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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백인52]해란강반에 위훈 떨친 그 이름 김시룡

편집/기자: [ 김영화 ] 원고래원: [ 길림신문 ] 발표시간: [ 2013-09-02 16:47:04 ] 클릭: [ ]

김시룡은 1919년 5월 21일, 조선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 로송동 삼밭더기의 한 가난한 화전민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바로 조선의 《3.1민족운동》이 폭발된 두달후였다.

그는 16살나던 해에 쪽박 차고 부모님을 따라 연길현 춘흥구로 이주했고 3년뒤인 1938년 지금의 동성향 영성촌의 한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지주들과 생사결단의 싸움을 한 끝에 머슴살이를 하던 김시룡네 가족은 토지개혁운동을 거쳐 논 13무, 밭 3무를 분여받았다. 땅의 주인으로 된 김시룡은 해란강반의 기름진 벌에 깊이 뿌리박고 대를 이어가며 살기로 작심한다. 1947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김시룡은 당원으로 된 높은 긍지와 자각을 안고 호조합작운동에 헌신적으로 나선다.

자료에 따르면 김시룡이 살고있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에서 《호조조》를 정식으로 꾸린것은 1947년 여름이라고 한다. 그때 이곳에서는 토지를 분여하면서 전 마을을 한데 합해 한개 《호조조》를 무었다.

호조합작의 경험이 없는 형편에서 대번에 큰조를 뭇고보니 모순이 련속부절히 나타났는데 로력랑비가 많고 로력공수평가가 합리적이고 과학적이 못되여 생산적극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생산력발전에 커다란 장애로 되였다. 그해 가을 중농이상 농호 일곱집이 먼저 《호조조》에서 물러나가자 억지로 참가하였던 농민들과 로력, 부림짐승이 넉넉한 집들도 슬금슬금 《호조조》에서 빠져나갔다. 영성에서 처음 조직한 《호조조》는 이렇게 유야무야해지고말았다.

1948년 봄, 《대형호조조》를 강제적으로 조직하여 실패한 경험교훈을 찾고 이번에는 자원호혜의 원칙을 관철하여 《소형호조조》를 조직하였다. 영성에서는 서로 뜻이 맞고 감정이 맞는 농민들이 네댓 혹은 대여섯씩 한개 조를 무어 전 촌을 여섯개 《호조조》로 조직하였다.

여섯개 《호조조》중 갑자기 김장룡호조조에서 조원 한사람이 병사하는바람에 로력이 결핍하여 흩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김시룡은 자원적으로 《김장룡호조조》로 넘어갔다. 김시룡은 조장을 도와 《호조조》를 잘 꾸려나갔다. 김시룡의 꾸준한 노력에 의해 로력이 늘 딸린다던 이 《호조조》는 개체농호보다 1주일 앞당겨 타작을 끝마쳤다.

시초에는 4호로 무어진 호조조를 운영하였는데 운영이 잘되자 부근의 4개 호조조와 자원련합하여 25호로 된 련조로 발전되였으며 김시룡이 련조조장으로 되였다.

 
풍년든 세전벌에 농민전문가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김시룡(오른쪽)

1949년 김시룡련조에서는 《표준품제》를 실시하여 일부 주요모순을 풀어제끼고 호조조를 공고히 하고 생산을 발전시켰다. 그들의 경험은 전 현에 일반화되여 호조합작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

김시룡은 1950년 봄에 길림성특등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다. 그리고 영성촌당지부 부서기로 당선되였다. 그 당시 연길현당위 서기로 있었던 송진정동지가 친히 김시룡호조조의 《생산량보증제》경험을 기사화해 중앙간행물인 《붉은기》잡지에 큰 편폭으로 소개했다. 그때로부터 김시룡호조조는 전국에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고 김시룡은 전국로력모범으로 당선되였다. 같은 해 9월, 김시룡은 조선족으로는 유일하게 북경에서 건국이래 처음 열린 전국전투영웅대표대회와 전국공농병로력모범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 회의에서 김시룡은 모택동주석을 처음으로 만나뵈였다.

1951년 3월하순, 중공연변지위에서는 김시룡호조조에 사업조를 파견하여 초급농업생산합작사를 세우는 시점을 했다. 이것이 바로 연변의 반사회주의성질을 띤 첫 초급농업사였다.

1952년, 김시룡은 사원들의 민주를 충분히 발양해 토지고의 분홍(分红)비례를 적당히 낮추고 로동고의 분홍비례를 적당히 올린 토대우에서 《로동자보제》를 실시했다. 그들의 《로동자보제》는 동북행정위원회 농업국의 호평을 받았고 그들의 추천으로 전 동북농업사들에 널리 일반화되였다.

