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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축구50년10]그라운드의 《제비》로 불렸던 공격수

편집/기자: [ 김룡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5-09-03 08:35:13 ] 클릭: [ ]

연변팀 전국우승 50돌기념 계렬보도《영광의 주인공들 찾아서 》(10)

-길림성축구팀 간판공격수 고 동경춘원로

《축구란 체능, 기술과 정신력을 토대로 하는 종합스포츠이다. 또한 하나의 축구팀한테 있어서 총체적배합도 중요하겠지만 속도가 빠르고 돌파능력이 강하며 슈팅성공률이 높은 스트라이커를 육성해내는것도 자못 중요한 고리이다.》

이는 지난 50-60년대 전국축구무대에서 《제비》라 소문 놨던 길림성축구팀의 간판공격수 동경춘원로가 생전에 했던 축구운동에 대한 일가견이다.

1937년 왕청현 쌍하촌 태생인 동경춘은 체력이 왕성하고 한번 뛴다고 하면 군마를 탄 일본헌병마저도 붙잡지 못했다(동경춘원로의 할아버지가 뛴다고 하면 한번에 밭고랑 세고랑씩 건너뛰였다는 설도 있었음)는 할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어릴적부터 축구, 롱구, 속도스케이트, 륙상 등 체육운동을 몹시 즐겼는데 그중 제일 큰 장끼는 그래도 사람들을 경악케 하는 그의 속도였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늘 어머니의 심씨와 동네 어른들의 총애를 받음과 더불어 자주 어른들이 치르는 축구경기에도 선수로 뽑히군 했다.

1965년 전국축구갑급련맹전 우승후 찍은 집체사진(첫줄 오른쪽 세번째 동경춘원로)

동경춘의 속도는 1952년 길림시에서 있은 전 성 중학교륙상경기대회에서 재능이 과시됐다. 100메터를 11초 06(후에 11초 03이 절정이였음)에 달렸다. 그리고 만메터경주에서도 5등을 하여 내력이 강함도 보여줬다.

동경춘의 이런 장끼는 선후로 있은 성, 주와 국가급 축구경기에서는 물론 1957년 길림성축구팀에 가입해서부터 더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 시기 동경춘은 키가 고작 1.65메터에 불과했다. 하지만 경기장에서 그가 공을 몰고 달린다 하면 상대방 선수들은 따를수가 없어 혀를 내두르기가 일쑤였고 경기장방송원도 늘 길림성팀의 키가 작고 고수머리인 동경춘에 대해 일장소개를 늘여놓군 했다. 그래서인가. 허느 한번 길림성팀이 경기를 관람하고 난 국가체육운동위원회 주임이였던 하룡원수는 동경춘한테 《모터찌클》이란 별호를 달아주었으며 당시의 축구팬들 또한 그를 길림성팀의 《제비》라고 정답게 불러주군 했다.

구쏘련 초청경기에 참가한 길림성팀 동경춘원로(왼쪽 첫번째).

동경춘이 이렇게 불리우게 된데는 물론 천성적으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속도장끼》가 작용한건 사실이였다. 하지만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운동훈련량을 견지하고 소화해낸 그 정신력의 결실이라고 함이 더 지당할것 같다. 당시 길림성축구팀의 많은 선수들은 매일 3-4시간씩 되는 집단훈련외에도 늘 시간을 리용하여 산길달리기를 견지했는데 그야말로 흐르는 땀이 염분으로 되여 몸에 하얗게 내돋기가 일쑤였다고 한다. 하긴 그 시기엔 누구 하나 돈을 보고 고생을 사서하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당과 인민이 선수로 되게 한 영예와 집에서 고생하는 안해때문에 모두가 하나같이 경기에서 정신력을 과시할수 있었던것이다. 그런 연고로 동경춘은 해마다 체능시험때면 1등으로 뽑히워 인민일보, 해방군보, 광명일보 등 많은 보도매체들에서도 앞다투어 그의 사적을 대서특필하군 했다.

1995년 연변로장축구협회 회장 동경춘원로(첫줄 오른쪽 첫번째)

동경춘의 가정은 또 영광스러운 혁명렬사 유가족이기도 하였다. 그의 큰형 동경학은 1946년도에 참군하여 사평, 장춘, 공주령 전투에 참가, 1950년 항미원조전쟁에서 미군의 함포사격에 희생되였고 둘째형 동경록은 1946년에 참군하여 사평전투에서 장렬히 희생되였었다. 하다보니 항렬로 셋째였던 동경춘이 결국엔 집안에선 맏이노릇을 하고있었다.

《우리 집안은 영광스러운 렬사의 가족이다. 그러니 어찌 나라의 배려에만 손을 내밀고있겠는가. 나도 뭔가 보답해야 한다!》

동경춘이 축구에 발붙이게 된 동기이자 지향한 목표였다. 그의 고심참담한 노력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1957년 4월, 동경춘은 연변청년축구팀에 선발된데 이어 그해 11월 화룡의 김석주, 훈춘의 채수은과 함께 길림성축구팀에 발탁됐다.

1965년은 동경춘의 축구생애에 있어서의 전성기라 할수 있었다. 그해에 길림성축구팀이 전국우승을 한것과 더불어 그는 축구운동건장칭호를 받았고 간염때문에 신체검사에서는 락선됐지만 국가팀에서 가장 욕심내는 선수로 되기도 했다.

2000년 제19회 한국 회장기국민생활체육 전국축구대회에 참가한 원로들(첫줄 오른쪽 네번째 동경춘선생).

헌데 그가 계속 경기장에서 청춘을 빛낼 무렵 문화대혁명이 터지였다…

문화대혁명 이후 동경춘원로는 길림성청년팀 감독, 연변녀자축구팀 감독, 연변체육공작대 기술통계원 등 사업에 종사하면서 후대양성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그중엔 전 길림오동팀의 김광수, 고종훈, 리광호, 황동춘, 김영수, 장경화 등이 들어있다. 또한 동경춘원로 역시 1967년에 국가고급감독증서를 수여받았고 선후로 《중외축구명인사전》, 《중국체육인재사전》, 《중국전문가사전》 등 명인록에도 수차 수록됐었다. 지난 20세기 90년대 말부터 다년간 연변로장축구협회 회장직을 맡으며 중국조선족축구를 위해 모든것을 아끼지 않았던 동경춘원로는 지난해 봄 불행히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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