라면 아마 지도원들마다 조선족선수 장경천(张京天)을 짚었을것이다》라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새 중국이 창건된후 국가팀에 제일 오래동안 있은 조선족선수가 바로 장경천이다》고 쓰고있다.

1935년생인 장경천선수는 심양출신으로 체중이 65키로그람이고 1.68메터의 축구선수로는 자그마한 키였지만 슈팅과 헤딩 기술이 매우 뛰여났으며 중간지역에서의 련락이 정확하고 부지런하고도 용맹스러워 《작은 호랑이》라는 별호를 달고 중국의 축구무대와 국제축구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명장이였다.

1954년 박만복, 김창길, 최호균, 김인걸, 최증석, 장경천, 박증철이 국가팀에 선발되고 첫 웽그리아 류학을 떠났다.

장경천선수는 심양체육학원에 입학한 후에도 계속 우리 조선족으로 무어진 동북팀의 중견선수로 활약하였다. 1954년 웽그리아에 갔다온후 인츰 국가팀에 입선되여 팀의 중간방어수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워낙 뽈재주가 있는데다가 웽그리아 류학경력까지 가진 그의 축구기술 특히 중간방어기술은 중국의 그 어느 선수도 초과할이가 없었다. 그는 1957년 제6회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와 대양주지역의 예선경기에 출전하기도 하였으며 동구라파의 동부독일과 체스꼬 등 나라에서 있은 경기에서 자기의 기량을 뽐내기도 해 축구계와 팬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1956년 장경천은 또 최증석 등 선수들과 함께 제16차 올림픽운동회 예선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1957년 《북경일보》, 북경방송국이 전국적범위에서 공동으로 진행한 중국의 《가장 사랑스러운 축구선수》에 당선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체육운동위원회서 선정한 《축구운동건장》 22명 명단에 제3순위로 이름을 올렸다. 장경천선수는 축구기술, 체력겸비, 체육지식, 전술의식이 강하고 대항성경험이 많은 선수로 국가팀 감독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아온 선수이며 국가팀에서 제일 오래동안 뽈을 찬 선수이기도 했다.

1962년 10월 17일, 국가 《체육보》에서 조직한 22명 《전국축구우수선수》평정에서 장경천선수는 순위 1위를 차지했고 국가체육운동위원회로부터 《체육명수》란 칭호도 수여받았다.

국가팀에서 나온 장경천은 나라의 축구사업을 위해 후대양성에 힘을 쏟았다. 1973년 전국중학생팀 사령탑을 잡은 장경천은 자기의 풍부한 축구기술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하여 1974년 오스트리아에서 있은 세계중학생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우리 나라 중학생팀은 6전 5승 1무의 불패의 기록을 내며 단연 1등을 해 세계축구계를 깜짝 놀래웠다. 이는 우리 나라 축구계에서 사상 처음으로 되는 훌륭한 성적이였다.

80년대에 들어서서 장경천은 국가희망팀, 공군팀, 수도강철공사팀 등 이름 있는 축구팀의 감독을 력임하며 장장 40여년간 축구와의 인연을 이어왔다.

1981년 《국가체육보》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후 소수민족의 우수한 선수들이 속출되여 중국의 축구사업에 공헌했다는 론평에서 장경천축구명장의 이름을 거론하며 극찬했다.
김원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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