포전에서 학생들에 강의하고있는 김시룡(오른쪽 세번째)

허나 구차한 화전민가정에서 태여나 학교문이라곤 가보지도 못해 낫 놓고 기윽자도 모르는 김시룡은 해방후 호조조를 꾸리면서부터 글을 배우지 못한 쓴맛을 보게 되였다. 그가 써놓은 기공장이란 숱한 세모꼴, 네모꼴, 동그라미, 점선을 가로세로 그어 오려놓은것이여서 그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였거니와 그자신도 알아보기 힘들어 애간장을 여간만 태우지 않았다. 농업사를 꾸리고 지도사업을 맡아하면서부터 글을 배우지 않고선 사업을 잘할수 없다는것을 절실히 느끼게 된 김시룡은 낮이면 일하고 밤이면 야학을 다니면서 부지런히 글공부를 해 1년사이에 문맹에서 벗어났다.

일찍 중국농민견학단의 일원으로 쏘련을 견학할 때 김시룡은 쏘련의 한 집체농장 주석이 60세되는 해에 한 전문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자기가 맡은바 과업을 훌륭히 수행할수 있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큰 감동을 받았다. 김시룡은 이 사실로 현대화한 농업, 현대화한 사회주의나라를 건설하려면 농민들도 현대농업과학기술지식을 배우고 소유해야 한다는 도리를 널리 선전하였다. 이때로부터 김시룡과 동성용향의 농민들은 업여농민대학을 세우고 현대농업과학기술지식을 장악할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시룡은 과외농민중학을 영성촌에 세우고 2년동안 운영하였는데 그 효과가 컸다. 영성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을 다니지 못해 빈들빈들 놀기만 하던 청소년들이 업여농민중학을 다닌후로부터 농촌생력군의 역할을 놀았던것이다. 이 실천가운데서 과외농민대학을 세우려는 그의 욕망이 더욱 간절해졌다.

김시룡이 쏘련견학을 다녀와서 6년이 지난 1958년 2월말에 전국 18개 성, 시 문맹퇴치선전단위대표회의가 북경에서 열렸다. 당시 김시룡은 김시룡고급사대표로 대회에 참석했다. 김시룡은 회의에서 《농민들은 문화를 수요할뿐더러 농민들도 문화를 배울수 있다》는 제목의 발언을 했다. 김시룡은 발언에서 몇년래 연변의 문맹퇴치사업이 거둔 성과를 회보하고나서 과외농민대학을 세울데 대한 자기의 생각을 말했다. 대회가 결속된후 진의부총리는 김시룡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김시룡에게 돌아가서 과외농민대학을 꾸릴 임무를 주었다.

 
김시룡이 설립한 새벽농민대학

4월 중순, 연변주당위 제 2서기였던 요흔과 연변주당위 부서기인 전인영이 참석한 회의에서 준비위원회 성원들을 임명하였는데 연변주 문교부, 교육처, 연변농학원, 연길현인민위윈회, 동성향인민위원회의 일군들이 준비위원회 성원으로 되였다. 그번 회의에서 학교이름을 연길현새벽농민대학으로 정식 확정하고 향당위서기 박안철을 명예교장으로, 김시룡, 리학림을 명예부교장으로, 최경택을 교육장으로 임명하였으며 5월 1일 정식 개학식이 열렸다.

1961년 9월, 김시룡은 제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연길현새벽농민대학의 경험을 소개했는데 중앙지도자들의 중시를 받았다. 새벽농민대학시기 농학과를 설치하였는데 학제는 3년 혹은 4년이였다. 과목은 정치, 보통화학, 유기화학, 식물학, 식물생리학, 농업미생물학, 유전학, 토양학, 농업화학, 농업기상학, 농업곤충학, 식물병리학, 과수재배학, 작물재배학, 작물육종학 등 15개였다. 새벽농민대학은 건교이래 도합 3000여명에 가까운 대학생을 배출했고 500여명에 가까운 직업고중생을 졸업시켰으며 기타 각종 양성반도 무수히 꾸렸다.

새벽농민대학은 그야말로 농촌의 기술인재와 기층간부를 양성하는 훌륭한 기지로, 우량종을 배육하고 농업과학기술지식을 보급하는 훌륭한 기지로 되여 농민대오의 지식구조를 개변하고 농촌의 현대화건설을 추진하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했다.

연길현새벽농민대학 창립 34주년이 지난 두달후인 1992년 7월 17일, 김시룡은 75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김시룡 그 이름은 해란강반에, 조선족군중들의 마음속에 길이 남아있을것이다.

참고문헌: 《해란강의 넋》  박하림 저

         《문화시대》 2012년 제3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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